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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논산문화대전 > 논산의 마을 이야기 > 강경읍 염천리 > 비단 같은 강물 따라 흐른 세월 > 금강의 관문 강경포구의 흔적

  • 번창했던 강경포구 새 창으로 보기새 창으로 보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은진현(恩津縣)편에 의하면 예전의 강경포는 강경산 아래 있는 해진(海津)이며, 강경산 봉수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고, 북으로는 황화산(皇華山)에 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강경은 한양과 호남간 봉화(烽火)의 중계지였다. 17세기 초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직후였으므로 전쟁의 피해복구 과정에서...

  • 객주의 활동이 활발했던 포구상업 새 창으로 보기새 창으로 보기

    강경읍의 옥녀봉 아래에 위치한 강경포구는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전국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충청권 일대를 상권으로 하는 주요 결절지이며, 수송 적환지였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수산물시장의 역할을 한 것은 구한말 대자본을 가진 객주들의 등장부터이다. 천혜의 내륙항으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한 강경포구는 금강 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

  • 700명 강경노동조합의 흔적 새 창으로 보기새 창으로 보기

    강경노동조합 은 강경포구가 번성했던 시절 객주의 활동과 함께 강경포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1920년대 당시 내륙지방으로서의 수산물 유통은 대부분 강경포구를 통해 전국으로 되었기 때문에 강경노동조합의 규모나 세력은 대단하였다. 강경포구 가 가장 번성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노동조합원의 구성이 1조당 60~80명으로 총 10개조로 구성되어 약 78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 철길이 뱃길을 넘어서다 새 창으로 보기새 창으로 보기

    1905년 5월 경부선의 개통은 강경의 쇠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경부선이 금강의 소항 종점인 부강을 지남에 따라 군산과 강경을 경유하여 부강으로 공급되었던 수산물과 일용 잡화는 부산과 인천을 경유하는 철도가 수송함으로써 금강수운의 역할은 자연히 감퇴할 수밖에 없었다. 경부선이 상류의 공주와 청주 지역을 강경의 상권에서 분리시킴으로써 금강수운과 하안취락은 큰 변혁을 겪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