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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274
한자 尙震
영어음역 Sang Jin
이칭/별칭 기부(起夫),범허당(泛虛堂),향일당(嚮日堂),송현(松峴),성안(成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남도 논산시
성별
생년 1493년연표보기
몰년 1564년연표보기
본관 목천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향일당(嚮日堂)·범허재(泛虛齋). 할아버지는 우후(虞侯) 상효충(尙孝忠), 아버지는 찰방(察訪) 상보(尙甫), 어머니는 박사(博士) 김휘(金徽)의 딸로서 연안김씨(延安金氏)이다.

[활동사항]

상진은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세가 되어도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말 달리고 활쏘기만 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자 이에 분발하여 학업에 힘썼다.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곧이어 봉교, 예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에 특진되었다. 1528년 사헌부장령 재직 시 영경전(永慶殿)에서 거행된 세자의 친제(親祭)에 질병으로 불참했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그 뒤 다시 장령·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할 것과 농촌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1533년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 부제학·좌부승지를 역임하면서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을 지내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다.

1539년 중종의 특명으로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전례가 없는 특진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한성부좌윤으로 체직되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을 연임하고 154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을 총괄하였다.

중종의 신임을 얻어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의 탄핵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체직되었다. 곧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윤원로(尹元老)와 결탁했다 하여 인종 즉위와 함께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8년(명종 3) 우찬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이듬해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의 추천으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이기·심연원(沈連源) 등과 더불어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주장한 양종(兩宗) 설립에 온건론을 펴서 유생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 밖에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해 민원을 살피기도 하였다. 1551년 좌의정에 올랐고, 1558년 영의정이 되어 5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였다.

상진은 외모는 우둔한 듯 보였으나 마음은 아주 꿋꿋하였으며, 항상 도량과 덕성을 넓히기에 힘썼다. 만년에 송현에 살 때 혹시 임금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가면 의관을 갖추고 중문 밖에 엎드리곤 하였다. 상진의 부인이 이왕이면 외문 밖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외문 밖에 엎드리면 사람들에게 이름이 팔릴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한다. 청렴하고 관후 인자한 명상(名相)으로서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으나, 만년에는 윤원형·이기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참고문헌]
  • 『논산군지』 (논산군지편찬위원회, 1994)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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