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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묘를 지킨 시묘살이 효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A010301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제연

❚ 고행의 길 시묘(侍墓)

시묘리라는 지명은 효자가 부모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시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묘를 지킨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효심이 깊은 자식은 부모님의 묘를 지키게 되는데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생업을 포기하고 묘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든 일일 뿐더러 시묘살이는 개인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부모를 그리워하는 슬픈 마음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묘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시묘가 시작되면 묘 앞에 나무와 풀로 대강 엮어 만든 여막을 만들고 그 안에서 베 옷 차림으로 거친 음식만을 먹으며 추우나 더우나 밤낮으로 상식을 올리고 슬픔에 잠겨 시간을 보낸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었던 조선시대에도 시묘살이를 하는 효자는 흔치 않았으므로 대개 이런 효자가 있으면 고을의 사또가 조정에 추천하여 포상을 받도록 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효자에 대한 국가의 포상은 각각 등급에 따라 종류가 다양한데 그중 최고는 바로 효자문[정려]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포상이란 굉장한 것이어서 선물로 받기도 하였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며 아들 손자는 군대를 면제 받기까지 하였다. 신분이 천민이라면 양인으로 승격이 되고 양반사족에게는 벼슬을 주니 효행을 실천한 한 개인 뿐만 아니라 집안과 후손에게 큰 혜택이 주어지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효자에게 국가에서 상을 내리는 것은 조선시대 내내 국가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공식적인 ‘효자’로 인정을 받아야 했으며 누구나 감동할 만한 효행을 보여야 했다. 병든 부모를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을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병세를 알기 위해 변의 맛을 보았다는 등의 큰 행적이 드러나야 했다. 이러한 효행에 하늘이 감동하여 겨울에 수박을 구하였다거나 빙판 속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 등의 기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이 교훈적으로 전해진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것도 대단한 효행 중의 하나였다. 즉, 육체적 희생과 신기한 기적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바로 시묘살이라는 것이다. 시묘리의 효자가 누구인가 대해서는 이런저런 설이 있지만, 시묘골 합천이씨 집안의 효자 이인지(李仁之)의 행적은 매우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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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지의 묘

이인지는 바로 3년간의 시묘살이를 실천했던 효자였다. 그의 묘비명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효심이 있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깊은 슬픔 속에서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년을 하루같이 묘를 지켰다. 3년간 고기나 쌀밥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그저 거친 나물을 반찬삼아 연명했을 뿐이었다.

시묘리’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00년대 중반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은진현의 방리조(方里條)인데, 여기에 죽본면의 시묘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이전 시기의 면리 지명과 관련된 자료가 없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시묘리로 불리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은진의 효자 이형지(李亨之)

이인지의 효행에 대해서는 매우 소략하게 알려져 있다. 시묘살이를 했었다는 전설과 합천이씨 집안의 족보에 그가 효행이 있어 동네 이름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이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 살았던 이형지라는 사람의 효행에 대해 세종실록에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인지와 이형지가 동일인물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기도 하지만, 족보를 보면 이인지의 아버지가 세조 때 사람이라 하므로 세종실록에 이인지가 등장할 수 없으니 두 사람은 분명 동일인이 아니다. 그러나 같은 은진 사람이며 그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로 이인지의 시묘살이가 어떠했는지를 추측하게 해 주므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실록에 의하면 은진(恩津) 사람 이형지(李亨之)는 1417년에 아버지가 큰 병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동안 아버지의 설사 변을 직접 맛을 보아 병세가 어떤지 알아보았으며 결국 돌아가시자 3년간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한다. 묘를 만들 때에도 직접 흙과 돌을 짊어지고 와 법식에 맞게 만들었고 상복을 벗지 않은 채 거적을 깔고 흙덩어리를 베고 자면서 죽만 먹었다. 그러는 동안 점점 얼굴이 검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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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중 시묘살이 효자의 모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3년 만에 이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자 아버지 묘 앞에서의 시묘살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 묘를 지키며 동네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3년간 눈물 속에서 살았으니 부모의 상에 시묘살이 한 것이 총 6년이었다. 이러한 이형지의 효행은 널리 알려져 예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포상의 일환으로 벼슬을 내려 주었다.

[정보 제공자]

이상문, (1929년생, 시묘2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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