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D02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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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경희 |
❚ 부여서씨의 정신적 지주 서익 선생
부여서씨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자 육곡리 봉례공파 후손들의 자랑인 서익 선생은 논산에 이거해서 뿌리를 내리고 대표적인 큰 가문으로 성장하는데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다. 서익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 또는 만죽헌(萬竹軒)이다.
1542년 태어나 1569년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던 중 1585년 의주 목사 재직 당시 정여립 등의 의견에 반대하며 율곡 이이를 변호하고 두둔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파직되어 고향인 은진현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서익은 ‘취규재(聚奎齋)’라는 서재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는 한가로운 여생을 보내다 1587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데 서익이 종을 치면 세상 만물이 모여든다는 종혈의 명당자리이다. 또한 그가 남긴 옥저와 장칼 등이 현재에도 그의 후손인 서각선(79)에 의해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그의 묘소가 있는 삼전리에는 1998년 후손들이 세운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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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의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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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의 장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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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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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익 선생비
❚ 귀신도 쫓아낸 서익
평소 성품이 강직하고 올바르기로 유명하였던 서익이기에 임금이 그에게 규탄의 직책을 맡기면 조정에 남을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강직한 성품은 때론 귀신도 물리칠 정도라는 비유가 있으며, 실제로 잡귀들이 달라붙으면 혼을 내 쫓아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서익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익은 젊은 시절 공부를 하기 위해 조용한 산사로 들어가 글을 읽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밤중에 화장실이 급하게 가고 싶어 다녀오게 되었다. 그 길목에 있던 잡귀들이 서익을 보고는 놀리며 그를 괴롭히자 큰 소리로 그 잡귀들을 꾸짖어 물러나게 하였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저택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사또가 새로 부임하면 이따금씩 잠을 자다 혼절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익이 이 마을에 부임을 오게 되고 그 곳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서익이 늦은 밤까지 홀로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나타났다.
그 귀신은 울면서 서익에게 하소연하기를 “제가 남에게 피살되어 시체가 이곳의 들보 위에 있으니 제 한을 좀 풀어 주세요.”라고 슬피 울며 간청하였다. 이에 서익은 그 다음날 이 건물을 들보들을 조사하여 숨겨져 있던 여인의 시신을 찾아 잘 묻어준 다음 그 실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범인을 잡아 귀신의 한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그는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성품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주위사람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강직한 성격은 비단 귀신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참지 못하여 꼭 바로 잡았다고 전한다. 한 가지 일화로 예로부터 안동 고을의 아전들은 그 세력이 막강하여 그 곳에 부임한 수령들조차도 어찌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일이 많았다. 이때 안동에 부임하게 된 서익은 소문을 듣고 아전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가마 받침대를 문 앞에서부터 뜰까지 깔아 놓고는 여러 아전들 보고 옹기를 쓴 채 그 아래로 엎드려 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한 달이 조금 넘으니 아전들은 그의 심중을 깨닫고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쳐 자신들이 전에 행하였던 악습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정보 제공자]
서각선(1930년생, 부여서씨 종친회장)
서승길(1931년생, 육곡1구 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