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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있었던 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104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 강경경찰서 백병전

6·25전쟁 당시 강경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와 국지전이 벌어져 그에 따른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투 중에서 강경경찰서의 백병전은 가장 대표적인 격전이었다.

6·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강경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강경경찰서 백병전으로 당시 경찰서장 정성봉(鄭成鳳) 등 83명의 경찰관이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에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제46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1991년 10월 21일에 역사의 현장인 강경경찰서 청사 정문 옆에 「경찰 6·25격전지」 표지석을 세웠다.

1950년 7월 17일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군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한군 주력부대는 금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강경 방면으로 몰려 내려왔다. 18일 새벽 북한군이 경찰서까지 육박해 왔고, 11시경에는 경찰청사는 북한군의 공격 속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에 강경서 경찰관들은 결사적으로 응전하였으나 탄약마저 다 떨어져 백병전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하여 정성봉 서장 외 82명의 경찰관들은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으로 벌이다 결국 최후를 마쳤다. 이렇게 마지막 한 사람까지 혼신의 힘을 기우렸던 향토방위의 굳은 의지는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청사는 자욱한 화약연기와 냄새로 뒤덮였고, 정성봉 서장과 경찰관 82명의 시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전투로 전라도 지역으로 침공하려던 북한군 주력부대가 5일 이상 저지됨으로써 북한군의 이리, 황등작전과 낙동강 도하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하였고,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큰 힘이 되었다.

❚ 대둔산 공비토벌작전과 강경경찰서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던 국군과 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다. 이에 9월 28일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서울을 탈환함과 동시에 국군의 북진으로 북한군은 주벽부대가 양분되어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퇴로가 끊기고 사기가 떨어진 북한군은 북으로 탈출하거나 탈출하지 못한 북한군과 빨치산 등이 규합하여 대둔산계룡산·지리산·칠갑산 등지로 숨어 들어갔다.

북한군과 빨치산은 이곳을 근거로 하여 탈출로를 만들거나 후방 치안교란을 목적으로 관공서를 피습하고 우익 인사를 납치 살해하는가 하면, 식량 및 군수품 등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대둔산지구 전투는 가장 치열하였고, 경찰 및 애국단체원 등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바로 대둔산은 논산시와 금산군 및 전북 완주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북한군 병력들이 은거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에 1950년 10월 20일 충남경찰국 경비 사령부내에 도훈령 제10호에 의거 대둔산지구 공비소탕 전투대대가 창설되면서 도내 각 경찰서에서 1개 소대 병력을 차출하여 부대를 편성하였다. 초대 대대장에 홍인출 경감이 임명되었고, 경찰관 600여 명과 의용경찰대 300여명으로 각 소대 및 분대를 편성하여 대둔산 공비토벌작전을 위하여 출동하였다.

1950년 11월 9일 남로당 충남도당 위원장인 남충열과 논산군 당위원장 곽해봉, 그리고 부여군 당위원장 김운희 등이 지휘하는 공비 550여 명이 강경읍 채산리 소재 채운산을 거점으로 강경경찰서 습격 및 교통 두절을 목적으로 강경역을 폭파하려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강경경찰서장 이세환 총경은 직접 부대를 지휘하여 적과 대치하였고, 끝내는 백병전까지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강경역이 전소되었다. 그리고 강경경찰서 유치장이 가득차서 경찰서 옆에 있었던 미곡 창고에 가유치장을 만들어 부역자를 검거하여 수용하였는데, 그중에서 100여 명이 적의 기습으로 도주하여 대둔산에 입산하여 공비들과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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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역

이때의 전투로 적 사살 90여명, 부역자 포로 100여 명을 검거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부상자 2명에 강경역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고, 전력이 크게 손실된 적은 시체를 길바닥에 버려둔 채 대둔산으로 달아났다.

1950년 11월 27일 남로당 논산군 당위원장 곽해봉이 공비 500여명을 지휘하여 대둔산 남쪽에 근거를 두고 벌곡지서를 습격해 왔다. 이에 벌곡지서 경찰관 40여명과 소방대원 30여명이 합세하여 7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적 사살 49명, 포로 3명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애석하게도 경찰관 1명과 소방대원 2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10명이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1950년 11월에 2회, 12월에 1회, 1951년 1월에 2회, 3월에 2회, 6월에 1회, 1952년 9월 1회, 1953년 8월에 1회 등 수많은 전투와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부터 1955년 1월 공비들이 완전히 소탕될 때까지 무려 6년간에 걸쳐 벌곡, 양촌, 연산, 두마, 가야곡 등지에서 낮에는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게양되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불리는 등 지역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고 치열한 격전 속에서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리고 전 토벌작전 기간 동안 경찰관, 의용경찰 및 애국 청년 등 1,376명이 전쟁의 피해로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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