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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칠공예 입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A030402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시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 운명처럼 만난 목공예

해송공예의 대표 문재필 씨는 맨손으로 시작해 목칠공예의 일가를 일궈낸 인물이다. 차분한 목소리와 곧은 자세의 외모는 빈틈없어 보이면서 충청도 사람 특유의 인정미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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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송공예 문재필 대표

문재필 씨는 논산시 성동면 삼산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동면 일대는 석성천논산천 그리고 금강이 삼면을 둘러싼 넓은 평지로 호남평야의 시작이 되는 논산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집안은 선비가문이란 얘기를 들었고,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다.

그러나 장남이던 그를 농사꾼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뜻을 이어 열아홉 살이던 1979년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서울 성북구에 있던 삼성물산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한 무렵 우연히 회사 근처에 있던 공예사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나무를 깎고 다듬는 공방 사람들의 모습이 흥미로워 퇴근길에 들러 구경을 하곤 했는데 점점 호기심이 생겼고 직접 나무를 만져보기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고 손재주가 좋다는 칭찬을 들었던지라 누구보다도 금방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사고(?)를 치게 되었으니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배워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장남이 서울의 대기업에 취직한 것이 큰 자랑이었던 부모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공예’는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며 극력 반대하셨고, 어머니 역시 아들을 말렸지만 이미 공예 일에 마음을 쏟아버린 후였다.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부모의 뜻을 어기면서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 그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기술이란 것이 금방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수공업 전통은 보통 장인이 후계자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도제교육 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교육방법이란 것이 긴 세월 동안 인간적인 단련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식이어서 버티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다.

기능을 익히던 10년간은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기능은 늘지 않고 끊임없는 정신교육과 겨우 먹고살 만큼의 돈이 주어졌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전히 공예기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 새로운 길을 선택한 장남을 말없이 지원해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살았고, 1982년부터 겨우 기반을 잡아가면서 마침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다.

문재필 씨는 결혼하던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가진 것 하나 없던 그를 믿고 따라와 준 아내 때문이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단칸방에서 사과 한 개를 사다 반쪽을 먹고 반쪽을 비닐에 싸 두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을 정도였다. 만약 그때에 아내가 취업을 종용했더라면 어쩌면 공예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첫 아이는 왠지 작고 약한 듯해 지금까지 미안하다.

❚ 교촌리 축사에 꾸민 공방

1990년에 결혼을 하면서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열심히 모은 천만 원 돈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고향 동네는 논밭이 펼쳐진 벌판이라 공방을 차리기에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가까운 은진면 교촌리에서 축사로 쓰던 30평 규모의 창고를 임대해 본격적으로 공예품 생산에 들어갔다. 회사이름을 ‘해송공예’라 지은 것도 이때였는데, 병충해와 태풍에 강한 해송(海松)처럼 공예분야의 방풍림 해송이 되겠다는 뜻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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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송공예 전경

전통 교자상, 책상 등 솜씨 있게 만든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3년 만에 월 매출이 3천만 원에 이르렀다. 주위에서는 그런 게 장사가 되겠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만든 공예품이 잘 팔리는 모습을 보며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전통예술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해송공예에 위기가 닥친 것은 1996년이었다. 예기치 못한 큰 화재로 모든 것이 불 타버리고 말았다. 가진 것을 모조리 잃은 것은 물론이고, 창고 주인에게 변상까지 하느라 그동안 모은 재산은 날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처지가 된 것이다. 잿더미를 바라보며 가슴이 무너졌지만 아내는 담담한 모습으로 ‘당신만 건재하면 된다.’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 무렵 태연하게 일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일부러 불을 내고 보험료라도 챙겼나...’ 라며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국가 부도라는 IMF의 위기 직전이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남들의 의심과 달리 축사는 불법으로 개조한 공장이었으므로 보험은 들 수도 없었다. 사고를 정리해 나가던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세어있었다.

[정보 제공자]

문재필, (1961년생, 해송공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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