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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만이 살 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A0201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 가난한 시골 사람들

시묘리의 네 마을은 농경지가 적당하게 있어 밭을 갈아먹던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촌도 아니었다. 지주라고 해봤자 백석지기인 방씨네가 있었을 뿐, 대부분 그럭저럭 좁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았다. 매년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쳤고 그때마다 마을 동계나 동네 지주로부터 장례쌀을 빌려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마을재산은 정월에 풍장을 치며 집집마다 걸립을 하고 쌀이나 돈을 걷으면 그것을 모았던 정도로 많은 양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농사지어 남는 게 없을 만큼 일본인들이 싹싹 긁어 모아 가버렸기 때문에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현재 마을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에 10세 전후의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왜놈에게 부대끼는 것도 힘든데 먹을 것까지 뺏어가더라” 라고 한숨을 토할 만큼 잊혀지지 않는 고생이었다. 그때엔 굶기를 밥먹듯 했고, 깻물이나 쌀겨를 모아 국을 끓여 먹었다. 흰 쌀밥은 제사 때에나 구경하는 것이었다. 청년들은 징용이니 징병이니 하며 끌려갔는데 대부분 다행히도 해방 후에 돌아왔다.

❚ 자식 가르치는 것만이 살길이다.

1920년대 초반 시묘리 사람들은 평범한 농부들이었지만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유난히도 교육열이 높아서 사는 수준이 어떻든 모두 자식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도 자식을 가르치는 데에는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부수골에는 서당이 생겨서 훈장인 박연진 씨가 아이들에게 천자문 등의 한문을 가르쳤다. 학교에 진학하기 전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이곳에서 한문을 익혔고, 초등학교가 너무 멀어 못가거나, 학교에 갈 형편이 안되는 아이들도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연무읍 마산리에 있던 구자곡초등학교까지의 거리가 4㎞였지만 많은 아이들이 걸어다니며 학교를 통학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해방 무렵에 시묘골 그 작은 동네에 교복을 입고다니는 남학생이 무려 1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 개 면에서 배출하는 고등학생이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교육열은 그 전통이 이어져서 1990년대 중반의 경우 70여호가 살던 시묘골에서 대학생이 12명이었다고 하니 놀라운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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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구자곡초등학교

❚ 시묘초등학교의 건립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아 가면서 시묘리도 급속하게 발전해나갔다. 면사무소에서 가까운 동네이긴 했지만 그래도 생활환경이 편리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초등학교가 멀어서 아이들이 고생을 했는데, 시묘리에서 구자곡초등학교, 가야곡초등학교, 은진초등학교가 모두 각각 4㎞ 거리에 있었다. 한 군데 학교라도 그보다 가까웠다면 동네에 학교를 세울 생각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시묘골의 최재현 씨는 군청에서 근무하면서 행정 정보를 빨리 접할 수 있었는데 1962년에 학교 설립 규정이 바뀐 것을 알고는 고향마을에 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즉 사방 4㎞ 내에 학교가 없을 경우 학교를 세울 수 있다는 규정이 생긴 것이었다. 그는 당장 시묘 1, 2, 3리 사람들을 소집하여 학교 설립을 논의하였고 모두가 찬성하자 당장 집집마다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걷었다. 그리고 학교 설립부지를 물색해 본 결과 길가에 있는 땅이 적격지로 보여 땅 주인이었던 김완수 씨와 방노근 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선뜻 내놓을 수가 없었지만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부탁을 하자 결국 수락하여 동네에서는 이들로부터 각각 1천평씩 총 2천평을 매입할 수 있었다. 학교를 짓기 위해 땅의 모양을 보니 2천평 땅 옆의 작은 동산이 학교부지에 포함되어야 했다. 그 땅은 가야곡면 종연리(鍾淵里)의 이씨집안 종산이었다. 최재현 씨와 주민들이 이씨가를 찾아가 학교 설립의 의지를 밝혔고 이씨집안에서는 흔쾌히 땅을 내놓았다. 당시 쌀 7가마에 종산을 내주었으니 희사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련한 7백평의 동산에 교사를 짓고, 1500평은 운동장으로, 그리고 500평은 농장을 조성하여 시묘국민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첫 번째 입학생이 2개반에 이를 정도였다.

❚ ‘대학 나무’라 불리운 딸기나무

시묘리 사람들의 교육열을 충족할 수 있었던 데에는 딸기재배가 큰 몫을 했다. 딸기를 이른바 ‘대학나무’라 부를 정도로 딸기를 키우면 자식을 대학보내고도 남을 만큼 수익이 좋았다. 논산딸기가 본격적으로 붐을 이루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이미 작목반마다 트럭 1~2대를 소유했을 정도였다. 당시 한 가족이 1년간 딸기를 키워 팔면 보통 쌀 백가마의 수익을 얻었다. 딸기 4관(12㎏) 또는 8관을 ‘한 다라’라고 불렀는데, 4관짜리 한 다라는 쌀 한 가마 두 말 값에 팔렸다. 같은 너비의 땅을 경작한다고 쳤을 때 벼농사에 비해 서너배 더 많은 수입이 들어왔으므로 당시 시묘리 사람들은 새집을 짓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며 호황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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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하우스 전경

그러나 모든 사람이 딸기농사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딸기 작물의 특성상 한번 실수를 하면 모조리 죽어버리기 때문에 한해 농사를 한번에 망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묘 사람들은 딸기와 함께 다른 작물을 농사지으며 혹시나 있을 사고를 대비한다.

[정보 제공자]

나재완, (1933년생, 시묘4리 이장)

최재현, (1928년생, 시묘1리 주민)

황의철, (시묘4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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