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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968
한자 儒敎
영어의미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보급된 유학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

[개설]

유교는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으로 공교(孔敎) 또는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삼강오륜을 덕목으로 하며 사서삼경을 경전으로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의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유교는 불교 및 기독교와 함께 한국 3대 종교의 하나로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전통 종교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문화 등 한국 사회와 역사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 유교사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전환점은 조선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크게 발전하면서 많은 사상적 유파를 형성하였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은 서원, 사우, 효자·열녀의 정려 등 선비들의 정서를 지닌 유교 문화 자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의 상징 양반(兩班) 문화, 선비 중의 선비라고 하는 산림(山林)의 생활문화가 집중되어 있어 충청도 유교 문화권의 중심이라 일컬어진다.

[유학자]

논산 지역은 조선 중·후기의 한국 예학을 주도했던 인물들을 배출한 유서와 전통이 깃든 지역이다. 특히 기호학파의 중심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율곡 이이의 적통을 계승하는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당시 조선의 예학과 의리학을 대표한 자들로 당시의 정치·문화·학술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노·소 분당이 이루어지면서 갈라선 명재 윤증도 논산의 큰 학자이다.

조선 말기는 국가와 민족이 존망의 기로에 선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정통성리학과 강학의 측면에서 업적을 남긴 충청남도 유림으로는 종전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유학 사상을 전개한 김항(金恒, 1826~1898)이 있다. 김항은 논산의 연산(현 양촌면 남산리)에서 출생하여,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奎)의 가르침을 받고 36세 이후 20여 년간 『서경』과 『역경』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후 새로운 진리를 주장하여 『정역(正易)』으로 체계화하였다. 김항은 구한말 역사의 일대 전환을 깊이 인식하고 독자적인 논리와 이념을 제시하여 한국사상사와 종교사에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62세 때 현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에 이주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써왔으며 그가 제자를 가르친 향산정사 옛 터에 향적산방이 있다.

한일합병 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일반 대중을 교화하고 선도하면서 항일운동의 선두에 나선 것이 유림들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식민통치 전 시기에 걸쳐 유림의 저항의식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강력한 탄압 정책과 회유책, 그리고 친일화 정책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림 세력을 변질시킴과 동시에 어용화하고자 했다. 즉 일제의 유교 정책은 초기에는 유교 약화 내지는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점차 친일 어용화 정책으로 전환한 결과 후기에 이르러 황도화(皇道化)로 왜곡 변질시킨 유교 단체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유림 세력들이 일제강점기 후반기의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세금 납부를 반대하는 등 일제의 제도적 문화적 동화 정책에 적극 저항하였다. 즉 이들 유림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조선어 말살 정책’ 속에서도 일본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1940년 소위 ‘황민화’의 목표 아래 시행되어 7개월 만에 전 국민의 80% 가량이 창씨개명을 행한 상황에서도 탄압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거부하는 등 비타협 불복종의 저항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논산 지역에서도 다수의 유림들이 이러한 저항에 동참하였다.

[유교 유적]

유교 문화의 가장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서원과 사우이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각 지방에 설치된 민간 교육 기관으로 선비 양성과 삼강오륜 확립을 위한 교육의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논산에 소재하는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김장생을 주향한 연산의 돈암서원윤황을 주향한 노성(현 광석면)의 노강서원을 들 수 있으며 이 두 서원은 고종 대에 흥선대원군이 시도한 철폐 대상 서원에서도 제외된 전국 47개 서원에 속할 정도였다.

특히 돈암서원김장생을 주향으로 하고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으로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기호 유림의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춘추 석전제는 물론 유교 관련 각종 학회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방 유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충청도의 경우 모두 118개의 서원이 있었으며 이 중 사액서원이 39개 소나 되었다. 이중 논산 지역에는 사액서원이 3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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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지역 사액서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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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지역 일반 서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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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지역 사우 현황

[현황]

광복 이후 유교계를 대표하는 조직은 성균관·향교·유도회 등이다. 광복 이후 유교계는 친일 단체를 제거하는 한편 난립하던 유교 단체를 통합하여 일제가 격하시킨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성균관의 교화 사업 추진 기구인 유도회를 결성하였다. 현재 논산에서도 이와 관련된 유림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논산유림회의 회원은 주요 향교의 전교, 유도회장, 장의, 고문, 유도 회원, 청년 유도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망과 과제]

논산 지역의 유학은 예학을 발전시키고 대의를 강조하여 한국 유학 발전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러한 문화 전통이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은 한국인의 주체성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서양식 근대 교육 제도가 일반화되는 반면 전통 교육 제도가 합법적으로 지속되지 못하여 전국적인 유교 조직의 붕괴는 가속화하였다. 또한 논산 지역의 유교계도 적극적으로 유도를 전수하고 시행하는 현실 유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근대사회에서 충과 효라는 도덕 관념은 과거의 가부장적 봉건 사회에서 상하의 지배-복종 관계를 규정하고 유지하였던 낡은 논리라고 비판되어졌으나, 충과 효는 하나의 윤리 규범 이전에 자기의 주체성을 다하는 성심이며,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도심이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는 근면함과 진실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는 성실함은 근·현대화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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