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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터줏대감 합천이씨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A010203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 합천이씨가 터 잡은 사연

시묘리라는 지명은 시묘살이를 한 효자가 살았던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묘살이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룬 다음 그 묘 앞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지키는 행위를 이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시묘살이는 아무리 대단한 효자라 해도 직접 실행하기 힘든 어려운 일이다.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시대에도 시묘살이를 한 효자에게는 국가가 직접 포상을 내릴 만큼 시묘살이는 보기 드문 효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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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1리 전경

동네 이름이 시묘리가 될 만큼 극진한 효를 행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시묘리에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시묘골과 부수골에서는 효자 지(池)씨라고도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에 합천이씨 가(家)의 이인지(李仁之)라고 추측된다.

합천이씨는 시묘골과 황골에서 오랜 세월 대대로 살아온 성씨이다. 동네와 인접한 가야곡면 야촌리에도 일가가 여러 세대 거주하고 있다. 합천이씨가 은진 땅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조선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으로 세상을 등지고 두문동에 은둔했던 충신들이 있었다.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 하는데 당시 합천이씨 이춘계(李春啓)는 이들과 뜻을 같이 하였으나 절친했던 태조의 아들 이방원과의 인연으로 결국 혼자만 공주 무수골(현재의 대전시 보문산 아래 무수동)로 돌아와 은둔하였다.

그 후 이춘계의 증손자 이맹근(李孟根, 1455~?)이 말년에 지금의 논산시 남쪽 은진 고을 오동리에서 머물렀다 하는데 오동리는 현재의 가야곡면 야촌리시묘리의 옆 동네이다. 어떤 인연으로 공주에서 은진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맹근의 아버지인 이인상(李麟祥)의 묘가 시묘리에 있다고 하나 이인상 때 이미 은진에 와 있던 것인지, 이맹근이 아버지의 묘를 자신이 살고 있는 은진에 쓴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아마도 조선 초기 이춘계가 공주에 은둔했다는 것으로 보아 공주와 주변 지역 일대에 근거지가 마련되어 있었던 듯하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방원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춘계라는 인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의 몇 대조 할아버지가 처음 우리 동네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할 때에 우연한 기회에 살기 좋은 동네를 발견하고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현대화된 세상에서도 아무런 인연 없는 곳에 갑자기 살게 되는 일은 흔치 않으며 쉽지도 않은 일이거니와 하물며 전통시대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인가. 그것도 상류층인 양반사족이 말이다.

1400년대 초에 합천이씨 이춘계가 공주에 오게 된 것도, 그의 자손들이 은진 땅에 터를 잡게 된 것도 모두 분명히 어떤 인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서 추측할 만한 것은 합천이씨 집안이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공주와 은진 일대에 소유지를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공주나 은진에 외가, 처가 등이 있었을 가능성이다. 이러한 가정을 확인할 바는 없지만 당시의 사족가문들이 그렇게 살았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맹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인지(李仁之), 이의지(李義之), 이예지(李禮之)로 이중 장남인 이인지에서 합천이씨 은진파(恩津派)가 비롯되었다. 이인지는 통훈대부 정삼품의 고위관료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가 황골 분토동에 남아있고, 묘비에는 효행록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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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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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지의 묘

이인지의 자손들은 시묘리, 야촌리 등에 흩어져 살았다. 이인지가 1500년대 후반 사람이므로 지금까지 500여 년 간 대대로 시묘리에 살아온 것이니 시묘리의 터줏대감이라 할 만하다. 해방무렵부터 외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시묘리는 각성바지 마을이 되었지만 지금도 시묘골과 황골에는 합천이씨가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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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이씨가 터 잡은 황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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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촌리 마을 전경

❚ 이상문 씨의 기억

시묘리는 한말까지 은진현의 구자곡면과 죽본면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이 두 곳 모두에서 손에 꼽히는 집안이 합천이씨였다. 이상문 씨(79, 남)는 현재 시묘2리 황골에 거주하는 합천이씨가의 사람으로 청년기에 해방을 맞이하며 굴곡이 많은 역사를 겪어낸 시골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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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씨

그의 기억 속에는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가세가 기울고 좌우익 갈등으로 집안사람들끼리 큰 일을 겪을 뻔 했던 일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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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씨 댁

이상문 씨는 유복한 집안의 도련님이었다. 그의 조부가 자수성가하여 큰 부를 축적하여 당시 도지 5백석을 받는 사람이 구자곡면에서 단 다섯 집에 불과하던 시절 그 중 한 집으로 꼽혔다. 이상문 씨 집은 황골과 시묘리 일대에 25마지기가 넘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안의 여유로움 덕분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교육을 잘 받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1949년 6월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인 은진학교에 배치되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발발 1년 전이었다.

당시 이미 한국사회는 좌우사상 대립으로 혼란한 상태였고 은진면의 상황 역시 좋지 않았다. 건국 초기 제1공화국(이승만 정권)때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모두 잃게되어 가세가 기울었고, 설상가상 6·25 한국전쟁 무렵에는 지주 가문 출신에 공무원인 교육자 신분이었으므로 인공치하에서 당연히 부르조아 계층으로 취급되어 목숨이 위태로웠을 뿐만 아니라 토지분배 정책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집안의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아비저는 지주인데다 건국 초기 구자곡면의 독립촉성회를 책임지고 있었고, 학교 후원회장을 맡는 등 지역의 유지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인공 치하에서 숙청대상자 지목되어 치안대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끌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구자곡면 치안대의 총무였던 최모 씨가 이상문 씨의 학교 선배로 각별한 사이에 있었던 덕분에 아버지에게 인공에 적극 협조한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방면시켜 준 것이었다. 당시 함께 연행되었던 이들은 모두 대전형무소에 끌려가 9·28 수복 때에 학살되었고 하니, 당시 아버지를 풀어준 동료는 은인 중에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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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골앞산

25마지기가 넘던 땅이 동네 사람들에게 분배되고 댓 마지기 정도만 집안의 몫으로 주어졌다. 이제껏 직접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던 가족들이었으므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때 수년간 집안의 머슴으로 일했던 서모 씨는 인민위원장을 찾아가 자신에게도 땅을 나누어 달라고 항변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이씨 집안에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래도 가족처럼 지내던 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서씨는 땅의 권리를 주장한 끝에 5마지기 정도의 땅을 분배받고는 집으로 찾아와서 어른들을 모셔놓고 그러한 행동이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때 서씨는 사랑방에 앉아 “오늘 있던 일은 내가 논을 차지하려는 게 아니고 논 다 빼앗기면 어쩌시려구요. 한 마지기라도 남게 하려고 벌인 짓이니 아무 말씀 마시고 계셔요.”라 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평생 이 집안 일꾼으로 살아온 자신이 어떻게 주인집의 땅을 빼앗겠느냐며 지금까지 했던 대로 일하고 함께 지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 머슴이었던 서씨와는 더욱 정이 깊어져 가족처럼 동기간처럼 지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은인은 이상문 씨의 고향선배였다. 어느 날 이상문 씨는 길을 가다 죽창을 들고 있는 고향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진작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배우고 인민군 조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길에서 이상문 씨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어려운 상황을 전했다.

이상문 씨 부자가 숙청대상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이라도 피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당신을 도왔으니, 나중에 세상이 바뀌게 되거든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이상문 씨는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앞산으로 피신했다. 닷새동안 낮에는 굴 속에 숨어들고 밤에는 고구마를 캐서 허기를 달랬다. 그의 참담했던 기억속에는 극성을 부리던 깔다귀와 모기떼가 있다.

멀리서 총성이 울리고 전차소리가 들리더니 군산에 상륙한 유엔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래도 겁이 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논산 시내로 나가보니 태극기와 유엔기가 함께 휘날리고 만세소리가 진동했다. 악몽같던 인민공화국의 막이 내린 것이다.

그러나 9·28 수복으로 세상이 바뀌자 이번에는 거꾸로 인민위원회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모조리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과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줬던 동료와 선배도 위험했고 같은 집안사람끼리 원수가 될 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시 그들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섰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노라고, 그저 배운 게 없고 두려워서 인민군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강력하게 변호하여 결국 모두 무사하게 살아남았다. 칼날의 끝을 걷는 듯 위태롭던 시절에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게 해 준 것은 이웃 간의 깊은 정, 그 바로 그것 하나였다.

[정보 제공자]

이상문, (1929년생, 시묘2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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