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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례공파 후손들이 육곡리에 터를 잡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D0201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안경희

서정수에 의해 논산시 가야곡면과 처음 인연을 맺은 부여서씨 봉례공파가 이후에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육곡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어 정확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후손들 사이에서는 처음 두월리, 야촌리 일대에 터를 잡고 살던 선조들이 가문이 번창하고 가세가 부흥하면서 바로 옆 마을이었던 육곡리에까지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봉례공파 부여서씨의 후손들은 점차 주변 지역인 삼전리 일대로 퍼져나가 많은 일화와 유적을 남겨두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조선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까지 전해지니 고적조 덕은당(德恩堂)에 대한 일화이다.

삼전리에서 양촌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삼전리 더운댕이재는 옛날 ‘덕은당’이라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길목에 있던 이 덕은당에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영험하게도 소원이 성취되었는데, 어느 날 부여서씨 서관(徐寬)이라는 사람이 이 고개를 넘는 중에 갑자기 타고 가던 말이 쓰러지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다 죽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당황한 서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성황당이 눈에 들어왔다. 유교경전을 공부하던 유생에게 성황당은 불순한 것이었고, 말이 죽은 것도 그 탓이란 생각이 들어 단단히 화가 난 서관은 죽은 말의 가죽을 벗겨 성황당의 신상에 엎어 씌우고 고개를 넘어가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로 마을에는 흉년이 들고 뜻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등 안 좋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스님이 마침 고개를 지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애잔한 울음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들어보니 기괴한 소리가 시작되는 곳은 성황당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가까이 다가가자 성황당의 성황신이 스님에게 말하길 ‘내가 서진사에게 욕을 당하여 이곳에 있을 수가 없으니 임천 땅으로 옮겨 달라’며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결국 스님은 성황신의 요구대로 그를 임천으로 옮겨 주었고 그 뒤로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렇게 삼전리 일대 등 육곡리 주변 지역에 많은 유적이나 일화를 남겨두었던 부여서씨들이 본격적으로 육곡리에 이거한 것은 만죽헌공 서익(1542~1587)과 그의 아들 서용갑(1567~1620)으로 보인다. 처음 터전을 마련하였던 곳도 지금의 마을 중심인 행정이 아니라 작은 여술로 후손 서각선(79) 씨에 의하면 후손들 사이에는 ‘1694년 화재로 종가집이 불타자, 당시 합천군수였던 서경조가 작은 여술에서 지금의 행정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리고 그때 서익 할아버지의 유품인 옥저가 불에 탔다.’라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서익은 전북 고산에 살다가 만년에 정자를 지으며 은진땅으로 귀향하였던 것인데 그의 아들 서용갑이 19살인 1585년의 일이라 한다. 서용갑의 문집에 실려 있는 ‘전가사시락(田家四時樂)’이라는 5언 고시의 서두에 ‘을유년 가을에 부친께서 상소를 올리고 환향할 때 나 또한 부친을 따라 귀향하여 이곳에 산 지 24년이다.’라는 글귀가 있어 이런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 해주고 있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하여 봉례공파 후손들이 정확하게 어디로 이거하였는가는 논란이 있기는 하나 행림서원과 종가 등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육곡리에 그 중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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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부여서씨 종가

[정보 제공자]

서각선(1930년생, 현 부여서씨 종친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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