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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292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갑동

[정의]

고려 건국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역사.

[행정구역]

통일신라시대에 웅주와 전주의 관할 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논산 지역은 고려조에 들어와 웅주가 공주로 개칭되면서 모두 공주의 관할 구역이 되었으며 연산군(連山郡), 덕은군(德恩郡), 니산현(尼山縣), 시진현(市津縣)이 그 구체적인 지역이었다. 연산군은 통일신라시대에 황산군이라 불리었으나 고려 초에 개명되어 현종 9년에 공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기에는 감무(監務)라는 외관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니산현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웅주의 직할 영현이었으며 고려조에 들어와서도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 덕은군과 시진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전주에 속해 있었으나 고려조에 들어와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 특히 덕은군에는 견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그 통제를 위해 공주 관할 지역으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신라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후삼국이 성립되면서 논산 지역은 후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905년 공주 장군 홍기가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일시적으로 궁예의 태봉 영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918년 왕건의 즉위를 전후로 공주·홍성 지역과 함께 다시 후백제에 귀속되어 멸망 시까지 후백제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후백제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유폐되었다가 왕건에게 귀순한 후 왕건신검의 마지막 전투가 황산 즉 지금의 연산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 전투에서 신검군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왕건은 부처님의 가호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믿고 그 인근에 개태사(開泰寺)란 절을 짓고 미륵삼존불상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그리고 그 뒷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하였다. 한편 견훤은 황산의 어느 절에서 죽었는데 그 무덤은 지금의 연무읍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광종 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지방 세력인 호족을 숙청하는 과정 속에서 죽음을 당하는 자가 줄을 잇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심을 무마하고 고려 조정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현 논산 지역의 하나인 은진에 관촉사(灌燭寺)를 창건함과 동시에 높이 18.12m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케 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논산 지역에서는 큰 변화나 사건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홍건적이 침입하자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갔다 돌아오던 공민왕이 청주에 머물면서 신하를 개태사에 있는 태조 영전(影殿)으로 보내 강화도 천도와 관련된 점을 치게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개태사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이 되었다. 공양왕대의 관련 기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개태사는 이후에도 계속 태조의 진전으로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 말기에 논산 지역은 왜구의 침입과 관련이 많은 지역이었다. 1376년(우왕 2) 왜가 부여 석성(石城)에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연산현(連山縣) 개태사 쪽으로 나오자 박인계(朴仁桂)가 이들을 맞아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이후에 최영이 부여 홍산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승리가 그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이었다.

또한 1383년(우왕 9) 8월 왜구가 보은에 이어 또 다시 개태사를 침략한 후 계룡산에 웅거하는 지경에 이르자 문달한·왕안덕 등이 공주에서 싸워 겨우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 외 창왕 즉위년에도 왜구가 연산의 개태사에 침범하여 노략질하고 청주·유성·진령(鎭岺)에까지 진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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