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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745
한자 喪禮
영어의미역 Funeral Rites
이칭/별칭 상,흉례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집필자 민정희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행하는 의례.

[개설]

상례는 한 인간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 중 마지막 관문이다. 상례는 임종 직전과 직후에 망인을 다루는 초종례부터 시신을 처리하는 염습, 죽은 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발인과 매장에 따르는 의례, 상주들이 현실 사회로 복귀하는 매장 후부터 탈상까지의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아울러 지금은 소멸되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전통 장례 방식 중의 하나인 이중장인 초분(草墳)과 객사(客死), 어린 아이의 죽음, 임신부의 죽음 등 비일상적인 죽음에 대한 상례 방식도 살펴본다.

[절차]

1. 초종(初終)

집안에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있으면 남녀에 상관없이 안방으로 모셔 임종하게 한다. 눈의 동공에 힘이 없고, 허리 밑에 손을 집어넣어서 손이 들어가지 않으면 죽음이 임박했다고 여기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가족들은 임종을 보기 위해 곁을 지키는데, 이를 종신이라고 한다. 아무리 효자라 할지라도 종신을 못하면 불효로 여겨 ‘종신자식이 자식이다’라 하여 임종을 지켜보는 것을 큰 효로 여겼다.

임종이 확인되면 가족들은 죽은 사람에게 새 옷을 입히고 시신이 굳기 전에 수시(收屍)를 한다. 우선 손바닥을 마주하여 엄지손가락을 묶는다. 발도 직각으로 세우고 맞대어 엄지발가락을 묶는다. 이어 손과 발을 소창으로 팽팽하게 연결한다. 수시를 하고 나면 칠성판을 마련하여 시신을 윗목에 모신다. 아울러 시신이 땅에 닿지 않도록 칠성판 밑에 짚을 4단 내지 5단을 가져다가 일렬로 놓은 후 병풍을 쳐 놓는다.

시신을 보지 않은 사람이 초혼(招魂)을 한다. 한 손에 망자의 새 옷을 들고 마당에 서서 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복·복·복” 하고 외친다. 그런 후 옷을 지붕 위에 얹는다. 이처럼 초혼을 하는 것은 떠나가는 영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며, 동시에 초상이 났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초혼을 하고 망자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대접하기 위해 대문 밖에 사잣밥을 마련하는데, 이는 집집마다 다양하다. 상 위에는 조기 1마리·밥 3그릇·동전 3개·짚신 3켤레 또는 밥 3접시·된장 3접시·소금 3접시·동전 3개를 놓으며, 상 밑에는 망자가 신던 신발을 놓는다. 된장과 소금을 놓는 것은 저승사자가 모든 부정을 가지고 떠나라는 의미이다. 사잣밥은 염을 한 다음 상째 뒤집어 놓는다. 이는 입관이 끝났음을 알리는 의식이다. 시신을 모신 방에는 부패 방지를 위해 불을 때지 않으며, ‘시신을 모신 방의 굴뚝으로 고양이가 들어가면 시신이 일어선다.’고 하여 굴뚝을 막는다. 일어난 시신은 왼쪽으로 넘어뜨려야 넘어간다고 한다.

2. 장례 준비

망자의 자손은 모두 상주(喪主)라고 부른다. 이 중 큰아들은 ‘맏상제’라 하여 초상을 책임진다. 아들이 없다면 초상날 양자를 삼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양자가 되면 재산의 일부를 떼어 주고 제사를 지내게 한다. 부모가 죽으면 죄인이라 하여 상주는 입관 전까지 옷의 한쪽을 빼놓는다. 아버지 상일때는 왼쪽을 빼고, 어머니 상일때는 오른쪽을 뺀다.

상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호상(護喪)이라 한다. 호상은 부고도 내고 부조도 받아야 하므로, 친척 중 학문이 깊은 사람으로 선정한다. 부고는 친척·연척·친구에게 먼저 내고 그 다음 이웃에게 낸다. 부고는 부정한 것이라 하여 집안으로 들이지 않고 대문 옆에 끼워 둔다.

만약 상가(喪家)가 벌을 키우는 집이라면 벌한테 먼저 부고를 내야 한다. 벌과 개미는 군법을 지키는 유일한 존재이므로, 부고를 내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와 망자를 애도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벌이 모두 나가 버린다고 한다.

3. 염습(殮襲)

망자가 죽은 다음 날 염습을 한다. 염습은 가족이나 일가친척 중에서 경험 있는 사람이 맡아서 하는데, 만약 사람이 없으면 염하는 사람을 부른다. 염을 할 때 가위나 칼 등의 금속이 시신 위로 넘어 다니지 않도록 주의한다. 저승갈 때 깨끗하게 하고 가라는 의미로 향물을 솜에 적셔 시신을 닦는다. 손톱과 발톱을 조금씩 깎아 조발랑에 담아 각각의 손과 발 옆에 놓는다. 그런 후 수의를 입히고 얼굴을 덮기 전에 반함(飯含)을 한다.

반함은 망자가 저승갈 때 먹을 식량으로, 물에 불린 쌀을 버드나무 숟가락을 이용하여 3번을 떠 넣는다. 떠 넣을 때마다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라고 외친다. 혹은 망자가 저승갈 때 사용할 노자라 하여 세 개로 자른 동전을 입에 넣기도 한다. 이때도 역시 넣을 때마다 “백냥이요! 천냥이요! 만냥이요!”라고 외친다. 삼베로 시신을 감싸고 7매듭을 만든다. 매듭 사이에는 백지로 종이 고깔을 접어서 끼운다.

수의는 윤년이 드는 해에 미리 마련해 둔다. 한 사람의 수의를 만들려면 삼베가 30m 정도 필요하다. 수의를 마련해 두면 오래 산다고 하여 후손들이 미리 마련해 둔다. 넉넉한 집에서는 여자의 수의로 원삼(圓衫)을 마련해 두기도 한다. 하대실의 유국봉은 수의로 마련해 둔 원삼을 며느리들이 시집올 때마다 입혔다. 이렇게 하면 원삼의 주인이 오래 산다고 하여 길하게 여겼다. 남자의 수의도 명주로 만들었다. 평생에 단 한 번 명주옷을 입는데, 그것이 바로 수의였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면 입관을 한다. 입관은 상주와 망자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순간이므로 그 어느 때보다 슬프다. 이때 아픈 이가 있다면 망자에게 떠나가면서 모든 병을 가져가서 강물에 띄워 달라고 부탁한다. 염을 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므로 영원히 고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4. 성복(成服)과 발인(發靷)

입관이 끝나면 상주를 비롯한 복인은 상복을 갖추고 제물을 차려 성복제를 올린다. 상주는 상장막대기를 잡는데, 이를 ‘작지’라고도 부른다. 아버지가 죽으면 대나무를 쥐고, 어머니가 죽으면 오동나무를 쥔다. 초상이 나면 동네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상가로 몰려간다. 예로부터 초상은 다른 일과 달리 동네 일로 간주했다. 위친계나 원반계의 계원은 멀리 있더라도 참석한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궐을 내야 한다. 예전에는 친한 사이의 부조로 팥죽을 끓여 갔다. 새알심을 넣지 않고 맑게 끓여 간다. 팥죽 부조도 품앗이이므로 받으면 나중에 갚는다. 이 팥죽을 저녁에 문상객들에게 대접하는데, 발상하기 전에 모두 먹어야 하므로 넉넉하게 대접한다.

입관 후에 문상을 가면 망자에게 먼저 절을 하고 이어 상주에게 인사를 한다. 입관을 하지 않았다면 망자에게만 절을 하고 상주에게는 인사하지 않는다. 입관을 하면 혼백상자를 마련하여 시신을 모신 방문 앞에 모셔 둔다. 문상객은 혼백상자를 망자로 간주하여 재배를 올린다. 혼백상자는 종이로 접어 만드는데, 사방이 모두 막히게 하여 혼을 모셔 둔다. 문상객이 상주에게 “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눈물이 얼마나 나오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네면, 상주는 “오시느라 욕 많이 보셨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혼인을 앞둔 사람이나 해산을 한 사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사람은 문상을 가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알면 문상을 오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대떨이란 발인 전날 밤에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가를 비롯하여 망자의 친척 집을 돌면서 노는 것을 말한다. 요령잡이는 「회심곡」을 부르며 상주들을 불러 상여에 인사를 시킨다. 상주들은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수고비를 주어야 하므로 의례껏 상여에 돈을 걸고 인사를 한다.

대떨이는 노인이 죽은 호상(好喪)에 하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대떨이는 부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난한 초상집에는 문상객도 없다 하여 ‘상가는 돈 힘이다’라고 한다. 망자가 죽은 지 사흘째가 되면 출상을 한다. 시신을 모셔 두었던 방에서 모셔 낼 때에는 네 명이 관에 줄을 메서 모셔 낸다.

이때 방안의 네 귀퉁이에 대고 관을 흔들며 “중상이요!”를 외친다. 그런 후 문 앞에 바가지를 놓고 ‘퍽’ 하는 소리가 나도록 밟아 깬다. 모든 잡귀, 잡신이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 의식이다. 아픈 환자는 관을 내간 곳에 와서 뒹굴며 망자가 자신의 병을 가져가 달라고 기원한다.

상여에 입관하면 곧 발인제를 지낸다. 발인제는 그 어떠한 제사보다 푸짐하게 지낸다. 상여가 장지를 향해 출발할 때는 공포(功布)가 앞장선다. 공포는 일꾼들의 수건이며, 질거름[길]을 치우는 것이므로 어른으로 간주한다. 긴 베 한 필을 대나무 막대기에 걸어 들고 나간다. 매장 후에 공포는 태운다. 그 뒤에 명정(銘旌)이 서는데, 붉은 비단에 망자의 본관과 이름을 적은 것으로 매장할 때 관을 덮는다. 그 뒤에 혼백상자가 선다. 혼백상자는 망인으로 간주되므로 특별히 관리를 잘한다.

혼백상자는 사위가 모시고 가며, 노제를 지낼 때는 자리를 깔고 내려놓고 그 앞에 제상을 올린다. 그 뒤에 상여가 서는데, 논산 지역에서는 8명이 매는 상여를 사용하였다. 그 뒤에 상주가 서고, 맨 뒤에 친족들이 따른다. 예전에는 여자 상주들은 장지까지 가지 않았지만 근래에는 모두 함께 간다.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위치한 가정에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짚에 불을 붙여 대문 양쪽에 놓아 둔다. 간혹 ‘흰등 탄다’고 하여 상주가 양반이면 가마를 타고 가기도 한다. 여자들은 흰 광목으로 만든 족두리를 쓰고, 상복을 입고 가마를 타고 간다. 1930년대 중반에 개태사가 있는 곳의 화골 사람의 초상에서 흰등을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미처 문상을 하지 못한 사람이 뒤늦게 도착하면 그들을 위해 노제를 지낸다. 길 가운데에 상여를 내려 모시고, 간소하게 제사를 지낸다. 인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사를 하고 난 후에는 친구들이나 친척들도 술을 한 잔씩 올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노제는 장지로 가다가 상여꾼들이 쉬기 위해 지낸다. 또한 다리를 건널 때는 상여꾼들이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사위에게 돈을 걸라고 한다. 이 돈은 모두 거두어서 상가에 돌려준다.

5. 치장(治葬)

매장지는 미리 잡아 두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치표(置標)라 하여 미리 묏자리를 마련해 둔다. 치표를 해 둘 경우에는 부부를 모실 수 있도록 광을 파고 봉분도 해 둔다. 산을 건드리면 반드시 먼저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때도 땅을 건드리므로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땅을 판다. 산신제를 지낼 때는 상가(喪家)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온 통명태·술·대추·사과·배 등을 올린다. 부정하면 탈이 나므로 깨끗한 제물을 올리고 염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 지낸다.

산신제를 지낸 후에는 땅을 판다. 땅은 내광과 외광으로 구분하여 파는데, 내광에는 관을 모셔야 하므로 관이 들어갈 만큼만 판다. 외광은 흙을 넣고 다져야 하므로 내광보다 넓게 판다. 하관(下棺)할 때는 지관이 ‘살을 맞는다’ 하여 하관을 보지 말아야 하는 사람을 일러 준다. 해당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하관 장면을 보지 않는다. 합장을 할 경우에는 앞에서 볼 때 남자는 왼쪽에 모시고, 여자는 오른쪽에 모신다. 망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자는 왼쪽에 모신 것이 된다. 이런 연유로 비석에 여자를 부좌(祔左)했다고 표기한다.

내광의 맨 아래에는 백지를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올린다. 그런 후 명정을 덮고 흙을 덮는다. 이때 나무로 만든 홍대를 내광의 길이에 맞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나무가 썩으면 시신에 좋지 않다고 하여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상주가 먼저 흙을 넣으면 일꾼들이 알아서 마무리한다. 외광의 흙은 여러 번에 나누어 넣는데, 잡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다져 밟는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묘는 관이 모셔진 부분에는 둥글게 흙을 쌓고, 머리 부분에는 낮게 흙을 쌓아 사성(莎城)을 두른다. 전라도에는 사성을 두르지 않고 봉분만을 봉긋하게 올린 함박묘가 많지만 논산 지역의 묘는 사성을 반드시 두르는 것이 특징이다. 사성을 둘러놓으면 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흙이 흘러내리지 않는다. 땅이 평평하게 되면 평토제를 지내는데 이를 성분제라 하기도 한다. 모든 의식을 마치고 상주는 상여가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6. 흉제(凶祭)

집으로 돌아온 상주는 미리 마련해 둔 고연[几筵]에 혼백상자를 모신다. 고연은 손이 없는 방위에 만드는데, 보통 윗방이나 사랑방에 둔다. 줄을 네모나게 늘이고 그 위에 광목을 늘어뜨려 혼백상자가 보이지 않도록 한다.

평토제를 마치고 돌아온 상주들은 곧 제사 지내듯이 초우제를 지내고, 이튿날에 재우제를 지내고, 사흘째에는 묘소에 가서 삼우제를 지낸다. 그 후로 탈상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상식(常食)을 올리고,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마다 삭망제(朔望祭)를 지낸다. 상식은 그날 마련한 밥을 올리지만, 삭망제 때는 상복을 입고 제사 음식처럼 골고루 마련하여 치제한다. 간혹은 무당을 불러 망자를 위해 천도굿을 하기도 한다. 저승길을 닦아 주어야 한다 하여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굿을 한다. 간혹은 절에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기도 한다.

예전에는 어느 가정이나 3년 만에 탈상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간 경우에는 어머니 상을 2년으로 치렀다. 탈상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이 제물을 푸짐하게 마련한다. 식구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참석하여 망자의 영혼을 위로한다. 그런 후에 상복(喪服)이나 궤연을 만들었던 도구들을 태운다. 만약 부모 중 한쪽이 살아 있으면 상복을 잘 보관해 두고, 부모가 모두 돌아갔다면 태운다. 간혹 이것이 아깝다 하여 상보를 만들거나 걸레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처사이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일단 초분을 했다. 고랑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얹고 풀로 덮어 둔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 뼈만 남으면 장례를 치러 묻었다. 지금 생존한 사람은 본 적이 없으나 돌아간 사람들이 이전에는 초분을 했다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객사한 사람의 시신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다만 부모일 경우에는 효를 다하기 위해 집안으로 들인다. 아이가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나무에 걸쳐 둔다. 이를 애장이라 한다. 10살 미만의 아이는 매장하지 않고 아이 아버지의 웃옷에 싸서 덕다리골의 나무에 올려 둔다. 예전에는 깊은 골짜기 여기저기에 아이를 얹어 두었으므로 그곳을 덕다리골이라 불렀다. 간혹은 동물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독 속에 아이를 넣어 매장하기도 했다. 임신부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가매장을 해 둔다. 두 사람의 시신을 함께 묻으면 좋지 않다고 하여 그리한다. 가매장을 해 두면 아이를 낳아 두기도 한다. 그러면 두 사람을 분리하여 묻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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