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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728
한자 士林
영어의미역 Neo-Confucian Literati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경수

[정의]

충청남도 논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유학자와 선비 세력에 대한 호칭.

[개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사림(士林)이란 고려시대에 유학자 또는 유학을 닦은 관료로 유사(儒士), 유신(儒臣) 등으로 불렸으며, 말기에 신유학이 들어오면서 사대부·사인·사류(士類)·사족(士族)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사림이란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이 용어는 성종대 이후의 신진 세력인 사림파와 관련해 성종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조선 왕조 초기의 실록에도 적지 않은 용례가 확인된다.

사림의 주체와 내용, 성향 등이 성종~중종 연간에 두드러지게 된 것은 세조~성종 초에 공신이 다수 배출되면서부터이다. 스스로 일반 조사(朝士)와 구별하는 의식을 가진 가운데, 마침 조정 진출의 기회를 얻은 지방 출신의 신진 사류들이 공신들의 권귀화(權貴化)에 대한 비판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신진 사류들이 주장하였던 청론·청의(淸議)가 사림의 주체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신진 사류는 재야 선비들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호칭 역시 재야 선비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충청의 기호사림]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충청도, 그 이미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그 상징의 연원을 살피면, 조선시대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호학파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맥이 논산에 뿌리 내린 논산사림(호서사림)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와 역사성을 찾을 수 있다.

[호서학파와 학맥의 발전]

안향(安珦) 이후 권부(權溥)·백이정·이제현(李齊賢)을 거치면서 발전한 성리학은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에 와서 고려 성리학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정몽주는 문하에 길재(吉再)·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조용(趙庸) 등을 두었는데, 이중 길재정몽주의 도통을 이었다. 길재의 학문은 김숙자(金叔滋)에게 정통이 넘어갔으며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도통을 이었다. 김종직의 문인 중 김굉필(金宏弼)에게, 이후 조광조(趙光祖)에게 도통이 이어졌다.

한편 안향의 문인 중 주목되는 인물은 권부이다. 권근(權近)의 증조부이기도 한 권부는 초기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많은 연구자들이 권부백이정·우탁(禹倬)과 더불어 안향을 계승한 명유로 보고 있다. 권부의 제자로는 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이 있는데, 이중 이곡권부의 정통을 받았으며, 이곡의 아들이 고려 말 명유 이색(李穡)이다.

권부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이제현백이정의 문인이었고, 권부의 사위로서 학문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이제현의 학문이 이색에게로 전해졌다. 이렇게 볼 때, 이색은 가학(家學)으로서 아버지 이곡을 통해 권근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직접적으로는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색의 문하생으로 이숭인(李崇仁)·길재·하륜(河崙)·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명유가 배출되었는데, 이중 성리학적 소양, 정치적 영향력, 후대의 평가 등을 고려하면 권근이 후대인들에 의해 이색 이후 기호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볼 때 기호사림의 연원은 이색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권근은 가계상으로는 기호 연원인 권부의 혈통을 받았으며,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색정몽주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권근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양가는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권근은 한때 동문이었던 정도전의 영향도 받아 학문적 성취는 스승을 능가할 정도였다. 고려 말 성리학은 권근에 의해 기반이 확립되었으며, 특히 저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은 권근 저서의 백미로 꼽히고 있으며, 거기에 나오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 영남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권근의 직계 문하에는 김반(金泮)·허조(許稠)·맹사성(孟思誠)·강회백(姜淮伯) 등이 있고, 권근의 동생인 권우(權遇)의 문인으로 안지(安止)·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가 있다. 그리고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의 문인 역시 관심의 대상이다. 세조성종대의 인물로 김반의 문인으로 최항(崔恒)과 이석형(李石亨)·신숙주(申叔舟) 등이 있고, 강회백의 손자로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 권제의 아들 권람(權擥), 권근의 외손 서거정(徐居正), 허조의 문인 이극배(李克培) 등이 권근의 학맥으로 볼 수 있다.

이들과 더불어 기호학맥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기호 출신이기 때문에 기호학파의 종사가 되기도 한다. 조광조를 독향한 경기도 양주의 도봉서원에 송시열(宋時烈)을 추배하고자 노론 측에서 집요하게 노력한 것도 사실은 기호사림의 전통이 조광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조광조의 학통은 이이(李珥)로 연결되었다.

기호학파는 이이·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등이 주류가 되어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이 논산의 김장생(金長生)이었다. 김장생 문하에서 약 300여 명,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약 200여 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일부는 양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한 인사도 있었다. 문하생 가운데 특출한 이는 송준길(宋浚吉)·송시열·유계(兪棨)·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 등 충청5현이다.

학파의 적통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면서 호서사림으로 발전하였는데, 학문적인 특성은 예학(禮學)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이해가 깊어져 이를 체계화하고 이론화함에 따라 현실적인 실천의 예는 이론의 예로 의식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김집의 적통이 회덕의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호서사림의 전성을 맞게 되었다. 당시 호서사림을 잇는 적통은 송시열이었지만 그와 함께 호서사림을 주도한 인물은 송준길이었다. 양송(兩宋)이 정계에 등장하여 활동하면서 기호학통의 정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성혼이이,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성공시켰는데, 학문의 연원이 되는 인사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곧바로 정치적 집권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학문적 정통성을 공인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서학파는 김장생의 예학을 주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적통이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주자 성리학을 고수하였고, 서인에서 분파된 노론이 득세하면서 호서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논산사림]

조선 중기 호서사림의 학맥은 논산 출신의 사계 김장생과 아들 김집의 학연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김장생은 아버지 김계휘(金繼輝)가 강학했던 정회당(靜會堂)과 자신이 세운 양성당(養性堂)에서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송시열·송준길·이유태·권시(權諰)·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신흠(申欽)·이경석(李景奭) 등이 있다. 기호사림에 버금가는 논산사림(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과 그로 인한 학통의 형성으로 상당히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김장생정암 조광조의 덕치, 퇴계 이황의 도학(道學), 율곡 이이의 학문, 우암 송시열의 의리와 더불어 ‘예학’으로 이른바 ‘조선조 오현(五賢)’으로 추앙받아 왔다. 뿐만 아니라, 김장생이이, 송익필의 적전(嫡傳)으로 기호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율곡학파의 문호가 넓어지고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논산사림을 대표하는 김장생에 의해서라고 할 것이다.

[기호사림의 정치적 갈등, 회니시비]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집권당인 서인 내에서 온건한 성향을 보였던 니산 출신의 윤증(尹拯)[소론]과 강경론을 주장하였던 회덕 출신의 송시열(노론)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대립을 일컫는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시작된 당쟁은 결국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리되는 삼각관계의 구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러한 논쟁의 지역적 배경이 된 곳이 논산이다.

송시열윤증은 사제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친가·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다. 즉 송시열윤증이 거주한 회덕과 니산(현 논산)은 같은 기호 지방이었고, 은진송씨파평윤씨는 당파도 함께 서인에 속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통혼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윤증송시열 문하의 수많은 제자들 중 유독 뛰어나다고 고제(高弟)로 지목되었으며, 송시열과 자신과는 가까운 인척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서 죽은 부친에 대한 묘갈명을 써달라고 유배지인 장기에 찾아가서 부탁할 정도였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송시열의 학문과 덕행 상의 결함을 지적한 「신유의서(辛酉擬書)」를 지었다. 동생 윤추(尹推)와 교우인 박세채(朴世采)가 만류하여 공개되지 않았으나, 송시열의 손자 송주석(宋疇錫)이 절취해 전달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에 송시열은 크게 노해 사제의 의를 끊어 버렸다. 송시열윤증은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 시 집권당인 서인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 윤증은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 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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