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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민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909
한자 連山民亂
영어의미역 Popular Uprising in Yeon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은진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862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은진면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은진면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 폭동 사건.

[역사적 배경]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배층의 과중한 착취, 세도정치의 불합리성, 문호개방 이후 급속히 증가한 국가지출 등은 농민에게 2중 3중의 부담을 지웠다. 여기에 더하여 조세의 징수관인 아전(衙前)의 행패 또한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862년(철종 13)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삼남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한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났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서, 4월에는 개령(開寧)·함평(咸平)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5월에는 회덕(懷德)·공주(公州)·은진(恩津) 등과 더불어 연산(連山)에서도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발단]

1862년(철종 13) 전정(田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진주(晉州)에서 일기 시작한 민란이 전북 익산(益山) 지방까지 번지자 그 해 5월, 이에 자극받은 연산 지방의 나무꾼 수천 명이 관청과 민가를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경과]

민란의 주요 근거지는 은진과 연산 일대였으며 조정에서는 충청도관찰사 유장환(兪章煥)을 시켜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은진의 난민들이 민란을 일으켰으며 연산에서는 초군(樵軍) 수천 명이 일어나 민가를 불태우고 있다.”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결과]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비롯한 안핵사·선무사(宣撫使)·암행어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사태 수습에 노력하면서 민란의 주모자는 극형에 처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한편 삼정의 근본적인 개혁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박규수 등 안핵사는 민란의 원인이 국가재정의 낭비와 민생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하고 삼남 지방에서의 환곡제도 폐지를 상소하였다.

조정은 5월 26일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을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군정(軍政)과 전정(田政)에 있어서는 민원이 없도록 개혁했으며 환정(還政)에 대해서는 23개조의 수습 방법을 들어 시정했다. 이렇게 해서 민란이 잠시 수습되었으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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