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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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Supernatural Beings on the Way to Hanya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집필자 | 이필영 |
[개설]
조선시대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은 한양과 전라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의 하나였다.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여산 사이의 논산 구간을 정리하면, 노성면-부적면 부인리-부적면 마구평리-부적면 아호리-은진면 교촌리-채운면 야화리-채운면 장화리-채운면 삼거리-강경포로 나타낼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일부 마을에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동시에 길손의 안녕을 도모하는 서낭이나 노표(路標) 장승 등이 있었고, 또한 이들에 대한 제사가 전승되어 왔다. 물론 이들 공동체 제사가 아주 오래전에 쇠퇴·소멸된 곳도 많지만, 일부는 현재적 의미를 지닌 채 잔존(殘存)하고 있다.
[부적면 부인리의 부인당]
부적면 부인2리 지밭[祭田]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부인당(夫人堂)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부인당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여무(女巫)를 모신 사당으로, 마을 뒤편의 논 가운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부인당이란 ‘부인(夫人)의 화상(畵像)으로 나타낸 서낭신’을 모시고 위하는 당집이다. 화상에 따라서는 각시당과 할미당의 구별이 있다. 원래 지밭의 부인당은 언덕에 있었고, 또한 여기에는 묘소들도 있었다. 지금은 언덕이 없어져버렸고, 주변 일대도 모두 논으로 개간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호남대로의 교통 요지였다. 따라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부인리 바로 인근의 덕평리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곳은 넓은 들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덕들’ 또는 ‘덕평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조선시대 원님들이 가마를 타고 한양을 오갈 때 다 보인다 하여 ‘가마들’이라고도 불렸다. 부인당 동쪽의 초포교(풋개다리)는 『춘향전(春香傳)』사설에도 등장하는 교통로이다. 부적면이라는 이름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당시 부인처면(夫人處面)과 적사곡면(赤寺谷面)이 일부 합친 데서 유래한다. 부인처면은 고려 초 어느 부인이 살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지금의 부적면 부인리가 그 부인이 거주하던 곳이고, 부인당은 바로 이 부인을 기리는 당집이라고 전한다.
지밭이란 자연마을 명칭은 제전(祭田)에서 나왔다. 이는 부인당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이다. 부인당의 제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땅으로 부인리 부근 전체라고 전한다. 지금의 지밭에서 등불이 비치는 곳까지 이른다고 한다.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인근의 광석면 왕전리(旺田里)도 태조 왕건과 연관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부인당의 주인공은 조영부인(窕英夫人)으로 보인다. 부인당의 위패에도 조영부인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전설에서도 그러하다. 조영부인은 왕건이 견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그가 삼한을 통일할 인물임을 예언한 무당할머니이다. 왕건은 이 노무(老巫)에게 보은(報恩)의 뜻으로 이 일대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와 관련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본읍에 머물게 했다. 그때 이곳에서 왕건은 몸에 삼목(三木)을 지고, 머리에는 큰 되를 이고서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왕건은 근처에 한 늙은 할머니가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친히 가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노파는 일이 있어 출타 중이었다. 노파는 외출하기 전에 자신의 딸에게 이르기를 ‘오늘 늦게 귀인(貴人)이 오실 터이니 너는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그 분을 머물게 있게만 하되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일렀다.
과연 늦게 왕건이 와서 꿈 이야기를 물었는데, 노파의 딸이 함부로 불길한 징조라고 말해주었다. 왕건은 좋지 않은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잠시 후 노파가 돌아와서 딸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 딸을 시켜서 왕건을 뒤쫓아가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왕건이 오자 노파는 점괘를 풀어보고 대(大) 길몽(吉夢)이라고 풀이해주었다. 삼목을 진 것은 ‘임금 왕(王)’ 자요, 큰 되를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요, 깊은 물에 들어간 것은 용담(龍潭)을 본 것이라 하였다. 왕건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대 말과 같이 된다면 그대의 공(功)을 잊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그 후 왕건은 전전승승(戰戰勝勝)하여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이 할머니에게 ‘조영부인’이라는 봉작(封爵)을 주고 오늘날의 왕전(旺田)과 제전을 하사해주었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후손이 없어 근방의 동민들이 부인당이란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이곳을 ‘부인처면’이라 명하고 그 동리를 ‘제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인당에 모셔진 이곳의 산신은 매우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상주(喪主)를 비롯하여 조금만 부정한 사람이 지나가도 다리가 부러졌다. 더욱이 말을 탄 사람이 하마(下馬)하지 않으면 말다리가 부러지거나 승마(乘馬)했던 사람이 앉은뱅이가 되기도 했다. 한편 산신에게 정성껏 소원을 빌어서 아들을 낳은 사람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이 매우 영험하기에 두려워했고, 평소에는 부근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옛날 일이 되었다. 한여름에 마을 사람들은 부인당 근처에 자리를 펴놓고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밤에는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들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부인당의 옛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논산시의 지원금으로 개·보수된 부인당은 흙벽에 시멘트를 덧바른 뒤 백색 페인트로 칠하고, 벽돌로 담을 둘렀다.
과거에는 음력 정초가 되면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 중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사람으로 세 명의 제관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제관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한 명의 제관만 선출한다. 옛날에는 제관으로 뽑히면 이레 동안 집 밖 출입을 삼가고, 부정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정성이 부족하면 산신제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관이 죽거나, 까치·참새 등이 집집마다 문이나 창문을 쪼기도 했다고 전한다. 며느리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시아버지가 제관을 맡아 산신제를 모셨다가 탈이 나기도 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제의 사흘이나 일주일 전에 음식을 마련하는 사람의 집 삽짝(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웠다. 금줄에는 종이를 잘라서 끼우고, 황토는 삽짝 양쪽에 세 무더기씩 놓았다. 이렇게 정성을 드리는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도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제비(祭費)는 마을의 동답(洞畓)에서 나오는 소출로 충당하였다. 과거에는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다녔다. 제물로는 시루떡·쇠고기·통명태·나물·메·탕·술 등을 올린다. 떡은 시루떡으로 마련하며, 나물은 한 가지나 세 가지로 짝을 맞추지 않는다.
제사 당일 밤 10시경이 되면 산신제를 지낸다. 과거에는 자시(子時)에 지냈지만 점점 이른 시간에 지내고 있다. 메는 부인당에서 직접 솥에다 지었고, 각종 제물은 백지에 하나하나 싼 채로 제관 집에서 날라 왔다. 제사는 분향(焚香)-재배(再拜)-헌작(獻爵)-재배-독축(讀祝)의 순으로 진행된다. 과거에는 제물을 모두 진설하면 징을 쳐서 제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징 소리를 들으면 시루를 장광에 가져다놓고 정성을 드리는데, 이를 ‘마짐시루’라고 한다.
산신제의 마지막에는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올려준다. 이렇게 제의가 끝나면 제관 일행만 음복(飮福)을 한다. 제관은 1년 동안 문상(問喪)을 하지 않는 등 일체의 부정을 가린다. 일반 동민(洞民)들도 음복을 하면 세 달 동안은 부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탈이 났다. 만일 제물이 일부 남는다 해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마을 앞의 노성천에 흘려보냈다.
[부적면 마구평리의 제당과 오모내다리]
마구평은 옛 연산군 부인처면·평천면 지역이었다. 역마를 돌보는 마구간이 있다고 하여 마구들·마구평이라고도 불린다. 일설에는 지형이 풍수상(風水上) 구마동식(九馬同食) 형국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논산군 부적면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역촌(驛村)이었던 이곳에는 많은 관리들이 거쳐 지나갔다. 이곳에 1876년(고종 13)과 1891년(고종 28)에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조병식(趙秉式)의 애민비(愛民碑)가 세워져 있다.
마구평리는 부적면소재지로 각종 기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 일대의 황무지가 개간되어 농지가 조성되고 수리시설도 들어섰다. 마구평 수리조합이 그것이다. 마구평리에는 오목내가 있는데, 여기에 다리가 있었다. 고려 때부터 송도(松都)로 가는 주요 교통로이었기 때문에 제당(祭堂)도 짓고 매년 장승제도 지냈다 한다. 지금은 아호리에 다리가 설치되고 도로도 그리로 나 있다. 따라서 제당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였다.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있다. 고려 때의 일이다. 부적면 마구평리에 ‘오모내다리’라고 부르는 교각(橋脚)이 있었다. 전라도에서 송도로 가려면 이 다리를 통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당시 이 다리 근처의 주막에 주모의 딸로 미모가 뛰어난 처녀가 있었다. 마땅한 혼처가 나서지 않는 가운데 떠돌이·노름꾼·바람둥이들의 희롱이 잦아지자, 이 처녀는 어느 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 처녀는 원혼(冤魂)이 되어 밤에 이 다리를 지나는 남자들을 물에 빠뜨려 죽게 하였다. 어느 날 담력 있는 장군이 밤에 이 다리를 지나다가 처녀 원혼을 만났다. 그녀는 장군에게 나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남자들이 제사를 지내주면 다시는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장군이 그렇게 하자 원혼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부적면 아호리의 제당과 장승]
일제강점기에 부적면 아호리 다리뜸마을에는 마구평 구룡리에서 옮겨온 후토(后土) 신당(神堂)이 있었고, 장승도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다리를 가설할 즈음에 일본인 관헌(官憲)들이 제당과 장승을 무너뜨리고 뽑아버렸다. 그 이후로 후토 신당의 제사는 폐지되었지만, 장승제만큼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장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자시에 지냈다. 제관은 2명을 뽑았고, 제비는 걸립(乞粒)을 하여 마련하거나 마을 공동 기금에서도 충당하였다.
쌀은 직접 절구에 빻은 햅쌀로 준비하였고, 메도 옹기솥을 이용하여 숯불로 지었다. 장승은 이미 없어졌어도 예전의 장승거리에 나가 제사를 모셨다. 소지는 대한민국·대한국군·충청남도·논산군·부적면 소재의 각 리(里) 순서로 올렸다. 보름 전날은 집집마다 다니며 풍물을 쳐주고 놀았고, 대보름에는 제관 집에 모여 먹고 마시며 하루를 즐겼다.
[은진면 교촌리 망북동의 서낭목]
교촌리 망북동(望北洞)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서낭제와 거리제를 지낸다. 서낭제의 대상은 마을의 동쪽 끝에 있는 팽나무이다. 나무의 둘레는 약 2.5m, 수고(樹高) 약 10m이다. 지금은 시멘트로 제단을 조성해놓았으며, 주변에 돌무더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서낭나무로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거리제는 서낭나무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마을로 향하는 조그마한 소로(小路)에서 지낸다.
서낭제를 지내는 팽나무 앞의 도로는 유래가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호남대로는 교촌리와 관촉사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곧 이 길이 역로(驛路)였다.
이 팽나무 서낭목이 역로의 이정표 역할을 했었다고 전한다. 이곳을 지나갈 때는 누구나 돌을 던지거나 간단하게 정성을 드리고 갔다. 또한 상여가 지날 때도 잠시 멈추고 제물을 진설하여 노제(路祭)를 지냈다. 지금도 일부의 주민들은 술 한 병이라도 사서 서낭목에 올린다. 서낭제와 거리제는 1970년대 말 잠시 중단되었다가 1980년대에는 제사를 모셨다. 그러다가 1990년대 전후부터는 다시 지내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는 마을의 노인회, 부녀회, 그리고 마을 이장과 총무가 중심이 되어 서낭제를 지내고 있다. 과거에는 무당이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문제로 무당은 초빙하지 않는다.
제관들은 서낭제를 지내기 사흘 전부터 부정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한다. 이때 마을에 죽은 부정이 발생하면, 사흘 후에 부정이 가시고 난 뒤 다시 택일하여 서낭제를 지낸다. 제일(祭日) 당일에는 서낭 주위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팽나무에 금줄을 걸어준다. 제물로는 돼지머리·떡·삼색실과·통명태·미역·나물·메·탕·술 등을 마련한다. 떡은 시루떡으로 두 시루를 준비하며 나물은 세 가지로 준비한다. 술은 막걸리로 마련한다. 서낭제를 지내는 제물은 그릇에 조금씩 덜어놓지 않고, 푸짐하게 그릇째 놓는다. 제비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제관들은 제사 당일 저녁 7시 즈음이 되면 제물을 준비하여 팽나무 앞으로 간다. 늦은 시간에 서낭제를 지내면 참가하는 사람들이 적어 일찍 지낸다. 제물을 진설하고 큰 양재기에 쌀도 가득 놓는다. 마을 사람들은 쌀그릇에 각자의 초를 꽂고 간단한 기도를 한다. 이때에 불밝이쌀을 개인이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노인회장이 제관이 되어 헌작·재배하고 독축한다.
다음으로 서낭소지를 올리고, 대동소지를 올려준다. 그리고 나이 순서대로 각 가호의 대주소지를 올린다. 서낭제에는 교촌리 망북동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도 참석한다. 서낭제를 마치면 제관 일행은 제물을 준비하여 거리제당으로 간다. 제물은 서낭제와 같지만 그릇에 조금씩 덜어놓으며, 돼지머리 대신에 돼지고기를 올린다. 특이하게도 이 마을에서는 거리제를 지낼 때 동민들이 참석하지 않는다.
[노성면 교촌리의 장승]
노성면 교촌리 앞길은 조선시대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길목으로 이정표(里程標)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 아주 오래 전에 노표(路標) 장승과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지금도 이곳을 ‘장승백이’, 또는 ‘주막거리’라고 부른다. 이곳 교촌리의 장승을 흔히 ‘윗장승’이라고 불렀던 것에 반하여, 노성면 내리 사이에 있었던 장승은 ‘아랫장승’이라고 했다. 또한 당시에는 장승 옆에 오리를 앉힌 짐대도 있었다.
[채운면 야화리의 원목다리]
채운면 야화리(野花里) 서남쪽에 있는 원목다리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던 분계교(分界橋)로서 일명 ‘원항교(院項橋)’라고도 불린다. 1900년에 홍수로 파괴된 다리를 승려 4인이 공사비를 갹출하고 지역민들이 협조하여 다시 가설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던 분계교인 원목다리는 화강암으로 만든 세 칸의 홍예문(虹霓門) 석교(石橋)로 구성되었다. 정상부의 종석(宗石) 양 끝에 용두(龍頭)를 새기고, 홍예 사이는 치석재(治石材)와 잡석(雜石) 등으로 채웠다. 규모는 16m, 폭 2.4m, 높이 2.8m이다. 원목다리 동쪽 길가에는 1900년 10월에 세워진 원항교 개건비(院項橋改建碑)가 있다. 원목다리는 1973년에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채운면 장화리 장급마을 앞길]
채운면 장화리(長花里)의 장급마을 앞길은 조선시대에 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육로(陸路)로는 가장 큰 길이었다. 미내다리(또는 미나다리)와 원목다리를 지나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손이 많았다. 몸이 불편하거나 노자가 여의치 않은 길손들은 부유했던 이곳 장급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채운면 야화리 삼거리의 미내다리]
강경읍에서 채운면 야화리 사포 방면으로 약 1㎞쯤 올라가다 보면 제방 밑에 홍예문 모습의 돌다리가 세 개가 있다. 삼거리 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셈이다. 춘향이와 이 도령이 건넜던 호남대로 길목의 석교(石橋)인 이 다리가 호남대로로 들어서는 미내다리이다. 지금은 고속도로와 철도로 인하여 쓸모없이 되어버린 돌다리이지만, 춘향이와 이 도령이 건넜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내다리 비문(碑文)에 의하면 이 다리는 1731년(영조 7) 4월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큰 내가 있어서 조수(潮水)가 드나들고, 장마철이나 눈이 많이 오면 교통이 막히고 인명 피해가 많았으므로, 강경에 사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승려 미내가 감독하여 1728년(영조 4)에 미내다리를 건설하였다고도 한다. 당시 미내다리 위에는 돌난간을 두르고 여기에 호랑이와 용을 세밀하게 조각하여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 늘 감탄했다고 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달이 뜨면 한 해 동안의 건강과 소원 성취를 위하여 여기에서 다리밟기를 했다. 또한 속전(俗傳)에 이 지역 사람들이 죽으면 염라대왕이 “생전에 ‘은진미륵’과 ‘개태사 큰 솥’과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하여, 누구든지 반드시 한 번쯤은 보아야 할 것으로 여겼다. 미내다리는 1973년에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춘향전』을 통해서도 이몽룡이 지나갔던 길로 추정할 수 있다. 『춘향전』에는 이 도령이 장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명을 받고 한양에서 전라도로 향할 때 지나가는 길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곧 “청파역에서 말 잡아타고 남태령을 넘어 과천에서 점심 먹고 …(중략)… 천안읍에서 점심 먹고 …(중략)… 공주 금강을 건너 금영에서 점심 먹고, 경천에서 숙소하고 노성, 풋개, 사다리, 은진, 까치다리, 황화정, 장어미, 여산읍에서 숙소하고 …”라는 대목이다.
미내다리는 은진 까치다리와 강경 황화정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 도령은 아마도 이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또한 『춘향전』의 이 사설 대목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오는 이 지역 주요 교통로와도 일치한다. 곧 공주(40리)-경천역(10리)-노성(10리)-초포교(10리)-사교(10리)-은진(30리)-여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 강경포구]
근대교통 시설이 발달하기 이전에 지역 간 물화교역은 육로보다는 수로에 의한 비중이 더 컸다. 따라서 자연히 포구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고, 그 주변에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충청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금강은 충청 지역과 전라도 북부 지역의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다. 금강 하류에 집결된 세곡은 서울로 운반되었고, 이곳 주변에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강경은 조선 전기까지 은진현의 강경대(江景臺)라는 작은 야산에 불과했으나, 포구로 개발됨에 따라 전국적인 대규모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공주와 전주·청주 등에 대규모 장시가 형성되었지만, 모두 강경포구의 장시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호남과 충청을 잇던 수운 교통로였던 강경은 수로를 통해 교역되는 상품을 지역 유통권 내에 분배하는 기능을 맡음으로써 전국적인 대시장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강경포구의 물품들은 강경포구를 거쳐 다시 공주·전주 등 인근 각지의 대장시로 분산되었는데,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권은 북으로 노성을 거쳐 공주에 이르고, 남으로 여산·삼례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다. 강경에서 들어오는 길을 따라서 호남대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