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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에 울려 퍼진 만세 함성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10401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 강경의 1차 만세운동

1919년 3월 10일의 제1차 옥녀봉 만세운동은 강경읍의 장날인 오후 3시경 엄창섭(嚴昌燮)이 주도하여 500여 명의 군중이 강경의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하산하여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정통(本町通)을 경유하여 강경시장을 일주하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날이 일본의 육군기념일이라 재향군인과 소방조를 동원하여 주동인물들을 체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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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

엄창섭은 1919년 3월 5일 전라도 익산군 웅포면 대붕리에서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 강금옥(姜今玉)으로부터 독립운동의 권유를 받고 이에 찬동하여 3월 6~7일경 본인이 교편을 잡고 있던 부여군 세도면의 사립 창영(昌永)학교에서 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과 10일 강경 장날에 모여든 군중과 강경에 거주하는 청년 등 다수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권유하여 독립운동을 하도록 결의하였다. 그리고 8일경에 강경읍에서 태극기 제작에 필요한 종이 60매와 물감 30전 분량을 구입하여 고상준·추병갑과 함께 세 사람이 창영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태극기 제작에 일이 많아 9일 김종갑(金鍾甲)·추성배(秋聖培) 등에게 협조를 받아 10일 아침까지 200본을 만들었다. 엄창섭의 부탁을 받은 서삼종(徐三鍾)은 태극기를 가마니에 넣어 옥녀봉으로 운반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강경읍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여 이에 정기섭(鄭沂燮)한규섭(韓圭燮) 등이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엄창섭·추병갑·강세형·윤동만·정기섭·서삼종은 10일 오후 3시경 옥녀봉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옥녀봉을 내려와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정통(本町通)을 경유하여 상시장에 도착하였을 때 장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 명이 되었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엄창섭은 징역 2년, 고상준추병갑은 각각 징역 1년, 강세형·윤동만·정기섭은 각각 징역 8월, 김종갑·추성배는 각각 징역 6월, 서삼종·한규섭은 각각 태형 90의 형을 받았다.

3월 10일 1차 만세운동이 있은 후 3월 12일 강경읍 내에서는 ‘결사대(決死隊)’라는 단체가 조직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주동자 17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한편 곽성진(郭性鎭) 등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우들과 같이 서울 탑동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인 강경으로 내려와 석광렬·박금봉·강세형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모의하다가, 3월 10일 엄창섭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강경의 2차 만세운동

3월 10일 1차 옥녀봉 만세운동이 있은 후 3월 15일 장날 다시 거사하려다가 태극기 55매를 압수당하였고, 19일에는 군중들이 거사하려는 징조가 보이자 일본군은 광주에서 사병 8명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은 후 제2차 옥녀봉 만세운동이 3월 20일 오후 5시경에 발생하였다.

주동자 이근석(李根奭)송재기(宋在紀), 이봉세(李鳳世). 이근오(李根五) 등과 같이 3월 20일 강경 장날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하고 태극기 360본을 제작하였다. 20일 송재기, 이근석이봉세, 이근오와 함께 오후 5시경 옥녀봉에 모여든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 군중들이 강경 상시장을 거쳐 서정(西町) 방면으로 진행할 때에는 장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 명이나 되었고, 만세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고 한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경과 헌병들은 시위 군중들을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주동자들을 체포하였고, 이때 태극기 346개를 압수당하였다.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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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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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옆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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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뒷면)

❚ 강경시내 상점철시운동과 4월 이후 만세운동

이러한 옥녀봉에서의 만세시위뿐만 아니고 강경읍 내에서는 3월 31일 문상희(文商羲)의 활약으로 300여 호의 한국인 상점이 철시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식을 표출하였다.

문상희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먼저 문서출판으로 민심을 계몽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고, 1919년 3월 6일과 7일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운동을 권유하는 취지문서 약 100매와 시위운동으로 상점을 폐쇄하기를 권유하는 「철전(綴廛)문제」라는 문서 수십 통을 강경읍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집에 돌렸다.

3월 31일부터 강경읍 내의 한국인 상점 약 300여 호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당황하여 문을 닫은 상점들을 찾아다니며 문을 열 것을 협박하였다.

4월 1일 새벽에는 일본인의 유력한 상점에 방화의 움직임이 있었고, 4월 1일 철시중의 강경에 또다시 1천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4월 4일 강경읍에서는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4일 5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찰들이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들이 몽둥이 등으로 일본 경찰과 대항하니 일본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이충규 등 3명이 적의 흉탄으로 사망하였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 강경 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1924년 10월 강경 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에 인솔되었다. 인솔될 아동 중에서 기독교도 아동인 약 26명이 결석을 하였고, 인솔에 참가한 약 40명도 배례를 거부하였다.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김복희 선생은 면직 당하였고, 학생들도 여러 명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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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초등학교 강당

이에 대해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는 학교장 앞으로 질문서를 제출하였고, 후에 사이토 총독에게도 진술서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서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18일과 19일에 걸쳐 사설에 「강제 참배문제」를 다음과 같이 게재하기도 하였다.

「경기도 학무국장은 신사가 이냐 아니냐 함에 대하여는 일본 의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때에도 종교가 아니라 일본 조상을 숭배하는 기관이라고 하였으니, 아이들이 듣지 아니하더라도 부모에게 효성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효성을 다하라고 말을 하는 것처럼 강제라도 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중략) 조선인 아동이 그 일본인 신사에 대하여 어찌 일본인이 가지고 숭배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어찌 가지기를 바라리요. (중략) 만일 일본인 아동에게 조선인 조상의 묘에서 신사에 대한 감정으로 참배하라고 하면 상식 있는 사람이 소위 조선인 동화정책을 비웃는 것 이상으로 비웃으면서 반박할 것이다. (중략) 강제 숭배는 폭행이다. 그리하여 무슨 효과를 얻고자 하는가? (중략) ‘조선인의 민족성을 존중’하여 주는 교육 방침인가? 양심 있는 총독부 당국자라면 이에 대한 답이 있을 줄로 믿는다.」

이 사설은 신사참배 강제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면서 논리 정연하고 상당히 엄중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의식의 저변에는 강경 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표출된 강경민의 강한 항일정신이 내재해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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