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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어머니, 여성 노인회장 이삼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D030105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경윤

❚ 시집와 맺은 육곡리와의 인연

15살 때인 1947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 62년째 육곡리에서 살고 있는 이삼에(77) 씨는 여자노인회를 책임지고 있는 노인회장이다.

이삼에 씨의 고향은 연무대 근처였는데, 양촌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 댁을 방문하려고 가는 도중 육곡리를 지나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아는 분이 있으니 그 집에 좀 잠깐 들렸다 가자며 이삼에 씨의 아버지를 데리고 들어갔고 그 집이 남편인 노노복 씨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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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에, 노노복 부부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 집의 부인 즉, 이삼에 씨의 시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인 남편 노노복 씨를 중신해달라며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하였고,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함께 들어갔던 이삼에 씨의 아버지에게 의중을 물었다.

“형님 그 여식 있지 않아요? 그 여식 집에서 배곯게 하지 말고 일찍 여위지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당시 이삼에 씨의 집안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도 하였고, 또 평소 착한 성품으로 부탁을 잘 거절을 하지 못하던 성격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그냥 "알았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시집에서는 그 말뜻을 허락으로 생각하고 며칠 뒤 시어머니와 이모님이 함께 찾아와 이삼에 씨를 몰래 선보고 갔다. 이삼에 씨를 보고 돌아간 시집에서는 ‘싹수 있게 생겼다’라고 하며 마음에 든다고 승낙을 했고, 바로 이어서 이삼에 씨의 집에 알록달록한 보자기에 쌓여있는 사주단자를 보내오면서 혼인이 성사 되었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그것도 당사자도 모르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삼에 씨의 집에서는 그 일로 아버지 어머니가 매일 다투었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품안의 어린 자식을 무슨 시집이냐며 보낼 수 없다는 어머니와 이미 한 약속이고, 사주단자까지 보냈는데 이미 번복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아버지와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집안이 시끄럽자 어린 마음에 이삼에 씨는 승낙을 하게 되었다.

“엄니, 내가 그 집으로 시집 갈테니 엄니, 아버지 싸우지마.”

이렇게 하여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15살 어린 신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신랑이 누군지 얼굴조차 모르는 상태였는데 처음 신랑의 얼굴을 보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1930년대 육곡리는 대부분의 집들이 초가집으로 옹기종기 붙어있었다. 한창 혼례가 진행 중이던 때 동네 꼬마 아이들이 불장난을 치던 중 바람에 불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삼에 씨가 신랑에게 절을 하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불이야’ 하는 큰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그때 처음 신랑의 얼굴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첫날밤을 지낼 뻔 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야󰡓

혼례를 치른 후 신랑이 친척들 집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러 다녔는데 워낙 많은 친척들로 인해 신랑이 며칠씩이나 돌아오지 않아 혼례 때 잠깐 본 얼굴마저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육곡리로 시집와 맺은 인연은 어느새 60여년이 넘어가고 있고, 이제는 이곳이 그녀의 고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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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에, 노노복 부부의 집

▮제2의 인생, 육곡리 최초의 여성 노인회장

누가 노년을 잿빛이라고 말했나? 언제부턴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 말을 이삼에 씨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대소사에 관한 모든 일에 참여하고 있다.

젊어서부터 마을이라면 무엇이든 두 손 두 발 벗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70년대 새마을 운동 때에는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을 하며 솔선수범하여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울타리로 이루어졌던 담장들은 시멘트 담장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또 도로 확장이나 마을 길 넓히는 일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부녀회장 맡으면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고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마을 사람들에게 큰 신임을 얻어 12년씩이나 연임했다. 지금도 육곡리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노인회장을 찾아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2005년 새롭게 생긴 여성노인회에서 회장을 선출할 때에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른 사람은 안 되고 이삼에가 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가 찬성하여 육곡리에서 뿐만 아니라 가야곡면 최초의 여자 노인회장이 됐다.

노인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이미 마을 주민들은 점찍어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 노인회장이라고 해서 회의에 참석하는 일이 있으면 무시하는 일도 있었지만 마을 대표로, 면 대표로 나와 마을을 대변해 당당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말하고 지적한다. 평소 시원시원한 성격 탓으로 사내대장부 같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 그녀는 현재 육곡리의 노인 회장인 동시에 가야곡면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5년 이삼에 씨가 노인회장이 되면서 시작된 소풍은 벌써 3년째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아닌 전통으로 회원들은 이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노인회관 신축할 때에도 이삼에 씨의 노력이 컸다. 회관은 원룸처럼 하나로 되어 있어 누가 들어올까 편하게 누워있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때문에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결국 점점 노인회원들은 회관에서 발길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삼에 씨의 건의로 노인회관을 리모델링하여 화장실을 남ㆍ녀로 구별하여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이삼에 씨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을 주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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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곡리 노인회관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출향인들의 모임인 매봉회 회원들 사이에서도 이삼에 씨는 ‘마음의 어머니’로 통한다. ‘이삼에 씨가 있어 고향을 찾게 되고, 이삼에 씨를 보면 내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그녀는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마을사람들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남은 일생 이곳 육곡리에서 함께하고 싶다.

[정보 제공자]

이삼에(1932년생, 여자노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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