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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365
한자 畿湖儒學
영어의미역 Giho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문준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17세기 이후 발전한 기호 지역의 성리학.

[개설]

기호유학은 이이(李珥), 성혼(成渾), 조헌(趙憲) 등 경기 지역의 유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충청 지역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한 유학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학술적으로는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를 주기적 경향의 성리학을 전개했다고 평가하여 주기파라고 부르고,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학파는 주리적 경향의 성리학을 전개했다고 평가하여 주리파라고도 부르지만, 주리(主理)·주기(主氣)라는 용어는 기호유학의 특성을 제대로 표현한 말은 아니다.

또한 이황이 예안(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의 도산서원을 근거로 후진을 양성하여 이황을 따르는 학자들이 주로 영남 지방에 분포했으므로, 이황의 학맥을 영남학파라 부르고, 이이의 제자들은 대부분 기호 지방(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호남 지방 일원)에 거주했으므로 기호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기호 지방의 유학자들과 학파들은 대단히 다양한 학설과 학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분도 적확한 구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호서학파]

16세기에 경기 지역에 살던 이이, 성혼을 시작으로 형성된 기호유학은 17세기에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다. 기호유학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이, 성혼, 송익필의 제자들은 정치적으로 서인을 형성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유학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연산(현 논산시), 회덕(현 대전광역시) 등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호서학파를 형성하여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기호유학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특히, 17세기 이후 조선 예학을 선도한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사계학파는 주자학을 정통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예학을 정립하고 발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윤증 등이 활동한 시기는 성리학적 이론의 실천 욕구가 가장 활발하게 드러난 시기로, 이들은 조선 예학을 주도한 가장 대표적인 예학자들이다.

송시열은 기호유학의 대표자로서 그의 학문은 권상하-한원진에게로 계승되었다. 이 시기의 과제는 양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신분제의 문란과 지주제 강화에 따른 중세사회의 동요를 해결하여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주자의 사상과 경세론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양명학이 대두하고 다양한 경세론이 제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호학파는 주자학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입장의 차이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계 학자들은 정치적, 학문적 주체로서 주자의 경세론과 강상윤리를 실천 지침으로 삼아 기호학의 결속과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론계인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조성기, 임영, 박세채 등은 주자와 이이의 학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다.

[호락논쟁]

18세기 초에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계기로 기호학파는 호론과 낙론으로 분열되었다. 호론은 호서 지방의 학자들로 주로 권상하한원진, 윤봉구의 제자들이 가담했고, 낙론은 서울 거주 학자들로 김창흡의 문인인 어유봉, 이재, 김원행, 오희상, 홍직필이 동조했다. 대체로 호론은 정통 주자학을 주장하는 입장을 고수한 반면, 낙론은 주자의 도통론에 대해 거리를 두었으며 후에는 북학파가 등장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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