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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610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고동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논산
관련인물/단체 대원군|고종

[정의]

조선 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개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갑오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왔던 청(淸)나라의 몰락과 함께 밀어닥친 제국주의 열강의 강압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각종 민란(民亂)의 발생으로 인해 조선 중앙정부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여 국가 보위와 농민 구제의 성격을 지니면서 폭넓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으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민란과 결합하게 되면서 점차 정치운동으로까지 비화하였으며 충청남도 논산 지역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다한 부과 등으로 농민들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밖으로는 외국 세력의 침투에 따라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었고, 안으로는 농민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각종 민란까지 발생하였다. 이미 16~17세기에 임술(壬戌, 1562) 임거정사(林巨正事), 정축(丁丑, 1697) 장길산사(張吉山事) 등의 민중해방운동(民衆解放運動)이 농민 계층의 각성으로 이어졌고 고종 대에 와서는 26회에 달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농민 계층 속에서도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 행위를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다. 신흥종교인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단순한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개혁 욕구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사회 개혁의 요구와 외국 세력의 배척을 주도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여 전국 각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도 농민군들의 봉기에 이은 전쟁의 수행과 함께 유림 세력과도 연합하는 복합적인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경과]

1. 제1차 동학농민운동

제1차 동학농민운동 초기에 논산 지역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집강소가 설치된 이후부터 논산 지역에서도 소규모의 동학농민군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94년 7월 6일에서 8일 사이에 연산의 동학농민군 100여명이 연산관아를 습격하여 총과 돈, 말 등을 탈취했으며 8월에는 노성의 동학농민군들이 노성 관아의 무기창고를 열어 군기를 탈취하였다.

이 시기 논산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들은 대부분 대규모의 조직이기 보다는 6~7명의 접주가 두령이 되고 수십 명의 부하로 구성된 소규모의 조직이었다. 당시 연산의 접주로는 박영채(朴泳采)가, 은진의 접주로는 염상원(廉相元)이 활약하였으며 노성 무기고 탈취사건의 주도자는 이인(利仁)의 동학 도집강(都執綱) 김창순(金昌順)이었다.

2. 제2차 동학농민운동

이후 논산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제2차 동학농민운동과 더불어 개최된 논산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논산에서 합류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의 북접농민군이 연합하여 동학농민군 대본영을 설치함으로써 논산 지역은 제2차 동학농민운동기의 동학농민군 주력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논산대회에는 극소수였지만 이전에는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유생들도 참가하였다. 이 중 공주 출신의 유생 이유상(李裕尙), 여산부사(礪山府使) 겸 영위(榮衛) 김원식(金元植) 등은 대회 참가 전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활동을 수행하였으나 항일의병 활동을 위해 동참한 자들이었다. 손병희가 직접 인솔하여 논산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1만여 명과 남접농민군 중 전봉준의 직할 부대 1만여 명은 나머지 다른 부대원 3만여 명과 함께 같은 달 21일 경 논산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노성과 공주의 경천점(敬川店)에 군영을 설치한 후 3가지 길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였다.

3. 의병과의 연계 활동

한편 논산에서의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군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대원군고종의 밀지를 매개로 동학농민군은 물론 보수유림과 지방관까지 창의(倡義)하도록 독려하였다. 대원군의 명령을 받은 전교리(前校理) 송정섭(宋廷燮)은 1894년 8월 노성현의 대성인 파평윤씨 윤자신에게 고종의 밀지를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송정섭은 윤씨의 재궁(齋宮)인 정수암(靜修庵)을 거점으로 하여 9월 초에 의병 모집을 시작하였다. 의병 지휘부는 소모장(召募將) 최익현과 참모 송정섭 그리고 종사관 윤자삼·윤상옥·표정(杓亭)의 김진사·고산(高山)의 윤진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송정섭은 창의를 권하는 윤음을 가지고 동학농민군 부대 12포(包)를 순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각지의 동학조직과 유림의병 간에 연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과]

1. 제2차 동학농민운동

제2차 동학농민운동 중 공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11월 8일에서 11일까지 4일간 전개된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한 농민군은 노성으로 후퇴하여 진영을 수습하였다. 다음 날인 12일 동학농민군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의 이름으로 관군과 이교(吏校) 및 백성들에게 척왜(斥倭)와 척화(斥化, 반개화당)를 내세우는 포고문의 발표와 함께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4일경 노성의 동학농민군은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가 이끄는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의 공격을 받고 논산 대촌(大村)의 원봉(圓峯)으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공격을 받게 되자 다시 황화대(皇華臺)로 후퇴하였다가 같은 달 17일 강경에서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여 전라도 전주로 퇴각하였다. 논산과 노성에서의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우금치 패배 이후 재봉기를 준비하던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2. 의병과의 연계 활동

의병과의 연계활동도 1894년 8월 말 대원군에 의한 동학농민군의 동원 계획이 누설되자 유림을 중심으로 한 의병세력이 모두 흩어지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동학농민군과 보수 유림 세력이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거의(擧義)하려 했던 계획이 그 준비과정 초기에 이미 좌절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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