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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013
한자 李森將軍墓所
영어의미역 Grave of General Yi Sam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535[계룡산로297번길 6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묘소
건립시기/일시 조선 후기
소유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 535[계룡산로297번길 66]지도보기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석종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이삼의 묘소.

[개설]

이삼은 감역을 지낸 이사길의 아들로 자는 위백이다. 1677년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나 1735년 59세로 사망하였다. 윤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0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대장을 거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함은군에 봉해졌다.

[위치]

논산시에서 공주 계룡산 서쪽에 있는 신원사 앞으로 나 있는 지방도 691호선을 따라가다가 주내사거리를 지나 얕은 고갯길을 내려서면 북쪽으로 석종리 이정표와 이삼 장군 묘소 표지판이 보인다. 마을로 들어서면 작은 산록에 이삼 장군 묘소가 있다.

[형태]

이삼 장군 묘소는 큰 봉분과 석등, 무인석과 묘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묘제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묘 주변에는 수백 년 묵은 적송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묘역 옆에 왕이 직접 쓴 ‘백일헌’이라는 현액을 건 영정각이 자리 잡고 있다. 묘표는 작은 묘비 형식을 지니고 있다. 농대석 위에는 오석의 비신을 세워놓았고 약식화된 가첨석을 얹어놓았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57㎝, 폭 24㎝이다. 앞면에 묘표를 큰 글자로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기고 삼면에 음기를 새겨 넣었다.

[금석문]

앞면에는 “유명조선국대사마대장군함은군증좌찬성판의금부원군이공삼묘/ 증 정경부인 진주유씨 부좌/ 정경부인 순천장씨 부우”라고 되어 있다. 음기는 다음과 같다.

“증좌찬성겸판의금부사함은부원군행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병조판서함은군증시□□이공 묘표/ 공의 이름은 이요, 자는 원백이요, 함평인이니, 숙종 정사 정월 6일에 태어났다. 소년시절 명재 윤선생에게 수학했는데, 선생이 공의 절구 시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수와 재상의 기개가 있다’고 하며, 당나라 시에 있는 ‘병위삼’이란 구절의 뜻을 인용하여 이름을 삼이라 지어주었다. 김공 구가 공이 담력과 지략이 뛰어남을 보고하여 음직으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계미년 봄에 숙종께서 친히 활터에 가서 살펴볼 때, 공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므로, 용수를 쏘아보라고 명하니 다섯 번 쏘아 다섯 번 맞추거늘, 왕이 크게 기뻐하고 곧 전시에 나가보라고 명하고, 직접 표범 가죽을 하사하고, 격려함이 심히 진지하였다. 이때부터 날마다 손에는 활깍지를 항상 끼고, 입에는 국을 대지 않으며 말하기를, ‘손이 둔하면 능히 활을 쏘지 못하며, 몸이 살이 찌면 능히 날쌔지 못하다’라며,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기로 스스로 다짐하였다.

외직으로는 창원, 장단, 통진, 수원부사와 정주, 양주목사와 호남좌수사와 영좌, 호서, 남관, 서관병사를 역임하였다. 내직으로는 선전관, 도총부경력, 훈련정, 내금장, 금군별장, 포도대장, 한성좌우윤, 형조참판, 총융사, 어영훈련대장, 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 함은군으로 봉하고, 판윤, 병조, 공조판서, 충훈부 유사당상겸비변사당상을 특진하였다.

임인년에 공이 관직에 있을 때, 조정에서 공을 장하게 여겨 이름을 단서에 올리니, 힘써 사양하여 열세 번 단서패를 되돌리고 그만두었다. 무신년에 첫째로 세용을 체포하여 먼저 적의 기세를 빼앗고 보니, 관에서 군표를 발행하여 서쪽 병정을 징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전관을 중도에서 멈추게 하고, 조정에 들어가 아뢰기를, ‘이번 적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므로, 관군만으로도 충분히 박멸할 수 있는데, 해서 지방의 병졸을 징집하면 양서 지방이 동요하여, 필경에는 삼남 지방이 소란하여 평온치 못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경이 아니면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하고 징집하지 말라고 하명하고, 공을 부르고 조풍릉을 보내며 또 명하기를 더불어 일을 계획하는데, 왕이 손바닥에 한 두어 자를 써서 은밀히 공에게 보이니, 공이 바로 받아 적어서 글로써 대담하니, ‘성적금치’, ‘상당소병’과 같은 것들이었다. 오 순무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이 공을 꺼려하여 감히 서울로 곧장 가지 못한다.’ 하였다.

왕이 직접 성문에 가서, 적의 머리 벤 것을 받으며, 군대의 모습이 정리되고 엄숙함을 보고 공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훌륭한 장수이다.’ 하였다. 을묘년 정월 10일에 집에서 돌아가니 향수가 59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비범하며,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며, 두 어깨가 우뚝 솟아 송골매 같아서 항상 말 고삐를 잡고 진영에 오르면, 보는 자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을사년에 공이 무고함을 입어 옥에 갇히니, 그때 가뭄이 심하여 왕이 비 오기를 사직단에서 빌고 돌아오는 길에 친히 의금부에 가서 보고, 이로부터 은혜로 돌보 아줌이 더욱 높아지니, 꺼리고 무고함이 자주 일어나서, 왕이 바로 물리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함은 나의 긴 성을 헐어서 삼백 년 지켜온 종묘를 위태롭게 함이다.’ 하고, 특별히 마음 쓴 은총의 말씀이 여러 번 있어, 사기에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조풍원 현명이 공에게 묻기를, ‘공이 왕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왕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 일찍이 함께 시중을 드는데, 총부의 모든 관원들은 옆문으로 출입하고, 나만 홀로 정문으로 드나들었으며, 내전에서 하사한 좋은 음식이 있을 때에 모든 관원은 다 나아가는데, 나만 홀로 나가지 않으니, 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그 뜻을 물으셨다.

내가 대답하되, 당상관은 의당 정문으로 출입함이요, 외관은 감히 높은 신분과 더불어 밥상을 대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혹시 이것이 왕의 마음에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조용히 조풍릉에게 묻기를, ‘이 아무개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대답하되, ‘이 아무개는 그 어머니에게 효도하니, 나라에도 충성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착하다고 칭찬하였다.

묘는 공주 가좌동 자좌 자리에 썼고, 그의 선계는 공의 선고 함평군 비문에 기재되어 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진주유씨요, 계배는 정경부인 순천장씨이니, 아들 희는 유씨 소생으로, 지금 충훈부도사이고, 김석기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식을 낳았고, 식은 갑사 정준일의 따님을 취하여 1남 1녀를 두니, 다 어리다. 공이 벼슬에 나간 내력과 난리를 평정한 사적은 이벽계 덕수와 조영상 현명과 윤경암 동수가 지은 비문과 행장과 묘지에 다 기록되어 있다. 숭정기원후 백이십삼년 경오 월일 세움. 종손 전 정언 수봉 지음. 족질 전 대사준간 유신 씀. 전면 집자 한호 서“

[현황]

최근 함평이씨 종중에서 묘역에 있는 백일헌 영당 아래에 있는 묘비를 풍비로 새로 세워 놓았다. 종중에서 관리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삼 장군 묘소는 조선 중기 논산 지역 사류들의 동향과 인맥 관계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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