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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육곡리 역사 박물관 서승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D030101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경희

❚ 부여서씨 자손으로 태어나다.

육곡리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터줏대감 서승구(81) 씨는 마을의 오랜 대소사를 모두 알고 있으며 부여서씨 문중 일을 맡아 온 만능재주꾼이다. 육곡리와 서승구 씨의 인연은 그의 나이 15살인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옆 마을인 야촌리에서 부여서씨 봉례공파 27대손으로 태어났다. 그가 15살이던 1943년 부모님은 그와 그의 형제 등을 데리고 육곡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어느새 7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을 하는 부모를 도와 함께 농사를 지었고 자신도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님의 삶을 답습하여 농촌의 촌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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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구씨

하지만 그의 일생에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처음 육곡리에 들어왔던 1943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때로 당시 면소재지였던 이곳에는 일본 순사가 상주하며 살고 있었다. 특히 그 일본 순사는 허리춤에 어린아이만한 긴 칼을 차고 다녀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는데 어린 소년이었던 서승구 씨도 순사를 볼 때마다 두려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한 전쟁 막바지였던 시기에 연료가 부족하자 솔가지를 꺾어 모아 기름을 짰는데 이 솔가지 모으는 일을 마을에 전담시켜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산 속을 돌아다녀야 했고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일본이 기름을 못 구하니까 솔괭이를 꺾어다가 기름을 만들려고 그런 거지. 아주 낮이고 밤이고 그거 꺾으러 매봉산으로 태봉산으로 뛰어다니느라 혼났어.”

이 일 뿐만이 아니었다. 집안에 있는 금속이란 금속은 다가져갔는데 심지어 놋쇠 밥그릇과 숟가락까지 가져갈 정도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의 부모님은 당시 구자곡에 있던 심상소학교에 아들을 보내 신지식인으로 키우려 애썼다.

부여서씨라는 양반가문의 후손이란 자긍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촌부처럼 살아도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서승구 씨는 마을에서도 몇 안 되는 소학교 학생이 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어디나 같아서 그 역시 강압적인 일제강점기의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는 11살에 학교를 입학해서 17살에 졸업을 했어. 선생들은 일본인이 세 사람 한국인이 네 사람이었는데 배우는 책은 모조리 일본말이고, 다 일본말로 공부했어. 근데 조선어 책이 한 권 있어서 조선어도 배우고 그랬지만 어디서 함부로 조선말을 할 수 있었나. 그러다 걸리면 아주 혼났지.”

그는 이렇게 일본말로만 교육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아쉬워했다.

교육에 대한 기회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닐 정도로 신지식인의 길을 걸었지만 이후 서승구 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떠한 정규 과정의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 “내가 명줄은 길어.”

서승구 씨가 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삶을 사는 동안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인 1950년 민족에 큰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육곡리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는데 면사무소 앞이 북한군의 퇴각로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서승구 씨도 이런 분위기 속에 26살에 군대에 입대하며 3년 동안 제2국민병으로 복무하였다.

군대에 입대한 서승구 씨는 토벌대로 활동하며 빨치산 즉 공비들을 잡으러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자신의 먼 친척들이 그들의 손에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에 북한군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었다. 당시 마을 사람은 열한 명이 죽고, 집이 73채나 타버렸다.

“내가 약이 오른 거야, 약이.. 내 형님들이 죽었으니.. 그 놈들이 밤에 끌고 가서 죽였어”

하루만 더 산다는 생각을 품고 공비를 잡으러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한 번은 공비의 옷을 입고 주변 마을에 있던 다른 공비들을 유인해 잡기도 하였다. 그때는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몰랐다. “내가 명줄은 길어. 길지… ”

서승구 씨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말로 위험천만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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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구씨

❚ 육곡리 만능재주꾼

전쟁이 끝나고 서승구 씨도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왔다. 논, 밭을 경작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중년의 모습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기도 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서승구 씨는 마을과 부여서씨 문중의 일을 맡아 하기 시작했다.

49살이던 1977년에는 육곡리 이장을 하게 되었는데 물 만난 고기처럼 의욕이 충만하여 여러 가지 일을 만들고 솔선수범했다. 그가 이장직을 맡았을 당시 한 일이 경로당을 증축한 일이다. 손재주도 좋아서 이장이 나서면 못 고치는게 없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그 후 2005년에는 노인회장을 맡은 2년 동안 한 달에 두 번 아침 시간 1시간 동안 마을의 노인들을 모아 마을 곳곳을 청소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힘없고 나이 많은 늙은 노인네들이 뭐 할게 있나 이런 거라도 해야지. 단지 조상을 위해 시작한 거여.. 우리 할아버지니까..”라며 겸손해하셨다.

이 활동으로 논산시에서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마을 일 뿐만 아니라 문중의 대소사를 맡기도 하였다. 부여서씨 종중회장을 20여년 맡아했고, 1968년부터는 행림서원의 관리를 맡아 일 년에 두 번 있는 제향을 잘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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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받고 있는 서승구씨

서원의 운영에서부터 소소한 일들, 행림서원 건물 관리까지 서원과 관련된 모든 일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자랑은 서원 땅이던 작은 논밭을 이용해 지금껏 제법 많은 재산으로 불려놓은 일이다. 몸이 늙어 힘들지만 제향을 하기 위한 음식들을 손수 준비하고 제향일마다 주변을 손수 청소하며 모든 일을 총괄하여 조상을 섬기는 것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

❚ 마을 노인들의 휴식처 장구부동산

육곡2리를 들어서는 길목에는 서승구 씨의 ‘장구부동산’이 자리하고 있다. 낡고 허름한 듯 보이는 이 작은 공간은 서승구 씨의 일터이자 마을 사람들 만남의 장소이다. 점점 늙고 농사일이 힘들어지자 1983년 56세가 되던 해 부동산을 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명을 따 장구라고 이름을 짓고 개원하였다.

서승구 씨는 돈을 벌기 위해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기대가 아주 없겠냐마는 지금은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 특별하게 갈 곳이 없는 자신의 육곡리 친구들을 위한 사랑방으로서 이곳을 경영하고 있다. 이제는 쉽게 문을 닫을 수도 없고 비울 수도 없을 정도이다.

매일 오후 2~3시 정도가 되면 한두 사람씩 모이기 시작하는데, 옆 마을인 야촌리, 강청리 노인도 버스를 타고 온다. 함께 모이면 소소한 게임을 즐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게 이들의 낙이다. 그의 작은 부동산은 노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남의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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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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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부동산에 모인 사람들

[정보 제공자]

서승구(1928년생, 육곡2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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