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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의 관문 포구와 갑문시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C0103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내수

일제강점기의 강경포구는 경제수탈의 관문이었다. 1920년대 초 강경은 금강 수운에 의한 내륙으로의 상품이동은 거의 중단된 상태였고, 강경장도 퇴락해갔지만, 포구는 일본의 농수산물 수탈 전진기지로 바뀌어 계속 이용되었다. 충청도와 내륙지방의 쌀과 면화는 뱃길과 철길을 통해서 빠르게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일본인들은 강경시내 5곳에 대형 도정공장을 세우고 논산평야·강경평야는 물론 중부지방과 호남평야에서 충청도와 내륙지방에서 수확한 쌀을 집하해서 도정한 후 일본으로 보내는 관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제는 강제착취라는 인상을 흐리기 위해 강경에서 1차 도정한 후 배편으로 군산으로 보낸 뒤, 다시 대형화물선으로 옮겨 싣는 수탈행위를 해왔다.

일제는 이처럼 강경을 쌀의 집산지로 육성할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1924년에는 상수도 공사를 완성하였고 각종 시가지 확충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강경은 쌀의 집산과 수산물의 거래를 중심으로 면모를 유지하였다. 1926년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총 1,497만 섬이었는데, 일제는 그 중 36.3%인 544만 섬을 자기 나라로 수탈해 갔다. 544만 섬 가운데 25.2%에 해당하는 137만 3천여 섬이 금강 수로의 강경을 통해 군산에서 선적하여 일본으로 수송되었다.

일제는 강경을 농어물 수탈지로서 육성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이미 1915년 2월 현미와 콩을 검사하는 곡물검사소를 설치하였고, 1924년 5월 총공사비 365,000원을 들여 상수도 공사를 완성하는 등 각종 시가지 확충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강경이 포구를 중심으로 번성하자 일제는 어선과 교역선을 보호하고 수산물의 하역을 돕는다는 구실로 제방을 쌓고 갑문시설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말로만 어민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내륙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용이하게 한 것이었다. 1924년 10월 강경 갑문이 완공되고부터 하역작업이 쉬워지고 강경은 홍수 피해의 불안을 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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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문시설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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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문시설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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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문시설(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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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문시설(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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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문시설(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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