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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823
한자 新宗敎
영어의미역 New Religion
이칭/별칭 신흥 종교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이영구

[정의]

1900년대부터 발생하여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종교.

[개설]

논산 지역의 신종교는 조선 말 계룡산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유사 종교로 지칭된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유사 종교들은 신종교라는 면모를 내세워 민심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 신종교들은 많은 신도와 민심을 얻기도 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신종교의 한 가운데에 논산 출신인 일부(一夫) 김항(金恒)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김항이 주창한 정역사상은 한국 종교사상의 현대적 명제의 해결과 더불어 미래적 방향을 제시했던 이론이다. 지금 현존하는 신종교의 사상이나 교리, 그리고 경전 등은 정역사상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계룡산의 신종교는 물론, 한국 신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역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신도안 종교촌]

1. 성립기

신종교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룡산이다. 또한 계룡산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흥 종교촌이다. 계룡산에 속한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현 계룡시 신도안면 부남리) 신도안이 신흥 종교촌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동학계 시천교(侍天敎) 3대 교주 김연국(金演局)이 신도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김연국은 교인 2,500여 명을 이끌고 신도안 내 용동리에 터를 잡고 상제교(上帝敎)로 개칭, 교당을 설치했다.

2. 발전기

이후 신종교 단체 교주가 다투어 신도안을 찾았고, 사회 변동에 불안을 느낀 전국의 농민들 또한 신도안을 찾았다. 그들은 신도안을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이 실현되는 곳이라고 믿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땅으로 여겼다. 대체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진리에 입각한 지상천국을 꿈꾸며 급진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전체적인 변혁을 갈구했던 사람들이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우니 신도안에서 새로운 세상이 정도령에 의해 실현된다는 기대 속에 어려운 생활을 감내해냈다.

신도안의 신흥 종교는 『정감록』의 예언과 고유사상 혁신 논리인 후천개벽설과 유합하면서 민중 신앙으로 발전했다. 말하자면 무적신명(巫的神明)과 선적신명(仙的神明)으로 구분되는 신명사상과 세상을 이화(理化)하고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는 역이사상이 합쳐진 것이다. 여기에서 국조(國祖)의 단군신앙(檀君信仰)을 기본적으로 포함하면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한 풍수도참설(風水圖讒說)을 융합, 한국의 거대한 고유 신앙으로 이어나갔다.

3. 전성기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사회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천지개벽설이 고개를 들면서 신도안은 피난처로 각광을 받았다. 이에 따라 신도안 하면 신흥 종교 집산지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신도안의 신종교 전성기는 1950년대 초반인데 당시 세대수가 1,086가구, 인구는 5,600여 명에 달했다. 이 같은 많은 인구는 신도안이 1983년부터 시작된 일명 6·20사업에 의해 철수될 때와 비슷한 인구였다. 1975년 정부는 국립공원 정화사업을 추진하면서 계룡산에 산재한 신종교 상황을 파악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총 교단 수는 104개였고, 천진교와 같이 큰 교단이 있는가 하면, 일인일교를 이루는 개인 기도소도 포함되어 있다. 전체 종단을 계통별로 보면 불교계가 62개 종단으로 제일 많고, 동학계가 7개, 기독교계와 유도계가 각 4개 종단, 단군계와 도교계가 각 2개 종단으로 분류됐다. 종교의 교주 학력은 무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다양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대학 중퇴자로 고학력자들이 많았다.

4. 해체기

1975년 계룡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자유롭게 종교생활을 하던 신도안 지역에 사회 공권력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국립공원 내의 건축물 및 시설물에 대한 공원 밖 이전이라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1983년 신도안 재개발사업에 따라 신도안에 있던 70여 개의 종교단체들은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신도안 하면 ‘계룡대’라는 또 다른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종교인들은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무르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정역계(正易界)]

논산 지역의 신흥 종교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역(正易)』이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정역』은 근래 들어 동양 철학자는 물론, 우리나라에 자생한 신흥 종교 신도들에게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신도안의 신흥 종교를 해부하는 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역』에 대한 이해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내 신흥 종교의 모태는 정역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정역사상과 더불어 동학, 단군신앙, 풍수도참사상도 함께 했다. 그러나 신흥 종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상은 단연 정역이다. 정역사상은 한국에 신흥 종교가 발호하기 전인 19세기 말 계룡산을 중심으로 열화같이 퍼졌다. 『정역』은 조선 후기 역(易)의 대가였던 김항이 저술했다. 김항은 젊은 시절 최제우(崔濟愚)·김광화(金光華) 등과 더불어 이운규(李雲圭) 밑에서 수학했다. 이 때 김항이운규가 전해 준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뜻을 19년간 참구하여 깨우쳤다.

김항의 수양 방법은 『서전(書傳)』의 정독 과 다독, 그리고 영가(詠歌, 창가)와 무도(舞蹈)를 통한 정신 개발이었다. 그 후 수양 중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와 『대역서(大易序)』를 얻고 이어 1885년 『정역』을 완성했다. 이무렵 계룡산 아래 국사봉(國事峰, 대명리 소재)으로 거처를 옮긴 김항은 많은 제자들에게 『정역』을 일깨워 주었다. 김항은 무극대도(無極大道)라는 교명으로 계룡산 일대에서 가르침을 펴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이후 제자들은 정역사상을 근간으로 한 신종교를 연이어 창시했다.

김항의 정역사상은 일 년이 365일과 4분의 1로서 윤(閏)이 있지만, 후천정역의 운도(運度)는 360일로서 윤이 없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후천 세계는 사시(四時)·주야(晝夜)·한서(寒暑) 등의 구별이 없으며, 인간 세상에도 부귀와 귀천·수요의 차가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선후천이 교역(交易)하는 시기에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고, 인간의 선악에 따른 심판이 있어 무극대도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부는 오음주송(五音呪頌)을 가르쳤다. 오음은 ‘음아어이오’로 궁상각치우의 오송과 토금목화수의 오행, 그리고 비폐간심신의 오장(五臟)이 수련되어 모든 질병이 낫는다고 한다. 오음은 그 음률의 고저청탁이 된다고 한다. 김항의 정역사상은 공자·맹자의 유교사상을 성학적 천명사상으로 재발견한 것이다. 즉 조선 유학의 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송대 성리학을 극복함과 더불어 한대 경학적(經學的) 차원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경(易經)』은 복희씨에서 시작해 문왕(文王)과 공자(孔子)로 이어졌는데, 계룡산에서 김항이 『정역』으로 결론지어 완성했다는 것이다.

[동학계]

정역과 함께 조선 말기 유행한 대표적인 신종교는 동학이다. 동학은 수운(水雲) 최제우가 제세구민의 뜻을 품고 1860년 창건한 것으로 서학(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종교이다.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과 ‘천심 즉 인심’의 사상을 전개한 동학은 그 당시 세도정치와 외국의 간섭 등에 짓눌린 민중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키웠다. 이를 두려워한 왕실 측은 백성을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교(邪敎)라 하여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을 완간하여 동학의 교리를 정리한 후,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동학혁명을 일으켰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정역 창시자인 김항과 함께 이운규 밑에서 공부했는데 나중에 한반도 최고의 신종교를 창시하는 데 일조한 인연을 갖고 있다. 다만 동학이 동적(動的)인데 비해 정역이 정적(靜的)인 사상이어서 정역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후에 동학은 시천교로 바뀌었는데 계룡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최시형은 평소에 동학혁명을 주도하면서 계룡산 아래에 거처를 정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 천도교 제3대 교주 구암 김연국은 1912년 4월 5일 서울에서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김연국은 정치와 결별할 것을 선언하고 시천교를 세웠다가 다시 상제교로 교명을 개명했다가 또다시 천진교로 개칭했다.

천진교가 신도안으로 이주한 것은 신도안 개척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으로 당시 황해도·평안도 신도 등 2,500여 명이 이주했다고 한다. 신도안에 온 천진교는 황무지 개간과 교육사업에 전념, 사립 신도학교를 세웠다. 김연국이 신도안에 온 배경은 최시형의 영향도 있었지만, 『정감록』에서 말하는 새로운 왕국의 도읍이 되리라는 도참신앙이 한 몫 했다. 현실적인 정치 개혁이나 사회 개혁보다는 정신개벽을 주장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김연국은 민간에 널리 유포된 도참설을 활용, 종교왕국을 꿈꾸었다.

[원불교계]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朴重彬)계룡산과 정도령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계룡산이라 함은 곧 밝아오는 양(陽) 세상의 이름이요, 정도령이라 함은 곧 바른 지도자들이 세상을 주장하게 됨을 이름이니 돌아오는 밝은 세상에는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주장하게 될 것을 예시(豫示)한 말이니라”

소태산에 이어 2대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 송규 종사는 법어를 통해 계룡산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영산(靈山)이 법생지요 계룡산이 결실지요, 금강산(金剛山)이 결복지니라. 결실이라 함은 새 세상의 법종자가 이 국토에서 분명한 결과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함이요, 결복이라 함은 그 법종자가 세계에 널리 전파되어 온 세상에 고루 복과를 맺게 될 것을 의미함이니라”

이 말의 뜻은 원불교가 영광(靈光)에서 씨를 뿌리고, 계룡산에서 크게 흥행한 뒤, 금강산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부흥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동해, 전라북도 익산에서 크게 포교돼 민족불교로 널리 알려진 일원상 진리의 원불교는 다른 신종교처럼 계룡산과 직접·간접으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원불교가 계룡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 4월 교조 박중빈이 제자 이공주, 전음광과 함께 계룡산에 올라 신도안 지역을 도량 건설의 적합지로 선정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여건상 사업을 착수하지 못하다가 1958년 4월 2대 종법사 송규 종사의 하명에 따라 원불교 삼동원(三同院)의 창원이 시작됐다. 1959년 10월 24일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신도안에 초가 1동 매입을 시작으로, 신도의 도움으로 ‘불종불박’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 땅을 구입함으로써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1959년 10월 3대 종법사로 내정된 대산 김대거 종사가 정양함으로써 삼동원이 기초를 단단히 했다. 대산 김대거 종사는 원불교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신도안에 삼동원 설립이 시급하다는 말에 따라 1964년 3월 7일 법당 1동과 수양실 3동을 신축, 첫 훈련을 실시했다. 삼동원은 정산종사의 사상인 삼동윤리를 실천하는 도량으로서 사상과 종교의 벽을 넘어 설립된 원불교의 훈련도장이다. 대산 김대거 종사는 삼동원이 완공되자 이곳에 정착 신도안 주민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실시했다.

[단군교계]

신도안에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단군(檀君)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지금이야 대종교를 비롯한 단군계 종단들이 더러 있지만, 70~80년 전에는 단군을 종교로 모시는 곳은 거의 없었다. 다른 신종교들이 『정감록』과 풍수지리상 피난처로 여기며 계룡산 신도안에 들어왔지만 단군계 종단까지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 당시 신도안에는 3개의 단군계 종단이 있었고, 인근 지역인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개태사에 창운각을 세워 단군을 모셨다.

특이한 것은 신도안의 많은 사찰과 암자에서 단군 영정을 모시고 단군을 성인(聖人)으로 추모했다는 데 있다. 이 같은 형상은 신도안 지역에 산재한 무속인들이 암자를 지어 놓고 단군 영정을 모시고 있는 등, 지금도 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신도안에 제일 먼저 세워진 단군계 종단은 1913년 이진탁이 암용추 아래 세운 작산의 단군전이다. 이진탁은 경상북도 김천 출신으로 아동들의 훈학(訓學)에 힘쓰다가 도통 공부에 뜻을 두고 입산수도하였다. 그러던 중 41세에 백두산에서 수도하다가 단군의 현몽(現夢)을 받고 구월산·지리산·계룡산 등을 돌다 1904년 신도안으로 이주했다.

단군 영정은 이진탁이 구월산에 수도할 때 삼성사에 모셨던 것인데, 영정이 퇴색하여 그 진위는 알 수가 없다. 신도안 시절 단군전 동쪽에 상제(上帝), 단군, 황제(皇帝), 노자(老子)를 새긴 비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제를 주신으로 하고, 그 아래 단군·황제·노자를 같이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진탁이 단군전을 설립했던 시기는 이미 일제가 조선을 병합했던 때라 단군신앙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때였다. 이 때 이진탁은 3개월간 대전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으나, 일제의 인정을 받고 단군교 충청남도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30년 이진탁이 세상을 떠난 후, 상당 기간 단군전이 방치되기도 했으나 주민들 사이에 종교 여부를 떠나 민족적 도의심에 단군을 숭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 단군영모계를 결성했다. 단군영모계는 2대 책임자인 박내인의 아들이자 단군교 본부의 시교사였던 박수하가 주도했다. 이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순수한 민간의 국조숭봉단체였다. 박내인 이후에는 이영희가 맡아 운영했으나 1983년 6·20사업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기독교계]

신도안 내 신종교 중 기독교계 종단은 흔치 않았다. 세계일가공회·새일수도원·천마산수도원·붕어명당 등 네 곳이 있을 뿐이었다. 이 중 붕어명당은 계룡산 중턱 황적봉 밑에 있었으나, 6·20사업 이전에 인근 연산면 한전리로 이전했다. 따라서 신도안 종교 중 기독교 영향을 받은 종교는 세계일가공회·새일수도원·천마산수도원 세 곳이었다.

이처럼 신도안 내 기독교 종단의 신종교가 적었던 이유는 신도안 내 종교의 대부분이 유·불·선을 혼합한 후천개벽설과 『정감록』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6·20사업 이후 다른 종교 및 종단은 신도안 부근을 떠났거나 계룡산과 거리를 두었지만, 이들은 아직까지도 계룡산과 지척에 살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다.

1. 세계일가공회

세계일가공회는 1964년 계룡산에서 입산기도 하던 양도천 목사가 계룡산이 시대적 섭리가 있는 산성이 될 것이고, 새 시대의 근본운동인 한님의 집을 세울 것을 계시 받아 창설한 신종교이다. 신도안 내 암용추 아래에 자리 잡았던 세계일가공회는 신도안 내에 있는 종교인들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 계룡산 종교인 친목회를 결성하는 등 세계평화건설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1974년에는 한국통일선언서를 선포하고 한민족총회를 개최했으며, 1978년에는 어린 양수관식을 거행,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1979년에는 세계 일주 국가를 수립하고 성봉추대식을 한 후, 계룡산 신도안을 성도로 정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 수시로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나 종교계 인사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주장이나 예언을 하는 등 ‘계룡산의 기인’으로 통했다.

세계일가공회는 세계일주평화국·대한일주평화국을 거쳐 1994년에는 우주일주평화국으로 고치고, 새로운 성황등위식까지 마쳤다. 양도천 목사는 ‘나는 만유의 근본이요, 창조주요, 천지의 대주재이시고 우주의 절대자인 한님 여호와의 명에 따라 통일한국의 주체요, 세계 국가의 모체로서 우주일주평화국을 건설함’이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세계일가공회의 신앙 대상은 한님이며, 이념은 일주주의이다. 일주주의란 ‘우주가 한님, 한님의 집, 한님의 나라, 한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6·20사업으로 잠시 대전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1985년 다시 계룡산이 보이는 두마면 금암리 천마산 황태골로 이주했다. 최근에는 신비체험을 했던 도덕도를 중시하며 이 곳이 세계의 중앙이라고 주장하며 신천지창조 운동을 펼치고 있다.

2. 새일수도원

새일수도원은 1965년 6월 1일 이유성 목사가 창교한 기독교계 신종교이다. 이유성 목사는 부산 영도 모처에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문이 열리며 계룡산 상봉에 가서 기도하라는 계시를 받아 신도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신도안에서 기도하던 중 하늘에서 뇌우가 치며 용 두 마리가 나타나 이유성 목사를 죽이려 하는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며 목숨을 걸고 싸우면 이곳에 제단을 준다는 계시를 받고 용과 싸워 이겼다고 한다. 그러자 2~3일 뒤 산주인이 나타나 신도안 부지 1,320㎡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그 자리에 새일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유성 목사는 계시를 받을 때, 하늘에서 전기가 쏟아져 머리를 스치는 체험을 하였으며, 그 전력을 통해 말세의 비밀을 터뜨린다 하여 이름을 뇌자로 바꿨다. 1965년 세워진 새일수도원의 강령은 종말의 사명용사를 통해 택한 백성들에게 말세의 환난에서 살길을 인도해 주려는 사상을 제시하고, 동시에 여호와의 ‘새일’을 세우자는 것이다.

창립 이후 수년 이내에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35개의 교회를 이룬 교단으로 발전했다. 새일수도원은 이유성 목사가 백암동 계곡에서 목욕하다가 죽기 전까지 전국에 90여 개의 교회를 거느리는 교단으로 발전했다. 세상을 떠난 후 부활한다던 이유성 목사는 죽은 지 5일이 지나도 부활되지 않았으며,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해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시신을 묻는 소동이 벌이지기도 하였다.

이후 이유성 목사의 아들 이재만의 교단 운영, 이유성 목사의 부활 등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백마십자군스롬바벨파, 대한예수교 성결선교회, 새일수도원 말세복음 부흥단, 멸공학교, 한국무의신학교 등 7개 교파로 분열되어 교세가 극히 미약해졌다. 새일수도원의 신앙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계시(啓示), 환상(幻想), 천성 등의 방법으로 그 뜻을 전한다.

이유성 목사는 우주가 여호와의 섭리 아래 있으며 우주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주장했다. 즉, 율법시대와 은혜시대가 가고 지금은 진노(震怒)와 환난(患難)의 시대라고 주장하였다. 과거의 기독교는 천당 가는 길을 가르쳤으나, 자신이 계시를 받고 계룡산에 자리 잡은 이후에 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천당에 들 수 있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다고 하였다.

이유성 목사는 교리 중 생수(生水) 가름 의식을 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데, 생수의 의인 자신과의 신비한 관계를 통해 왕권을 얻어 안식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많은 성적인 의혹을 받아 왔다. 생수 가름으로 전통 기독교에서 이단시되고 교세가 위축되자 교세 확장을 위해 멸공·반공 가두선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2008년 현재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계룡역 앞에서 새일수도원 후신이 활약하고 있으나 교세는 극히 미약하다.

3. 천마산수도원

천마산수도원은 1953년 현광수가 세운 기독교 기도원으로 처음에는 계룡산기도원이라 하였다. 현광수가 6·25전쟁 때 서울에서 폭격으로 일가족을 잃고 계룡산에서 기도생활을 하던 중, 어느 불교 가정에서 위급한 환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도를 통해 환자의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 소문이 멀리 퍼져 호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수많은 병을 기도로써 치유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의 헌금으로 땅을 매입했는데, 이후 현광수의 치유 능력이 없어졌다고 한다.

1967년 계룡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 받기 싫어서 천마산수도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때는 호남 지역에 천마산수도원 운동을 지지하는 목사가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교세가 대단했던 것 같다. 2003년 계룡시 건설로 소유한 땅 약 66,000㎡의 부지 중 3분의 2를 수용 당해 수련원 건립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현광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고 말세의 사명자로 자처했다. 성경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일 년에 15번이나 성경을 통독했다고 한다. 또 역사는 성부·성자·성신·성령·생령시대로 구분하는데 생령시대가 천년왕국시대라고 한다. 예수의 재림, 심판 시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외성 천년왕국 가운데서도 내성 즉, 새 예루살렘에 있는 14만 4천 명뿐이라고 한다. 한때는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 다음으로 번성했으나 이단 문제로 쇠퇴해 찾는 이의 발길이 뜸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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