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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인심을 담은 향다실 이종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D0301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경희

❚ 제2의 고향 육곡리와의 인연을 맺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맞은편에는 허름한 건물의 향다실을 볼 수 있다.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에 마치 가정집을 개조한 것과 같아 보이는 다실은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곳으로 1970년경 생겨 오랜 역사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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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다실전경

현재 이곳은 이종숙 씨(59세)가 운영하고 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약 12년을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다. 그녀가 처음 육곡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서울에서 제법 큰 미장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던 그녀는 1985년 7월 육곡리에 살고 있었던 친한 언니의 초대로 이곳에 놀러온 일이 있었다.

도시 여성에게 육곡리는 새로운 세상이었으며 왠지 모를 포근한 엄마의 품처럼 느껴졌다.

이종숙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 논들에 벼가 무릎 위까지 자랐을 때여, 벼가 파릇파릇하고 산에 재잘 거리는 새들까지 너무 좋더라고.”

대도시의 삶에 지쳐있었던 그녀에게 시골의 자연환경과 도시와 다른 생활환경은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왔으며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종숙 씨는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침 이웃으로 살자고 끈질기게 설득하던 육곡리 언니를 믿고 1년 만인 1986년 7월 36살의 나이로 서울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육곡리에 새 삶을 꾸리게 되었다.

❚ 뭘 해도 대박, 돈은 많이 벌었어.

이곳으로 이사를 온 이종숙 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술을 이용하여 미용실을 열었다. 그러나 미용실을 찾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빠글빠글하게 볶는 파마머리만 원하며 그녀의 뛰어난 미용 솜씨를 뽐낼 기회를 주지 않았고,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자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던 미용실은 그녀에게 실망만을 안겨주며 약 3개월 만에 정리하고 말았다. 그 후 시작한 일이 지금도 마을에 남아 있는 ‘초원다방’으로 1986년 12월쯤 처음 문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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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다방

당시는 야촌리왕암리 일대 등에 진주햄, 선진사료 농공단지, 빙그레 등 큰 회사의 건물들이 속속 건설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방을 찾아왔다. 주변에 딱히 차를 마시거나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 장사는 무척 잘되어서 500원이라는 제법 비싼 차 값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찾아 온 손님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그냥 발길을 돌려 돌아갈 정도였다. 당시 육곡리에는 총 7개의 다방이 있었지만 초원다방만큼 손님이 많고 장사가 잘되는 곳은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그녀는 말했다.

“아침부터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어요. 저녁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서 두 배가 되어 있었어요. 그래도 힘든지 모르고 일을 했지요. 이제 앞으로는 그렇게 장사가 잘 될 날은 없을 거야. 힘들어도 너무 즐거웠어요.”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되던 다방 일을 그녀는 약 3년 후인 1989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칼국수 집을 개업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곧 접고 다시 한식 식당을 개업하기에 이르렀는데 종갓집 딸이었던 어머니의 뛰어난 음식 솜씨를 닮아서인지, 운이 따랐는지 새로 시작하는 장사는 늘 잘되었다.

하지만 1995년쯤 가게 건물의 주인이 그 건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종숙 씨는 식당과 육곡리의 살림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때엔 약 10여 년 동안 계속된 타향살이에 지친 무렵이었다.

이종숙 씨는 그때는 그것이 그냥 다 싫었다고 말한다.

“그 때는 진짜 왜 그런지 이곳이 너무 싫더라구요. 그래서 여기 살림을 다 정리한 거지요. 그래서 한 일 년을 서울로 다시 올라 갔어요. 서울에 아빠랑 있는 애들도 너무 보고 싶고 이제는 그 애들 옆에 있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그렇게 약 10년 동안의 육곡리 생활을 정리하고 이종숙 씨는 마을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 잊을 수 없어 다시 찾은 육곡리

그러나 약 1년 후인 1996년 이종숙 씨는 다시 육곡리로 내려왔다. 각박한 도시 생활은 1년도 참기 힘들었고, 평화롭고 조용한 삶과 육곡리 사람들의 사람 냄새나고 따뜻한 인심이 그리워 10여년을 함께한 이웃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과연 다시 돌아간다고 반갑게 반겨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서울의 모든 살림을 정리하여 아예 육곡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이 일 년 동안의 기억은 그녀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곳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돌아온 이종숙 씨는 다시 다방을 할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그 일만큼 제격인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향다실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 향다실은 육곡리에서 최초로 생긴 다실로 마을 사람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심어준 곳이었다. 그녀 또한 이곳을 인수하여 많은 이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남겨 줄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 육곡리의 사랑방 향다실

향다실은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눔터이다. ‘다실’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나 주민들에게 부담 없는 만남의 장소이고 놀이공간이며, 정보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이종숙 씨는 마을을 위한 쉼터로써의 다실의 역할을 자랑한다.

“하다못해 목욕탕을 가려 해도 연무대나 논산 시내로 나가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죠. 마을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공간들이 없어요.”

또한 그녀가 끓이는 차는 맛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향다실은 옛 사랑방과 같은 공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이곳은 자연히 정보 교류의 장이 되기도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누구네 집에서 초상이 나든 잔치를 하든 사방에서 모이니까 아저씨들이 알려줘요. 어떻게 보면 연락장소가 될 수도 있죠.”

향다실에서는 점심시간이면 소박하고 단촐한 밥상을 함께 할 수 있다. 비록 진수성찬의 대단한 밥상은 아니지만 국수를 삶기도 하고, 비빔밥을 준비하여 향다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 한다.

“어차피 나도 점심은 먹어야 하고, 우리 밥하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올 여름은 너무 더워 못했는데 이제 가을이 되고 하면 다시 대접 할 생각이예요.”

이런 일은 꼭 그녀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좋은 취지로 식사를 대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주민들 중에는 반찬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묶은 쌀 등을 나누어 주어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 있도록 한다. 묶은 쌀로 빚은 가래떡은 향다실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겨울철 맛있는 간식이 되곤 한다.

따뜻한 사랑방의 주인장 이종숙 씨에게는 요즘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 향다실이지만 이제는 그만 접고 조그마한 식당을 하나 내는 것이다. 지금 당장 향다실을 그만두고 식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밥집을 운영하며 자신의 솜씨도 보여주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다.

하지만 밥집이든 다실이든 육곡리를 떠날 마음은 없다. 떠나보면 안다고… 한번 등졌던 육곡리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깊어서이다.

[정보 제공자]

이종숙(1950년생, 향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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