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348
한자 政治
영어의미역 Politics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용현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후에 나타난 논산 지역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은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은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전후하여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군정을 수립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불법화하고 좌익 세력의 정치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우익 세력도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은 뒤 좌익 세력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6년에 접어들어 전국 각지에서 우익의 신탁통치 무조건 반대론과 좌익의 모스크바 삼상회의안의 총체적 지지론을 둘러싼 좌우익간의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폭력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는 논산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좌우익 단체의 활동 상황]

1946년 초반 논산의 정치 상황은 신익희의 지시로 작성된 이른바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신익희는 1945년 12월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여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정치적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는 그런 활동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

두 명의 공작요원이 1946년 3월 초순 충청남도 각지를 실제로 답사하면서 작성한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는 비록 우익(독립촉성중앙협의회) 측의 입장을 전적으로 반영한 보고서이기는 하나 당시 충청남도 각 군의 관공서(군청, 경찰서 등)와 각종 정당·사회단체의 실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에 따르면, 전체 충청남도 주민 180만 명 가운데 65%가 우익, 10%가 좌익, 25%가 중립을 지지한 반면, 관료들은 50%가 우익, 20%가 좌익, 30%가 중립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광복과 동시에 논산에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논산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논산 지역의 행정권을 장악한 뒤 실질적인 자치를 실시하고 있었다. 논산 지역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도 대표자를 파견하여,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1945년 11월 20~25일)에는 서홍선·서호선·조동순, 전국농민조합총연맹결성대회(1945년 12월 8~10일)에는 장종현·황익선·김익수 등이 참가하였다.

당시 충청남도 지역의 인민위원회 대표는 일제강점기부터 논산 지역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쳤던 권영민·신표성·조중곤 등이었는데, 이는 광복 직후 논산 지역의 좌익 세력이 대단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6·25전쟁까지 충청남도 남부 지역의 경우 좌익운동의 중심지는 논산 지역이었다.

광복 직후 논산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신표성은 1920년대 초반부터 서울청년회·경성노동회·전진회 등에 참여했던 인물로서, 1925년 1월 군산청년회·군산노동연맹회 등이 주최한 레닌추도강연회에서 ‘조선 농촌에서 본 레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사회주의자였다.

신표성은 1926년 2월부터 조선공산당재건야체이카의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 1932년 6월 양촌면 적기시위사건으로 검거, 투옥되었던 인물이었다. 신표성은 1944년 건국동맹 충남북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충청남도 인민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신표성은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체포되어 취조를 받던 중 충청남도 도립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신표성과 마찬가지로 논산 출신인 조중곤은 일본 유학 이후 1927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제3전선』 편집위원, 조선프롤레아티라예술동맹(KAPF)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동경지회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때 검거되어 실형을 살고 1930년 3월 출옥하였다. 광복 이후 충청남도 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충청남도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8년 8월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개입하면서 논산군청은 다시 일제강점기 관리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는 광복 직후 논산군청이 좌익청년들에게 접수당하여 행정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으나 미군 중대가 논산에 진주하면서 통치 기능이 회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6년 초 논산군청 근무자 수는 90여 명으로 군수는 한학자이자 3·1운동 가담 전력이 있는 도상규, 내무과장은 군서기 출신의 노은섭, 산업과장은 부여군청 관리였던 김양현이었다.

강경에 소재한 경찰서도 해방 직후에는 좌익청년들에게 접수되었으나, 미군정 개입 후 일제강점기의 경찰 출신들에 의해서 서서히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946년 초반 강경경찰서는 15개소의 관할 주재소를 두고 있었는데 경찰서장은 충청남도 보안과장을 지냈던 양재덕, 총무과장은 충청남도 경찰부에서 근무했던 강남희, 보안과장은 논산주재소에서 근무했던 박근화, 수사과장은 조치원 경찰서에서 근무했던 송인성이었고, 전체 경찰 인력은 143명이었다.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에 의하면 광복 직후 우익 계열의 사회정치운동을 주도한 단체들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논산협의회·대한독립촉성논산청년회·논산의용단·논산부녀회가 활동했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논산협의회는 180명, 논산의용단은 50명, 논산부녀회는 400명의 회원이 활동했던 단체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논산협의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논산청년회는 논산 지역 각 면에 전단을 살포하는 방법으로 청년계몽 및 대한민국 국민의 기초 훈련에 치중하여 활동하였다. 논산의용단은 귀환병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단체로서 ‘논산 지역 각 면의 청년문화 계몽과 건국반역자에 대한 계몽’이라는 단체 강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좌익의 활동에 대한 무력시위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논산부녀회도 각 면을 다니며 무산자와 여성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좌익 계열의 사회정치운동을 주도한 단체들로는 논산군 인민위원회·논산읍 인민위원회·논산읍 협동조합·논산군 농민조합·논산청년동맹·논산부녀동맹·논산응징사동맹·논산국군준비대가 있었다.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는 조선공산당 계열의 논산군 인민위원회 행동이 대체적으로 불순하여, 논산읍 협동조합·논산군 농민조합과 협력해서 일반인에게 테러를 가하고, 각 면을 돌아다니며 소작료를 3·7제로 해야 한다는 등 소작인을 선동하는 활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보아 논산군 인민위원회 등 좌익단체들은 당시 대중을 상대로 활발한 좌익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논산국군준비대는 「충남 지방 실정조사보고」 작성 당시 해산된 상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지개혁]

전라북도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표현처럼 일제강점기는 만석꾼들의 태평천하였다. 대부분의 만석꾼들에게 한 가지 바람이 더 있었다면 그것은 동경 유학을 보낸 자식들 가운데 군수나 판사, 검사가 하나쯤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15년 전쟁(만주사변·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의 만석꾼들은 노동력 및 농지에 대한 통제 정책, 소작료 및 미곡에 대한 통제 정책, 그리고 전시 하에 급진전된 기업 및 금융에 대한 통제 정책으로 인하여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기에 이른다.

만석꾼의 몰락은 광복과 더불어 현실화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한 어디에서도 만석꾼들의 태평천하는 없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사회적 생산력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식민지 지주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데에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동의하였다. 성난 농민들은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을 조직한 뒤, "토지는 밭갈이 하는 농민에게로"라는 토지 혁명의 구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권리 투쟁을 넘어 권력 투쟁 전선에 떨쳐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1946년 초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 개혁을 주도하자 북한의 만석꾼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월남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남한 지역의 경우는 북한 지역과 사정이 조금 달랐다. 남한의 만석꾼들은 한국민주당 등 가용한 정치 자원을 총동원하여 농지 개혁을 저지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부분의 만석꾼들은 급기야 토지 방매, 소유권 분산, 지목 변경, 재단(호남 최대지주 김충식의 동은재단, 오건기의 동고과학재단) 설립 등의 방법으로 난국을 타개해 나가려 했다.

예를 들면 30정보 이상의 경기도 대지주들 가운데 농지 개혁 때까지 20정보 이상의 토지를 보유했던 대지주는 13%에 불과했다. 그러면 논산의 만석꾼들은 사정이 어떠하였을까? 농지 개혁과 더불어 몰락한 이들도 있었으나, 대개는 기본 재산(대지·임야·동산)과 남들보다 유리한 학력, 학연이나 각종 사회적 관계망에 기대어 그 나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헌의원선거]

1948년 8월 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 국왕에게 양여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국왕이 연합군 사령관에게 넘긴 국권이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들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같은 국권에 기초하여 국민들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을 선거로 통해 선출하였으며,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회되었다. 제헌의원들은 7월 12일 제헌헌법을 통과시키고, 7월 20일에는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각각 선출하였다. 그 결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기구가 정식으로 수립되기에 이른다. 그러면 논산 최초의 지역구 국회의원은 누구였을까?

1948년 5월 10일에 열린 제헌의원선거에는 좌익은 물론이고, 김구 등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세력도 불참하였다. 따라서 제헌의원선거는 매우 단촐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법령 제175호 「피선거권 규정」에 따르면 제헌의원선거에서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금치산이나 준금치산자, 자유형을 선고받고 형이 집행 중에 있거나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되지 아니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일본 제국의회에 의원이 되었던 자 등이었다.

그리고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만 25세 이상인 자로서 선거권이 없는 자, 1년 이상 자유형을 선고받은 자로서 집행 종료 또는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된 후 3년을 경과하지 않은 자, 일제강점기에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헌병, 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직에 있던 자 및 그 아래서 밀정 행위를 한 자, 중추원의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를 역임했던 자, 부 또는 도의 자문기관 혹은 의결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 또는 훈7등 이상을 받은 자 등이었다.

[미군정 공보국 조사보고]

미군정 공보국은 194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7차례에 걸쳐 전라남도·전라북도·경상남도·경상북도·강원도·충청남도 등지를 현지답사하면서 지방의 정치 상황과 군정에 대한 조선인들의 여론을 조사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1947년 12월 5일부터 8일까지 공보국 관리가 직접 논산 지역을 현지답사(벌곡면을 제외한 13개면 44개 촌락)한 뒤, 타이프 용지 25쪽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1947년 12월 말 현재 논산 지역의 정치 상황, 더 나아가서는 미군정에 대한 논산 지역 주민들의 반응이 잘 드러나 있다. 보고서는 미군정이 군정정책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한국인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홍보 정책을 실시하는데 있어 그 기초 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사 대상자들의 태도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조사 대상 마을의 89%(39개 마을)가 선선히 조사에 응했고, 또 95%(42개 마을)가 대단히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이는 조사 활동이 우호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진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보고서에서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논산 주민의 경제활동에 대한 조사이다.

1947년 12월 현재 조사 대상이었던 44개 마을의 농가는 모두 4,750호였는데, 그 중 지주는 37호(0.8%), 자작농은 624호(13.1%), 자작농 겸 소작농은 1,414호(29.8%), 소작농은 2,675호(56.3%)로 조사되었다. 1930년대보다 소작농 호수가 줄어들었고, 자작농 호수가 늘어난 것은 농지개혁 소문으로 인해서 지주들의 토지 방매가 활발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 대상 마을의 자유노동자는 2,236호(30.5%), 관리는 94호(0.8%), 상공업자는 19호(0.3%), 수선소 및 주막 234호(3.2%), 무직 3호(0.4%)였는데, 이는 조사 대상 지역이 대부분 농촌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조사 대상 마을들은 도로를 끼고 있는 마을들로 산간벽촌은 아니었다. 조사 대상이었던 44개 마을 가운데 마을 전체에 전기가 들어온 곳은 7개소(15.9%), 부분적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7개소, 전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마을은 23개소(52.3%)였으며, 마을 내에 학교가 있는 마을은 19개소였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논산군의 정치 상황에 대한 보고이다. 1947년 12월의 논산 지역의 정치 상황은 1946년 초반의 정치 상황과는 판이했음을 알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른바 ‘1947년 8월 14일 위기’ 때 경찰과 우익들이 좌익 세력을 논산에서 완전히 몰아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서 당시 논산군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44개 마을 중 38곳에 지부 설립), 대한독립촉성청년회(12개 마을에 지부 설립), 대한독립청년단(2개 마을에 지부 설립), 대동청년단(5개 마을에 지부 설립) 등 이른바 극우 세력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8개 마을에 지부 설립), 여자국민당(1개 마을에 지부 설립)등 온건 우파가 극우 세력과 일정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나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 좌익 세력은 지하에서 소규모의 정치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당시 농민들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보고이다. 당시 농민들이 이른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 제일 자주 입에 올렸던 화제는 공출을 실행할 때의 불공정 쿼터 할당이나 공직자들의 비이성적인 태도, 식량을 구하는 방법과 식량 문제의 심각성, 공출을 독려하기 위하여 파견된 자들에 의해 자행된 농민 구타사건, 통일독립국가의 신속한 성립에 대한 기대,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 화학비료의 불충분한 공급, 배급품의 불공정한 분배, 다른 상품 가격에 비해 턱없이 낮은 곡물 가격, 농지개혁, 비싼 세금, 부족한 교육 시설 등이었다. 이런 보고 내용들은 당시 논산 지역의 농민들의 요구와 불만, 꿈과 희망 등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네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나 지방정부 혹은 북한에 대한 여론이다. “미국이 한국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조사대상자의 35.8%(105명)가 “그렇다”라고 응답하였음에 반하여, 37.6(110명)는 “모르겠다”, 26.6%(293명)는 “아니다”라고 응답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높았다는 점이다.

또한 “당신은 지방정부에 대해 만족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42.4%(124명)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57.7%(169명)가 “아니다”라고 응답하였는데, 이 질문 또한 여성들의 응답이 약간 더 부정적이었다. 여성들의 경우 만족한다는 답은 39.2% 정도였다. 북한과 UN에 대한 인식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응답자가 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6·25전쟁]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10월 초순경까지 논산 지역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사람은 없다. 떠오르는 의문은 무수히 많다.

첫째, 논산 지역의 6·25전쟁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이 났을까? 둘째, 전쟁이 났을 때 논산 내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을까? 셋째, 전쟁의 와중에서 논산 지역사회는 어떤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을까? 넷째, 북한군이 논산을 점령한 이후 어떤 사람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조치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다섯째, 전쟁을 통해 논산 지역사회 내부의 경제적 판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특히 만석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섯째, 전쟁 시기 논산 지역의 부역자들은 누구였으며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북으로 갔거나 산으로 올라간 논산 사람들은 이후 어떤 운명의 길을 걸었을까? 일곱째, 6·25전쟁이 논산 지역의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남긴 역사적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여덟째 논산 지역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를 스스로 어떻게 수습하고자 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논산 지역에서의 6·25전쟁은 1951년 10월 초순경 대체로 끝이 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논산 지역도 폭격으로 상당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10월 중순부터 피난살이를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고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두 달 보름 동안 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민주청년동맹·여성동맹·직업동맹·농민동맹 등 좌익 세력은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갔거나 아니면 산으로 숨어들었다.

모든 것이 이미 변해 있었거나 아니면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휴전선 근방은 물론이고 지리산 등지의 여러 산골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논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회고에 따르면 대둔산을 거점으로 한 유격 투쟁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입산하거나 통비분자로 몰려 사살되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는 전쟁 기간 미군이 노획한 문서를 모아 『빨치산자료집(1951~1952)』 전 67권을 편찬하였는데, 그 마지막 권에는 전쟁 중에 간행된 『충남노동신문』·『충남인민보』·『충남민청』·『유격전선』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전쟁을 선동하는 격문들로 가득한 기사 가운데 간혹 충청남도 지역의 당시 사정을 전하는 실명의 기사들이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활동을 한 사람들은 소신껏 한 일이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해야 했던 평범한 논산 지역 사람들의 운명은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붙잡혀 살해되었거나 징역을 살았고, 또 어떤 이들은 연줄에 기대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두 달 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논산 지역의 6·25전쟁은 논산 사람들, 특히 논산의 모스코바라고 불렸던 성동면 지역 등 유명 촌락의 주민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와 응어리를 안겨 주었다. 6·25전쟁의 비극성은 전쟁이 전선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즉 논산의 6·25전쟁은 좌우익의 싸움을 넘어 마을과 마을의 싸움, 이웃과 이웃의 싸움, 집안 어른과 형제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비극적이었다. 이런 싸움 과정에서 논산 사람들은 저마다 꿈에 다시 볼까 몸서리쳐지는 사연들,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들, 무덤까지 지고 가야 할 사연들을 간직하게 되었다.

[전망과 과제]

현대 논산의 정치에 대해서 시민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경제, 문화, 교육 환경 등 너무도 많은 부분들에서 논산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 지역 전반에 걸쳐 만족할 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논산의 여러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풀어가기 위해서 논산의 정치 문제를 선결적으로 풀어가지 못한다면 결코 다른 문제들도 발전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먼저 논산시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정치풍토를 개선해서 논산시, 논산시의회, 논산 시민 3주체가 올바르게 위상을 정립하여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논산 시민들이 더 이상 논산시 행정과 정책 결정에 있어서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논산 시민들의 의사와 창의적인 요구가 반영될 수 있는 쌍방향적인 의사소통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둘째, 논산시와 논산시의회의 관계가 견제와 균형이라는 건전한 관계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행정기관 논산시와 입법기관인 논산시의회가 대화와 타협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건전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권력이라는 것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 논산 시민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되고 권력의 독점과 독선이 자랄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되어버릴 것이다.

셋째, 건전한 시민단체들이 성장될 수 있는 분위기와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권력기관과 시민들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며 논산 시민의 의견과 요구를 올바르게 제기함으로써 권력기관이 결정한 정책들을 올바르게 시민들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시민단체의 성장이야말로 논산시 정치 발전의 필수적인 요건인 것이다.

넷째, 논산 시민의 여론을 통합, 조절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갖추어야 한다. 논산 시민들의 의견은 정책의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며 찬반양론으로 나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하면 논산 시민들이 극단적으로 분열하여 논산 시민들의 화합과 통합을 헤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논산시에서 주민투표제, 공청회, 토론회, 간담회 등을 통해 논산 시민들 간의 반목과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논산 시민들의 통합과 화합을 유지해 나갈 때 비로써 논산 시민들이 논산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산 시민들은 우선 애향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논산시의 주인이라는 의식과 참여의식을 가지고 논산시의 발전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하고, 논산시는 논산 시민들을 주인으로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논산시의 발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쌍방향으로 노력할 때 시와 시민들 간의 불신과 반목을 제거하고 논산 사랑, 논산의 번영과 발전이라 테두리 안에서 하나가 되어 논산의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