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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926
한자 烈女
영어음역 Yeolnyeo
영어의미역 Virtuous Wome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해준

[정의]

조선시대 논산 지역에 연고를 둔 절개 높은 여자를 일컫는 말.

[개설]

열녀(烈女)는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貞操)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守節)한 부녀자를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열녀 중에는 또 ‘마당과부’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조혼(早婚)이 예사였던 시절에 혼례만 치르고 미처 시가(媤家)로 가기 전에 신랑이 죽는 경우의 여인을 말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만, 귀천상하를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의 일이다. 조선건국 이후 점차 주자학적 예속에 물들어가 ‘여필종일(女必從一)’이 지상계율이었으며 수절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삼강(三綱) 중에서도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女不事二夫]’는 법도는 모든 도덕과 교화의 기본으로 장려되고 강제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모든 과부를 열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열녀가 쏟아져 나왔다. 임진왜란 때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한 열녀의 수는 효자나 충신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는 그동안 부녀층에게 얼마나 철저하게 수절관념이 침투되어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여인들의 절사(節死) 행동은 당시 여인들의 통념에서는 하나의 미덕 또는 도리로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죽은 남편에 대한 정을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녀가 남성 중심의 가족제도의 희생물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논산 지역의 열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여러 읍지들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여지도서』(1765)에 기록된 열녀들 중 몇몇의 행적을 통하여 당시의 열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진진의 처 담양국씨]

생원 진진(陳璡)의 아내인 담양국씨(潭陽鞠氏)는 임진왜란 때에 남편을 살리기 위해 왜적에게 맞서 대항하였고, 왜적이 욕보이려 하자 돌로 제 머리를 쳐서 죽었다. 왜적이 시신을 거두려 하던 날에도 돌이 손에 있었다. 인조(仁祖) 때 정문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진진 처 담양국씨 정려논산시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다.

[김문의 처 양천허씨]

대사헌 허응(許應)의 딸이다. 검열 김문(金問)의 아내가 되었는데, 나이 17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불쌍하게 여겨 다시 시집보내려고 약속을 이미 정했다. 허씨가 이를 알고는 바로 유복자(遺腹子)인 김철산(金鐵山)을 업고 급히 시가가 있는 연산(連山)으로 내려와 평생을 마쳤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우고 표창했다. 『동국삼강행실도(東國三綱行實圖)』에 보인다.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09호인 고정리 양천허씨 정려논산시 연산면에 있다.

[사노 연금(連金)의 아내]

이름은 한매(寒梅)로, 사비이다. 성품이 본래 인자하고 착했으며, 모든 일을 올바른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중년이 되어 제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았다. 4~5년이 지나 사람들이 다시 시집가라고 권하자 준엄한 말로 거절했다. 마을 사람 하나가 그녀와 함께 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밤을 틈타 와서 한매를 으르고 협박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하며 따르지 않았다. 그 후로 밤새도록 통곡하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더러 달랬지만 더욱 성을 내다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감사가 아뢰어 조정에 알려지니 정문을 세우고 표창했으며, 두 딸을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주었다.

[윤선거의 처 공주이씨]

생원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며 문경공 윤선거(尹善擧, 1610~1669)의 아내이다. 병자호란 때 피난지였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오랑캐 손에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하고 순절하여 명정을 받아 정려를 건립하였다. 윤선거 처 공주이씨 정려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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