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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시장의 형성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103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18세기 강경은 옥녀봉의 동남면에 중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시가지 깊숙이 곡류하는 강경천을 이용한 수운교역이 활발하였다. 인구의 증가와 시장의 활성화에 따른 취락의 확장은 옥녀봉 동쪽 습지를 매립하여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주요 교통, 운송수단이 주로 수운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도로 개설은 미비하였다. 도로망은 현재의 서창리에서 홍교리 사이에 1간 폭의 도로가 있었다.

시가지 중앙을 곡류하는 강경천은 수운교통의 이점도 있었지만 여름철에는 홍수로 인한 범람으로 가옥피해도 컸다.

19세기 말에는 수운교통의 발달에 따라 배가 접안하기 쉬운 옥녀봉 기슭 강경천 연변으로 시가지 중심이 이동했다. 옥녀봉 아래 외항과 강경천 하안의 내항이 있어 수륙간의 상품거래를 맡아했고, 두 개의 항을 연결하는 강경천변으로는 소금창고, 곡물상 등이 있어 무역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옥녀봉에 인접한 동쪽에는 상시장이 그 남쪽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하시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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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장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반세기 동안 성어기인 3~6월 어획기 강경의 선착장에는 100여 척의 어선이 정박했고, 충남을 비롯하여 충북·전북·경기의 이름 있는 상인들이 하루에 2~3만 명씩 생선을 사기 위해 몰려들어 여관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각종 수산물이 강경으로 집산되자 거래되고 남은 물량은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법과 수산가공법도 따라서 발달했고, 새우젓 등 젓갈류의 국내 최대 공급시장으로 번성했다.

강경의 상권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22개 군에 달했다. 1911년 강경시장의 개시일에는 점포수가 평균 900개, 출시인원은 평균 7천 명이었으며 가장 성황을 이룰 때는 추석 전과 설 초로 1만 5천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시장액(市場額)만도 1년간 200만원에 달하는 전국적인 규모였다. 거래품목은 수산물, 곡물류 이외에도 각종 식료품, 면포, 면방직, 도기 철기류 기타 일상생활 필수품 등이었다.

1910년 강경은 3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옥녀봉에서 남동 방향으로 강경천을 따라 발달되어 있는 중심부이고, 두 번째는 금강 하류 남방의 황산벌 하항이고, 세 번째는 도심 중심부의 남방에 위치한 상강경이다. 이때까지도 여름철이 되면 하천은 자주 범람했으며, 집중호우일 경우 취락은 3개의 섬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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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경포구 사진3

1915년경에는 도심부가 발달되면서 강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시장과 하시장을 연결하는 도심과 황산의 취락이다. 두 시가 사이는 모두 밭이었고, 중간 위치인 강경역 부근에는 취락이 없었다. 옥녀봉 동쪽 서창리, 중앙리 일대가 강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내항의 연변부인 서창리, 염천리 일대에는 공산품을 수용하는 대형 창고를 가진 일본인들이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으며 수산물만 거래하는 한국인도 다수 있었다. 또한 홍교리중앙리에는 소매를 겸한 도매상의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고 한국인도 있었으나 대부분 영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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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리 전경

1920년경에 그동안 1907년부터 꾸준히 실시된 도로 개수사업으로 현재와 비슷한 도로망을 구비하게 되었다. 또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강경천에 대규모 제방을 쌓고 강경역 부근의 저습지를 매립하여 개발해 갔으며, 그 부근에 전기회사, 부강사, 공회당 등이 들어서서 논산으로 연결되는 도로 주변이 시가지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시가지 정비 사업으로 현재와 거의 비슷한 강경의 모습이 완비되었다.

강경천 제방공사는 1922년 5월 착공하여 1924년 11월에 완공을 보았으며 공사비는 총 133,525원이 소비되었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강경 지역에 총 45개소의 수리시설과 제방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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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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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과 옥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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