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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732
영어의미역 Guardian Posts of Sulgol Villag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필영

[개설]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술골에서는 장승을 마을의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장승제를 지낸다. 마을 입구 장승거리에 있는 남녀 장승은 각각 ‘천하대장군축귀신(天下大將軍逐鬼神)’과 ‘지하대장군축귀신(地下大將軍逐鬼神)’이라고 명명(命名)된다. 그 옆의 짐대에는 긴 장대에 나무로 깎은 오리를 앉혔다. 이들 장승과 짐대는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장승제는 기본적으로 분향(焚香)-강신(降神)-헌작(獻爵)-독축(讀祝)-음복(飮福) 등 유교식 제사로 구성되지만, 여기에 소지·헌식(獻食)·해물리기 등의 민속적 의례도 덧붙여진다. 장승제를 마치면 집집마다 장광에서 터주고사를 지내고, 다음날은 마을의 제반 사안을 결정하는 동회(洞會)를 연다. 술골의 수문장 장승은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 술골]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술골계룡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6㎞ 떨어져 있고, 논산시내로부터는 동북쪽으로 16㎞ 정도에 위치해 있다. 마을 앞 곧 서편으로는 지방도 691호선이 나 있어서, 연산면의 지방도 697호선 및 노성면의 지방도 645호선과 각각 이어지고 있다. 마을 동북쪽으로는 주산(主山)인 매봉재산(115.2m)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주곡리 북쪽으로는 학당리대촌리가, 서쪽으로는 지방도 697호선 건너편에 대우리가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산 하나를 넘어 한천리가, 서쪽으로는 노성천 건너편에 노성면 교촌리읍내리가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고택(古宅)이 서쪽으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주곡리는 본래 노성군 하도면 지역으로 마을 앞으로 큰 길이 있고 술집도 많았으므로 술골, 주막거리, 주곡(酒谷) 등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주막리(東酒幕里)와 서주막리(西酒幕里)를 병합하여 주곡리라 하고, 논산군 상월면에 편입시켰다. 동주막리는 노성천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동주막거리 또는 삼거리라고도 불렀다. 아주 오래전에는 연산읍·노성읍·신도안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었는데 여기에 주막이 번성하였다. 서주막리는 노성천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 서주막거리 또는 사거리라고도 했다. 역시 공주·노성읍·연산읍·은진 방면으로 가는 네 갈래의 큰 길에 주막이 있었다. 일설에는 동주막·서주막·마근동의 세 뜸이 합쳐져 주곡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주곡리는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서는 방축리(防築里)·주곡리(住谷里)·주막리(住幕里)로 기록되어 있고,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서는 ‘주곡리(住谷里)’가 ‘주곡리(酒谷里)’로 되어 있다. 현재 주곡리는 흔히 ‘숯골’[炭洞]이라 부르나 주막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하는 ‘술골’이란 동명(洞名)도 함께 쓰이고 있다. 주곡리는 윗뜸·아랫뜸·마근동(망가리)의 3개 마을로 구성된다. 이들 마을은 각각 청주양씨·함평이씨·전주이씨의 집성촌이다. 선조청주양씨 9대손인 첨정공이 윗뜸에 정착했고, 숙종 때에 함평이씨 18세손 함평군이 청주양씨와 혼인하여 아랫뜸에 자리를 잡았다. 영조 때에는 전주이씨 문헌공이 입촌했다. 이들 3성(姓) 대표는 마을의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를 흔히 ‘3파 회의’라고 한다.

마을 입구인 장승거리를 지나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충청남도 지정 민속자료 제7호인 이삼(李森) 장군 고택이 나온다. 이삼(1677~1735) 장군은 조선 영조 때의 무관으로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그리고 병조판서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건축 자재와 비용을 하사받아 이 집을 지었다. 솟을대문 앞에는 이삼 장군이 생전에 말고삐를 매어두곤 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아주 오래전 두레 나던 시절에 이곳 술골은 ‘선생마을’로 이름이 나 있었다. 술골을 중심으로 노성면 교촌리 향교골, 읍내리 고랭이, 둥둥골, 옥거리, 상월면 주곡리 한천리 들말, 안골과 함께 합두레를 했다. 대개 백중 이전에 날을 잡았는데, 이들 7개 마을은 술골이나 그 앞의 벌판에서 합두레를 먹었다. 이곳도 여느 마을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호구 수가 많이 줄었다. 1980년대에는 100여 호 남짓 되는 대촌(大村)이었다지만 지금은 65세대에 16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생업으로는 벼농사를 위주로 하지만 또한 특수 작물로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술골 장승제의 유래담 및 영험담]

술골의 장승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술골의 입촌주(入村主)가 장승을 처음으로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부하의 아내를 탐하여 빼앗은 장씨(張氏) 정승(政丞)을 응징하는 데서 장승을 세웠다는 유래담이다. 조선 선조 때에 청주양씨 통훈대부(通訓大夫) 내자시(內資寺) 첨정공(僉正公) 양춘건(梁春建)이 신도에서 숯골로 이사하면서 마을 입구에 장승을 만들어놓고, 해마다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하여 장승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곧 마을이 생기면서부터 장승제를 지내왔다는 것이다.

한편 장씨 정승의 유래담도 전한다. 고려 말기에 장모(張某) 정승(政丞)과 그의 수하에 강춘식(또는 강춘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강춘식의 아내가 매우 예뻐서 장 정승이 항상 탐욕을 품고 있었던 중에 마침 그가 중국 사신으로 가게 될 일이 생겼다. 이때 장 정승은 부사(副使)로 강춘식을 데려가서, 국경을 넘자마자 그를 죽이고, 본국에는 중국의 황제에게 죄를 지어 그 자리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미망인이 된 강춘식의 아내를 계속 설득한 장 정승은 결국 그녀를 소실로 맞아들여서 낙향한 다음 삼 형제를 낳았다.

비 오던 어느 날 집안에 천장을 타고 황토빛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장 정승이 “예전에 강춘식이 흘리던 피와 같구나.”하며 빙그레 웃자, 이를 이상히 여긴 부인이 “원수의 자식을 낳았다.”며 자신의 자식 세 형제를 불러다놓고, 뒤를 돌아보게 한 후에 방망이로 내리쳐 죽이고, 그 길로 관아로 달려가 사실을 알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장 정승을 능지처참하고,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장 정승처럼 깎은 나무를 거리에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침을 뱉고 욕을 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계조선을 건국하고 난 뒤, 단순히 여자를 탐하여 후세까지 욕되게 하는 것이 불쌍하다 하여 장 정승의 영혼을 달래 호국지신(護國之神)이 되도록 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그 명칭도 병자호란 때부터는 장승(將丞)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곳 숯골 장승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신비한 영험(靈驗)도 지닌 것으로 믿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밤중에 동네에 침입한 왜군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을 동민으로 알고 멀리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도 움직이지 않고 총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아서 왜군들은 두려워하여 마을로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한동안 대치하다가 가까이 가본 후에야 ‘나무로 만든 사람’ 곧 목우상(木偶像)임을 알았다. 그 사이에 동민들은 모두 피난을 갔고 마을에 들어온 왜군은 그냥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보여준 장승의 영험 때문에 술골에서는 더욱 정성을 모아 장승제를 지냈다고 한다.

[술골 장승과 짐대]

술골 입구는 북쪽과 남쪽 두 곳에 있다. 이 중 남쪽 입구 양쪽에 여러 개의 장승과 짐대가 마주 선 채 있다. 이곳을 ‘장승거리’라고 부른다. 북쪽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솟대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주된 입구는 남쪽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마을 바깥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 왼쪽에는 남장승이, 오른쪽에는 여장승이 나타난다. 방위로 보면 남장승은 서쪽에, 여장승은 동쪽에 위치하는 셈이다. 남녀 장승 옆에는 각각 긴 장대에 새를 나무로 만들어 앉힌 솟대가 역시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여기서는 솟대를 흔히 ‘짐대’ 또는 ‘오릿대’라고 부른다.

남녀 장승은 각기 8~10여 기(基)가 있다. 해마다 남녀 장승 각 한 기씩을 새로 깎아 세우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장승은 많아진다. 아주 오래되어 흉물스럽게 된 낡은 장승은 장승제를 모신 후에 뽑아내어 불에 태워버린다. 남장승의 바로 아래쪽에는 신정(神井)으로 여기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장승제를 위한 제물 마련에만 쓰인다. 여장승 옆에는 신목(神木)인 참나무가 있다. 이 참나무를 일부 동민들은 ‘장승나무님’이라고 부른다. 또 여기에는 ‘숲막이’라 일컫는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한편 남녀 장승 옆에는 높이 2m 정도의 시멘트로 만든 장승도 있다. 목장승과 달리 얼굴은 없고 직육면체의 시멘트 구조물에 명문(銘文)만 새겨놓았다. 1970년대 초에 새마을사업으로 인하여 목장승을 해마다 세우기 어렵게 되자, 시멘트 장승을 만들어 여기에 십수년간 장승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목장승을 깎아서 장승제를 모셔오고 있다. 곧 마을 입구는 장승과 솟대, 당샘과 당수나무 등이 어우러진 일종의 신역(神域)이다.

장승과 짐대의 생김새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장승의 크기는 대개 2m에서 2m 50㎝ 정도이고, 짐대는 이보다 커서 2m 50㎝에서 3m쯤 된다. 과거에 비해 장승과 짐대의 크기가 점차 커졌다. 남장승과 여장승 머리는 각각 사모(紗帽)와 족두리를 장식하고, 묵선(墨線)으로도 표현해 놓았다. 사모에는 사모뿔을, 족두리에는 큰 비녀를 장식해 놓았다. 사모와 족두리는 새 신랑과 신부가 혼례, 곧 대례를 치를 때 쓰는 관이다. 이들은 신혼부부로서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남녀 장승 모두 두 눈을 45° 정도로 치켜뜨게 했고, 양쪽 뺨 부위를 깊게 음각(陰刻)하여 코를 자연스럽게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윗니와 아랫니는 끌로 각각 5개씩 조그만 직사각형이 되게 쪼아냈다. 남장승에는 긴 수염을 역시 묵선으로 그려놓았다.

남장승과 여장승의 몸통에는 각각 ‘천하대장군축귀신(天下大將軍逐鬼神)’과 ‘지하대장군축귀신(地下大將軍逐鬼神)’이라고 먹으로 써놓았다. 대개 다른 마을의 장승들은 남녀 구분에 따라서 각각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또는 천하축귀대장군(天下逐鬼大將軍)과 지하축귀대장군(地下逐鬼大將軍) 등으로 이름을 붙인다. 술골 장승은 다소 특이한 경우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남장승은 축귀(逐鬼), 곧 나쁜 귀신을 쫓는 천하의 대장군이고, 여장승은 역시 축귀(逐鬼)의 능력을 지닌 지하의 대장군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장승은 마을 입구에서 바깥에서 들어올지 모르는 나쁜 운수나 잡귀들을 내쫓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장승 옆의 짐대도 잡귀를 막아내는 구실을 한다. 짐대는 긴 장대 위에 목조(木造)의 새를 올려 만든 일종의 신간(神竿)이다. 이를 ‘오릿대’라고도 부른다. 짐대는 불교 사찰에서 당(幢)을 달아 세우는 대를 뜻하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선박의 돛대를 일컫기도 한다. 이렇게 긴 대를 뜻하는 짐대는 한강 이남의 지역에서는 솟대를 뜻하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오릿대란 오리[鴨]를 앉힌 긴 장대란 뜻이다. 이렇듯 솟대 위의 새는 기본적으로 오리이다.

긴 장대와 오리로 구성된 솟대는 근원적으로 우주나무(Cosmic Tree)와 하늘새(Sky Birds)가 결합된 우주축(Cosmic Axis)이다. 근원적으로 볼 때 긴 장대는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우주나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주나무는 하늘을 향하여 뻗어가는 줄기와 가지, 그리고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뿌리로 인하여 지상과 천상, 그리고 지하라는 3개의 우주층을 연결하는 우주축의 상징을 갖는다. 장대 위의 오리 역시 3개의 우주층을 넘나들며 그들 세계를 소통시키는 신조(神鳥)이다. 오리는 지상에서 걸을 수 있고, 물속으로 잠수하며, 창공도 날 수 있다. 물속은 곧 지하세계를 뜻한다.

현재 이들 솟대에는 그 원초적 성격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주민들조차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솟대에는 마치 지질시대의 화석처럼 고대 신간의 잔영(殘影)이 남아 있다. 이 신간이 세워져 있는 공간은 상징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되며, 바로 그 때문에 이곳은 신역인 동시에 금역(禁域)인 것이다. 곧 솟대가 세워진 공간은 신의 영역이기에 어떤 잡귀나 액도 침입할 수 없는 금단(禁斷)의 지역이 되는 것이다.

[술골 장승제의 절차와 의미]

1. 제관 선출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모신다. 예전에는 이에 앞서서 초사흗날에 마을의 풍장패가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며 걸립(乞粒)을 했다. 풍장패가 상쇠를 따라 마당에 들어가 한바탕 쇠를 울리고 부엌·장광·우물 등을 차례로 돌면서 지신을 밟아준다. 안주인은 불밝이쌀과 돈을 올린 소반을 차려서 마루에 놓고 풍장패들에게 술과 음식을 간단히 대접한다. 풍장패는 쌀과 돈을 거두어 다른 집으로 이동한다. 근래에는 걸립에 응하는 집들이 많지 않고, 제비(祭費)도 주로 논산시의 장승제 지원금에서 충당한다.

걸립 후에는 동네 회의를 열어 장승제를 책임지고 주관할 제관들을 뽑는다. 유사(有司) 1명, 축관(祝官) 1명, 집사(執事) 2명을 선출한다. 모두 4명이다. 유사는 대개 노년층 중에서 부정하지 않은 사람으로 일단 후보들을 선정한다. 집안에 젊은 부녀자나 아이가 있으면 월경이나 그 밖의 예기치 못하는 부정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산이나 죽음과 같은 ‘산 부정’과 ‘죽은 부정’도 철저하게 가린다. 다음에는 이들 후보 중에서 다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최종적으로 유사를 선발한다.

유사가 선출되면 집 대문 앞 좌우로 각각 5무더기의 황토를 뿌려두고, 대문에는 금줄[禁繩]을 드리운다. 이제부터는 누구도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며, 특히 부정한 사람은 유사 집에 얼씬 거려서도 안 된다. 장승제를 모시기 3일 전부터 유사는 매일 목욕재계하고 근신에 더욱 신경을 쓴다. 최근에 들어서는 유사 맡는 일조차 매우 힘들어하여 서로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래서 유사는 두지 않고, 제주(祭主)·헌관(獻官)·축관(祝官)을 각기 한 명씩 선출하여 장승제를 주관하게 한다. 제주는 이장이 당연직으로 맡도록 했고, 헌관과 축관은 마을의 3성씨 중에서 윤번제로 담당하기로 했다.

2. 장보기

장승제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장(場)은 논산장(3·8일)으로 보러 나간다. 제수(祭需) 구입 시에는 절대로 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먼저 돼지 한 마리를 구한다. 이때 돼지는 잡색(雜色)이 섞이지 않은 좋은 놈으로 고른다. 삼색실과로서 대추는 한 되, 밤은 두어 되, 감은 다섯 개 정도 산다. 북어는 세 마리를 구입하되, 양쪽 눈이 모두 또렷하고 잘 박혀 있는 것으로 구한다. 또 축문과 소지, 그리고 제상을 차리기 위한 한지를 충분히 산다. 분향을 위하여 초와 향을 마련하고, 김치를 담그기 위해 채소와 고춧가루, 새우젓 등을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김치는 장승제에 쓰는 것은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먹으려고 담근다. 쌀은 지신밟기를 할 때 걸립한 분량이면 충분하다. 팥은 닷 되 정도 산다.

3. 장승거리 및 우물 청소, 그리고 제물 마련

장승제 당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일부 마을 청장년들이 서둘러 장승거리로 나가 장승 주변을 청소하고 우물도 깨끗이 품어낸다. 청소가 끝나면 마을 입구와 우물 등에 금줄을 드리우고 황토도 이곳저곳 뿌려둔다. ‘몸 부정’이 없는 깨끗한 동네 아주머니들은 유사집에 모여 제수 준비에 들어간다. 김치는 물론 며칠 전에 담가둔다. 고춧가루는 김치와 마을 사람들이 먹을 음식에는 넣지만, 장승제 제물에는 일체 쓰지 않는다. 물은 반드시 마을 입구 장승거리에서 길어온 우물물만 쓴다.

떡쌀은 두 말 정도 준비한다. 장승제 시루떡은 세 되 정도하여 시루째 올리고, 나머지는 모두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다. 술은 유사의 부인이 누룩 한 말로 초닷새날에 담가둔다. 장승제 지내는 열나흗날 정도가 되면 술이 잘 익게 된다. 메는 한 그릇을 올리고, 탕은 무와 두부만 넣고 한다. 간은 보지 않는다. 탕 또한 메와 같이 동네 사람 먹을 것은 따로 장만한다. 밤·대추·감은 깎거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육고기로는 돼지머리만 상에 차린다. 돼지머리는 익히지 않은 생물로 쓰며, 이마 한복판에는 식칼을 꽂아놓는다. 나물은 무·시금치·미나리로 각각 한 그릇씩 마련한다. 미역은 생미역을 올린다. 바다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다.

제물 마련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과정은 돼지 잡기이다. 아침 일찍 경험이 풍부한 남정네 몇 사람이 돼지를 잡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유사 집에서 돼지를 잡았는데 근래에는 마을회관 앞에서 한다. 먼저 앞·뒷다리를 각각 끈으로 결박하여 굵은 장목(長木)에 매달아놓은 돼지를 청장년들이 어깨에 메고 가져다놓으면 부정 쓸기를 한다. 돼지는 시장에서 사왔기 때문에 마을에 오기 전에 어떤 부정에 오염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짚불을 펴놓고 그 위에 돼지를 지나가게 한다. 돼지를 가져온 사람들이나 잡을 사람들도 짚불 위를 넘어간다. 불[火]로서 돼지와 그것을 잡을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의례이다.

다음에는 천지신명에게 돼지를 잡겠다고 간단한 고축(告祝)을 한다. 돼지는 부엌칼로 멱(목의 앞쪽)을 따서 잡는다. 이때 선지(짐승을 죽여서 받은 피)는 따로 잘 받아둔다. 예전에는 땅바닥에 짚을 깔고 그 위에서 돼지를 잡았는데, 지금은 비닐을 깐다. 돼지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몸통은 4등분하고, 이를 모두 깨끗이 씻어 유사 집으로 옮긴다.

4. 장승목과 짐대목 베기

마을 청장년들은 목수를 앞세우고 장승목을 구하기 위해 인근의 산으로 간다. 이들도 부정을 타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전에는 마을의 3개 성씨 종중(宗中)에서 산을 찾아주고 벌목할 나무도 구해주었다. 종중 어른의 안내로 목수와 청장년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우마소리·닭소리·개소리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갔다. 지금은 이러한 풍습이 없어지고 마을 입구 부근의 산에서 편한 대로 장승목을 찾는다.

장승과 짐대로 쓸 적당한 나무를 선택하면 그 나무 앞에 백지를 깔고 간단한 제물을 차려 산신제를 올린다. 술 한 잔 붓고 재배를 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가니 아무쪼록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고한다. 베어낸 후에는 산신이 노하지 않도록 벤 자리를 흙으로 잘 덮어준다. 벌목을 하면 예전에는 목도를 하여 장승목을 날라왔으나 근래에는 트럭으로 운반한다. 장승은 높이 6m 정도의 소나무 한 그루를 벌목하여 2개의 통나무로 자른 다음, 밑동은 여장승을 깎는 데, 윗동은 남장승을 깎는 데 쓴다. 이렇게 하면 여장승은 남장승보다 두둑한 모습으로 깎인다.

큰 가지는 장승을 세울 때 장승 하단의 몸통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침목으로 쓴다. 또 어떤 해에는 남녀 장승목을 각기 한 그루씩 베어내어 쓰기도 한다. 그런데 장승은 소나무가 생장하던 방향과 반대로 뒤집어서, 곧 아랫부분을 윗부분이 되게 하여 깎는다는 원칙이 있다. 여기에는 장승이 일종의 신상(神像)이기 때문에 좌우 또는 상하를 일상적 상황과 반대로 해야 한다는 상징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장승의 머리 부분을 크게 조각하려는 실제의 목적도 반영되어 있다.

솟대를 만들 나무는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오리는 죽은 나무에는 앉지 않는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장승은 나무껍질을 제거해야 한다. 목수의 주도 아래 일부 청장년들은 톱, 끌, 도끼, 자귀, 큰 자귀, 먹근, 중결이(둘이 쓰는 톱) 등으로 장승목을 베고, 깎고, 다듬으면서 남녀 장승을 만든다. 장승은 정확한 설계도면이나 모본(模本)에 의하여 것이 아니라, “목수 눈 짐작, 목수 주먹밥”으로 깎아낸다. 장승의 형태가 완성되면 축관이 장승의 몸통에 명문을 묵서(墨書)하고, 묵선으로 사모와 족두리 등을 그려 넣는다. 짐대의 오리에도 눈과 깃털 등을 그려준다. 장승과 짐대를 깎아서 만드는 데는 대략 4~5시간 걸린다. 장승을 제작하면서 주고받는 다음 대화는 장승제가 지닌 마을 축제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준다.

“장승은 항상 거꾸로 여.”/“밑에가 위여.”/“장승나무는 지상에 섰을 때와 반대여.”/“성수(한 주민의 이름)는 딸이 벌써 셋이여. (이번에 장승을 다 깎아가지고 나갈 때) 무겁다고 내려놓으면 또 딸 낳아.”/“장승 넘어다니지 마.”/“다 깎기 전에는 넘어도 괜찮아.”/“삼동으로 굽었어. 너무 배부르면 수장승이여, 남자는 배짱이 있어야 돼.”/“여자는 배부르면 아이 잘 낳아 여자는 (허리를) 구부려서 공손해야 돼.”/“수놈은 배가 불룩 나와야 되고 암장승은 공손히 배가 들어가야 돼.”/“장승을 보고 수놈이 뭐여.”

짐대를 만들기 위해서 ‘긴 장대’와 ‘오리를 만들기에 적당한 나무’를 미리 마련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오리는 죽은 나무에 앉지 않는다고 하여 장대의 나무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다만 장대 끝은 오리와 연결시키기 위하여 뾰족하게 다듬는다. 오리의 목은 ‘ㄱ’ 자(字) 모양의 나뭇가지로 준비하고, 이를 오리의 몸통으로 쓸 직사각형의 나무판에 구멍을 뚫어 연결한다. 장대는 이 몸통의 후미에 뚫어놓은 구멍에 끼우면 짐대가 완성된다. 축관은 능숙한 솜씨로 오리의 눈과 깃털 등을 묵선으로 해학적으로 표현한다. 장승과 짐대를 만드는 동안 마을에서는 윷놀이 등이 벌어지고 풍장패들이 마을 곳곳을 돌며 흥을 돋운다. 새 장승을 세울 구덩이에는 소금을 조금 다져 넣는다. 이렇게 소금을 뿌려놓으면 장승목이 잘 썩지 않고 벌레도 잘 기어오르지 않아 목장승을 오래 보존할 수 있다.

5. 우물고사

새 장승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기 전에 우물 고사를 간단히 지낸다. 대개 저녁나절이 된다. 우물은 원래 조그만 돌을 쌓아 만든 옹달샘이었는데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 때 시멘트로 보수하여 오늘날처럼 만들었다. 제물로는 통북어와 미역을 준비한다. 미역은 조금 떼어 우물에 띄워두었다가 고사가 끝나면 건져내 우물에 걸쳐놓는다.

6. 장승제

장승거리의 묵은 장승 옆에 새 장승을 세우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날은 이미 컴컴해진다. 제관들과 풍장패를 위시한 마을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유사집(또는 제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가지고 나와 장승거리로 간다. 맨 앞에는 쟁반에 받친 돼지머리가 앞서고 뒤를 이어 각종 제물을 담은 지게가 따른다. 유사를 비롯한 제관들은 두루마기에 유건을 쓰고 제물 뒤에 선다. 풍물패가 요란한 쇠가락을 울리며 이들을 쫓는다. 일반 동민들은 그 뒤를 잇는다. 마을 입구 금줄 드리운 곳 한복판에 모래[黃砂]를 직육면체로 쌓아서 조그만 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제상을 차린다. 제단 좌·우에는 각각 세 무더기의 황토를 펴놓는다.

제상에는 떡시루·돼지머리·메·탕·삼색실과·무나물·동치미·생미역·포·술 등을 올린다. 시접(匙楪) 또는 수저는 좌측 상단에 놓아둔다. 1960년대에는 쇠고기도 상에 올렸다. 장승제에는 여자들은 참석하지 않는다. 진설을 하면 유사가 분향·재배하고, 헌작·재배를 한다. 예전에는 재배가 아닌 단배(單拜)를 했던 적도 있었다. 아헌(亞獻)을 올린 다음에는 일동 재배하고 메에 숟가락을 꽂는다. 이어서 축관이 독축하고 재배한다.

축을 마치면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마을의 대동소지부터 먼저 올린다. 다음으로 유사소지, 이장소지, 각반의 반원의 소지를 반장이 올린다. 이때에 하는 구축(口祝)은 대개 “동네 전체 평안하고, 아이들 건강한 몸으로 공부 잘하고, 딸기·수박·논농사 잘되며, 객지 나간 사람 무탈하게 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1980년대에는 유사가 모든 가호의 소지를 일일이 올렸으나, 그 후에는 반장들이 반원 가정의 소지를 올려준다. 이어서 동민들이 각자의 소원을 담은 소지를 올린다.

한편에서는 다시 풍장패의 쇠가락이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제관과 동민들 모두 시끌벅적하게 모여 음복을 한다. 음복한 술은 장승 주변에 뿌려준다. 이렇게 장승제가 끝나면 마을 입구의 금줄을 풀어서 장승에 묶어주고, 또한 북어 한 마리와 떡, 과일 등을 백지에 싸서 장승에 매달아준다. 장승제를 올리면서 제물을 드렸지만, 제후(祭後)에도 장승님 드시라고 제물 일부를 헌납하는 것이다. 이를 술골에서는 ‘헌식(獻食)’이라고 한다. 이때에 장승샘의 물을 길어 바가지에 담고 여기에 제물 일부를 섞어 ‘휘! 휘!’ 잘 저은 다음, 마을 바깥을 항하여 “잡귀잡신은 물러가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힘차게 획 뿌린다. ‘해물리기’를 하는 것이다.

한편 오래 묵은 장승 중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흉물이 된 장승은 뽑아내어 장승거리 옆에서 불에 태운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을 풍장을 치고 뒤풀이를 하며 놀다가 묵은 장승을 다 태우고 나면 모두 유사집에 몰려가서 잔치를 벌인다. 한편 장승제를 모시는 동안 각 가정에서는 장독대에 떡시루·삼색실과·북어 등을 차려놓고 가내 평안을 위하여 정성을 드린다. 다음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은 다시 유사집으로 모여, 장승제 결산을 포함한 마을의 현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마을회의를 연다.

술골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씩 음력 정월 열나흗날을 기하여 장승을 새로 깎아 모시는 일련의 장승제 절차를 통하여 마을의 화합과 친목을 주기적으로 다지고 있다. 그 전통은 매우 유구하다. 이는 술골 최대의 ‘종교적 잔치’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의회’의 의미와 역할도 지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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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21.01.11 오탈자 해당시군 홈페이지 지명유래 확인후 숯골 → 술골 로 수정
2013.06.10 [4. 장승목과 짐대목 베기] 오타 숫놈을 수놈으로 수정
이용자 의견
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6.10
위***********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 위해중세한국국제학교에 재학중인 김민영입니다.
인터넷에서 잘못된 맞춤법을 찾다가 디지털논산문화대전에 오류를 찾았습니다.
(숫놈x-수놈o)
내가 쓰는 백과가 막혀서 여기에 씁니다.
빠르게 시정해주세요.
201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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