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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네의 옛 이야기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A0103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집필자 홍제연

❚ 시묘리의 네 동네

시묘리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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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602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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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1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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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2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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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3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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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4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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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2리 입구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구와 면적에 따라 2개리로 행정편제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골짜기를 경계로 각각 2개리로 나뉘면서 현재 4개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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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1리 마을회관

길을 따라 1,2,3,4리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해방 후 분구(分區)를 할 때에 시묘골에 리의 서기 소종근 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살고 있던 곳을 1리로 정하면서 가장 동쪽 끝에 있던 황골이 2리가 되고 중간에 낀 시묘골이 1리가 되었다고 한다.

각각의 마을을 부르는 대표 명칭은 1리 시묘골, 2리 황골, 3리 부수골, 4리 올목삼거리이다. 현재 가장 큰 마을은 시묘1리인 시묘골이고, 황골과 부수골은 비슷한 규모이나 4리 올목삼거리는 면적도 좁고 가구 수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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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목삼거리

❚ 형님 동생 하는 시묘골

시묘리의 4개 행정리 중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은 시묘1리 시묘골이다. ‘시묘리’라는 지명의 시작도 바로 이곳이고, 네 개 마을 중 가장 번성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무렵 시묘골에만 100여 호가 거주했을 만큼 큰 동네였다. 지금도 시묘골 중앙을 ‘큰 동네’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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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1리 사람들

시묘골에서는 시묘살이 효자가 이씨가 아닌 지씨라고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시묘골은 지씨들의 터전이었다는 전설이 있고, 실제로 골짜기마다 지씨 집안의 묵은 묘가 남아있다. 조상 대대로 그 무덤이 지씨 집안의 것이란 이야기가 전해왔던 데다 지금도 가끔 타지에 사는 지씨 집안 후손들이 찾아와 벌초를 하곤 한다.

시묘골에 지씨가 살았던 시절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전통시대에 긴 시간 동안 시묘골을 차지했던 이들은 밀양박씨였다. 조선 후기에 청주에 살던 박신경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밀양박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6·25 한국전쟁 무렵 타 지역 사람들이 대거 흘러오기 전까지 시묘골 사람들의 90% 가량이 밀양박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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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재실 입구에 선 집안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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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세적비

2008년 현재 주민의 절반이 밀양박씨이고 나머지는 각성바지인 상황이지만 여전히 동족마을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것은 서로 혼인을 맺고 살아온 덕분에 성씨가 달라도 친인척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다 동네 사람끼리 티격태격하다가도 한 다리 건너 당숙이고, 사촌이다 보니 금방 풀어질 수밖에 없다.

❚ 힘으로 밀리지 않는 황골 사람들

시묘2리의 가장 큰 마을인 ‘황골’은 큰 골이란 뜻의 ‘한골’에서 ‘황골’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황씨가 많이 살아 ‘황골’이란 설도 있다. 배매산 바로 아래 동향사면에 형성된 마을로 도로가 생겨 옛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골짜기가 그리 깊은 편은 아니고, 황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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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이씨가 터 잡은 황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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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매산 전경

아무튼 이 마을의 터줏대감 합천이씨 집안에서는 양반 사는 한골이 황골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새겨두었다. 즉 합천이씨 이춘계(李春啓)의 후손들이 황골에 자리 잡으면서 대대로 세거하며 양반마을이란 뜻의 한골이 황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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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2리 입구

황골 사람들은 힘이 장사라는 소리가 있다. 합심하여 나서면 어디에서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깃대싸움, 쥐불놀이 등 이웃한 야촌리의 큰 동네 사람들과 겨뤄도 기죽지 않아서 힘이 좋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시묘골 마을 뒷편 재실골 골짜기는 골짜기 전체가 이씨 집안의 묘역이고, 후손들은 주로 배매산 기슭 황골에 거주했다. 사실 양지바른 자리는 황골마을 건너편의 작은 황골 안 고랑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은 동향한 산 중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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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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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황골

옛 사람들은 서남향의 작은 황골에 자신들이 살았던 자취를 남겼다. 작은 황골 일대에서는 고려시대의 묘제로 보이는 고분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었고, 뒷산인 관청산에는 기와조각이 많아 그것을 가져다 놋그릇을 닦는 데 쓰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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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산

❚ 부자동네 부수골

3리 부수골 은 누운 소 모양의 ‘와우형(蝸牛形)’ 동네라 한다. 산줄기에 둘러싸인 아늑한 동네가 마치 누워있는 소의 품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길가에 닿는 산 끝을 소의 머리와 발이 있는 자리라 부르며 ‘소 발톱’이라 했는데, 이곳은 바위와 돌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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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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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3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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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수골 소의 발톱 자리

동네 어른들은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절대 이 자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 하였기에 지금도 되도록 이곳을 보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도로가 개설될 때에도 소 발톱 자리는 파손을 면했다.

또 와우형 지형에 따라붙는 소의 밥그릇 자리를 ‘구수논’이라 부르고 있기도 하다. 요즘에는 풍수지리 설화를 그저 말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수리시설을 만들면서 수로가 마을 중앙을 뚫고 지나가자 소의 배를 뚫었다고 생각했다. 수로 공사 때에 노선을 조금만 돌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술자리의 화젯거리이다.

부수골을 한자로 쓰면 ‘부수(富壽)’라 한다. 즉 부유하고 장수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부수골 사람들이 잘 산다고 알려졌다. 부수골은 골짜기가 깊지 않으면서 낮은 산줄기가 양 팔로 감싸듯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안온한 느낌이 드는 남향한 마을이다. 시묘리의 네 동네 중 지형적인 면만 보면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을 만하다. 마을 밖으로 나오면 시묘천과 넓은 ‘은들’이 펼쳐져 있어 농사 환경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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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들 전경

부수골은 각성바지 마을이다. 오래 살았다는 집안이 4~5대째 정도일 뿐이다. 주민들은 남의 묘 자리였으면 살기 어려웠을 거라며 동족마을의 텃세가 없어 누구나 이주해서 살아도 좋은 동네라고 생각한다.

❚ 명당이 될 뻔한 치울재

치울재는 치복산(雉伏山)으로도 불리는 시묘골 뒷동산이다. 지명의 뜻 그대로 꿩이 엎드려 알을 품은 형국을 뜻하는 지명이다.

보통 복치형 명당이라 함은 주변에 매나 독수리 형국의 땅이 있어 그 사이에 숨어든 모양으로 사람들이 편하게 사는 좋은 땅이거나, 덕망 높은 학자가 난다고 하는데, 시묘골에서의 해석은 다르다. 꿩이 알을 품느라 틀어 앉아 꼼짝하지 않으니, 큰 부자가 나지는 못하고 주민들이 고만고만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래도 치울재 덕분일까. 시묘골이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 되었고 논도 많은 편이다.

❚ 암행어사 이도령 남원으로 가던 길

시묘4리를 일컬어 ‘올목삼거리’라 한다. 이 길은 현재 연무, 논산, 가야곡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곳이고 예로부터 한양과 호남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어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갈 때에 지난 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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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목삼거리

이도령이 동정고개를 넘어 유와골을 지나 용산천을 따라 남원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 길은 바로 시묘리에서 용산리로 이어지며 북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올목’은 원래 시묘4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연무읍 토양리의 작은 마을이다.

올목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시묘교를 건너면 바로 연무읍 토양리 올목에 이른다. 예전에는 ‘똑다리’라는 큰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목’이 어떤 뜻을 가진 지명인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고, 그저 올목이란 말 외에는 다른 지명도 없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읍지와 지리지에서는 은진현의 역원(驛院)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은진에는 역이 없고 원(院)만 있었다고 하며 그 원의 이름은 ‘남항원(娚項院)’이었다. 그런데 남항(娚項)이란 한자어를 보면 오라비 ‘남(娚)’자와 목 ‘항(項)’자를 쓰고 있다. ‘올목’과 ‘남항’은 같은 뜻인 듯하지만 ‘올목’이 먼저인지 ‘남항’이 먼저인지는 알 길이 없다.

즉 ‘올목’이란 우리말을 한자어로 바꾸다 보니 그리 된 것인지, ‘남항’이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부르다 보니 그리된 것인지, 아니면 오라비라는 말과 관련된 어떤 숨겨진 전설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무엇도 알 수 없지만, 수백 년 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역원 마을은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올목삼거리는 ‘유지앵소(柳支鶯所)’의 형국이라 하였다. 유지앵소는 버드나무가지에 꾀꼬리가 앉은 모양이란 뜻이다. 꾀꼬리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맨 끝에 집을 짓는 습성이 있는데, 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올목삼거리 마을은 도로변을 따라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마치 긴 나뭇가지의 꾀꼬리 집 마냥 길가에 주택이 촘촘히 들어선 듯하다. 1970년대까지 빈촌에 30여세대가 살았는데 큰 길목인지라 주막이 세 군데나 있었다. 1970년대에 딸기가 보급되면서 50세대로 늘었고 주민들 형편도 좋아졌다.

[정보 제공자]

나재완, (1933년생, 시묘4리 이장)

양운규, (1943년생, 시묘3리 주민)

임승근, (1934년생, 시묘3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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