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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의 노동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301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1970년대 강경포구에서 부두노동일을 하였던 이병순(남, 1931년생, 중앙리 주민) 할아버지로부터 약 10여 년간 포구에서 부두노동자로 일을 하였던 오래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병순 할아버지는 지금부터 약 40년 전인 38세에 부여군 양화면에서 강경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강경으로 이주했던 38세부터 강경포구가 쇠락해져서 포구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48세까지 약 10여 년간 포구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이후 부두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나서 강경 양조장에서 20여 년간 일하였다.

할아버지가 부두노동자로 한창 일을 하던 1970년대 당시 강경포구에는 군산노동조합 강경지부가 설치 운영되었고, 노동조합지부장(노동조합장)으로 김유득이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강경포구의 노동조합은 1조에서 12조까지 각 조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한개 조의 조원은 10~15명까지로 총 150명 이상의 노동조합원이 포구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였다.

1970년대 당시 강경포구에서는 포구에 고기를 가득 실은 배가 들어오면 큰돈을 굴리던 객주가 선주에게 선불로 배에 실려 있는 전체 상품에 대한 금액을 먼저 지불했다. 이렇게 객주가 선금을 지불하여 배에 실려 있는 상품에 대한 판매권을 잡아놓은 뒤, 배가 들어오는 순서에 맞추어 배정된 노동조합의 각 조원들이 배에 올라가 생선이나 기타 상품을 하역과 운반 하게 된다. 그리고 배에서 내린 상품 등을 수산시장에서 경매를 통해 소상인에게 넘기고 객주는 그 수익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부두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배에서 물건을 내리거나 부두나 수산시장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을 하고 그 노임을 받았던 것이다.

강경포구 가 번성하였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통 하루에 180여척에서 200여척까지 어선이 들어오기 때문에 수많은 조합원들이 부두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또한 많은 상인들이 강경포구에서 활동하였고, 당시 객주도 약 10여명 이상이 활동하였다.

이렇듯 강경포구의 상업시장으로서의 활발한 모습은 1970년대 말 군산하구언둑이 건설되면서 강물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어선이 강경포구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그 때부터 강경포구가 쇠퇴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강경에서 군산까지 작은 여객선이 운행되었다. ‘행운호’와 ‘모견호’로 기억되는 이 여객선들은 40~50명 정도의 승객과 약간의 물건을 싣고 하루에 2회 왕복 운행하였다. 강경으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강경으로 장을 보러오는 금강 하류지역의 승객들이 주로 여객선을 이용하였다.

[정보 제공자]

이병순(남, 1931년생, 중앙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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