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젓갈시장과 함께해온 산증인 2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30104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강경젓갈시장 이 형성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염천리에서 젓갈상점을 운영해온 형제상회 박청수(남, 1939년생, 형제상회 사장) 사장을 만나 염천리의 변천과 젓갈상회의 유래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봉수대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염천리 젓갈상점(형제,함열상회)

염천리의 지명은 예전부터 ‘염정(鹽井)’, ‘염대(鹽臺)’, ‘소금터’라고 불렸었는데, 염정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지명이고, 소금창고가 있었던 이유로 염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염천리 마을

염천리에 젓갈시장이 본격적으로 자리하게 된 시기는 1970년대부터라고 한다. 지금은 서해를 오가는 선박이 금강 하구 군산항에 정박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내륙으로 들어온 어선들이 강경포구에 배를 댔었고, 포구 주변으로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서해안에서 어획한 생선은 강경포구에서 중간 도매상들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강경장은 규모가 매우 큰 수산물 시장으로 대표적인 시장권을 형성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원산과 함께 대표적인 포구였던 강경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포구상업이 번성하였다. 당시 강경시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가까운 주변은 물론 충청 지역 전역에서 장을 보러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도로 교통의 발달로 강경포구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개발 붐이 일면서 가장 먼저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곳곳에 국도가 개통됨에 따라 뱃길 교역에 의존하던 포구의 경기는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강경에는 젓갈시장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강경은 원래 수산물을 주로 하여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젓갈상점은 4~5집 정도 뿐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수산물 시장이 축소되면서 젓갈을 주로 판매하는 것으로 모양새가 바뀌게 되었고, 1970년대 말부터는 전문적인 젓갈시장으로 변화되었다. 지금은 염천리를 중심으로 강경읍 일원에 약 100여개 이상의 젓갈상회가 운영되고 있다.

박청수 사장도 젓갈상회가 영업을 시작한 초창기인 1970년대 초반부터 젓갈상회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염천리에 초창기부터 젓갈상회를 운영해온 상점은 현재 3곳뿐이다. 대부분의 젓갈상점들은 나중에 문을 열었거나 외지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초창기부터 젓갈상회를 시작했던 얼마 되지 않던 사람들은 세월의 흐름으로 연로하게 되었거나 상점 운영을 그만두거나 또는 사망하여 현재는 3집만 남아 있다.

한편 현재 박청수 사장의 주택이 위치하고 있는 옥녀봉 일대는 일제강점기까지 명당이라 하여 변호사의 주택이나 은행 직원의 관사, 그리고 부잣집이 주로 위치하였다. 당시 강경읍 내에서 크고 잘 지어진 주택들이 바로 이 옥녀봉 일대에 주로 자리하였다.

이렇게 옥녀봉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강경포구염천리 지역은 일제강점기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의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고, 따라서 일본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일자리 제공 면에서 강경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나이든 강경의 사람들은 일본인들에 대하여 적대감보다는 오히려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전국적으로 일제나 일본인에 대한 항일 또는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대적 분위기에 비해서 조금은 특이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정보 제공자]

박청수(남, 1939년생, 형제상회 사장)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