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C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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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내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은진현(恩津縣)편에 의하면 예전의 강경포는 강경산 아래 있는 해진(海津)이며, 강경산 봉수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고, 북으로는 황화산(皇華山)에 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강경은 한양과 호남간 봉화(烽火)의 중계지였다.
17세기 초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직후였으므로 전쟁의 피해복구 과정에서 생산과 교역이 활발해졌고, 이에 힘입어서 장시의 수는 계속 증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천혜의 내륙항으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하기 시작한 강경포구는 금강 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물들이 이곳을 거쳐 전국 각지로 공급되었다. 조선 중기 무렵에도 제주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들이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비단과 소금을 싣고 와서 장사 길을 트기 시작하였다.
강경에는 17세기 말경에 열린 ‘하시장(下市場)’에 이어 1870년경에는 ‘상시장(上市場)’이 설시(設市)되었다. 하시장이 강경천 주변에 위치했던데 반하여 상시장은 옥녀봉 동쪽 기슭에서 열렸다. 하시장에서는 주로 수산물, 상시장에서는 곡물 등의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다. 수산물과 농산물의 거래규모는 당시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하시장은 처음에는 민간 소유답에 휴한기를 이용하여 상품을 진열하는 정도의 원시적인 형태였으나, 1808년에는 저습지를 매립하여 입지를 확보하게 되면서 큰 시장의 규모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장의 상권 판도도 넓혀져 갔고, 당시 주민들의 시장증설 요구가 당국에게 받아들여져 1868년에 상시장을 증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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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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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장
당시 강경의 최대인구가 약 3만 명이었는데 상인 등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약 10만 명에 이르렀으며, 강경의 경제권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22군에 달했다. 강경시장의 개시일에는 점포수가 평균 약 900개, 출시인원이 평균 7,000여명 이상이었으며 시장 거래액만도 1년간 200만원(圓)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강경의 시장 세력은 전국적인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강경에서는 지방상인은 물론 국제 상인들의 상행위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항구가 1870년 부산, 1874년 원산, 1877년 인천의 순으로 개항한 것에 비하면, 강경포구는 내륙부 기항지로 주요 항구의 개방보다도 앞서서 국제 무역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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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강경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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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강경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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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강경포구 사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