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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726
한자 後三國統一-紀念碑的寺刹-開泰寺
영어의미역 Gaetaesa Temple and the Unification of Later Three Kingdoms by Goryo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계백로 2614-11]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갑동

[개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위치한 개태사고려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인 936년에 후백제의 옛 수도 부근이자 바로 후백제를 항복시킨 역사적인 장소에 창건한 후삼국 통일의 기념비적 사찰이다. 고려로서는 일종의 전승 기념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개태사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개태사 창건 배경과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의 양식과 특징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고려 태조 왕건이 918년 왕위에 즉위하자, 이를 관망하고 있던 견훤태조 즉위 두 달 만에 일길찬(一吉粲) 민합(閔郃)을 보내와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후 둘 사이에는 평화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920년(태조 3) 신라의 구원 요청으로 고려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평화는 깨지고, 둘 사이가 소원하게 되었다. 924년(태조 7)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康)양검(良劍) 등을 보내어 조물군(曹物郡)을 공격하였다. 이에 태조는 장군 애선(哀宣)왕충(王忠) 등을 보내 구원하게 했다. 이 전투에서 애선이 전사했으나 견훤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조물성 전투에서 양군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양국은 서로 인질을 보내 화친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고려에 인질로 와 있던 진호(眞虎)가 죽자 견훤고려의 인질 왕신(王信)을 죽이고 웅진으로 진군하였다. 이어 견훤은 927년(태조 10)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였다. 이때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남하하였다. 견훤은 신라에서 돌아오다가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에서 왕건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여기서 왕건은 대패하여 목숨만 겨우 건졌다. 견훤의 입장에서는 909년 덕진포(德津浦) 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 전투는 오히려 왕건이 신라인들의 민심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목숨을 걸고 신라를 도우려 했다는 평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3년 뒤 고창군(古昌郡, 안동) 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게 되었다. 이후 후백제의 내분으로 견훤고려에 귀순해왔다. 고려와 신라의 연합 세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순왕도 곧 이어 나라를 왕건에게 바쳤다. 마침내 936년 왕건견훤은 같이 출정하여 후백제신검을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의 마지막 통일 전쟁과 개태사 창건 배경]

고려 태조 왕건이 후고구려인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한 것은 918년이었다. 왕건후백제와 신라를 때로는 교묘히 조종하고 때로는 후백제와 힘겨운 전쟁을 치르면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왕건고려를 건국한 지 18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이 쾌거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독자적으로 충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라 말부터 각 지방에 대두한 지방 호족들과의 균형에 입각한 세력 규합을 성공적으로 성취시킨 덕분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호족 세력이나 나라를 바친 신라는 물론, 끝까지 쟁패를 다투었던 후백제견훤이나 신검까지도 용서해 주었으며 고차원적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한편으로는 왕건백제의 옛 땅에 대해서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민심의 수습도 계속 행하도록 하였다. 이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개태사의 창건이라고 할 수 있다. 개태사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인 936년에 후백제의 옛 수도 부근이자 바로 후백제를 항복시킨 역사적인 장소에 창건한 후삼국 통일의 기념비적 사찰이다. 개태사를 왜 창건했는지는 태조가 손수 지었다는 발원문(發願文)에 잘 나타나 있다.

발원문을 보면 첫째, 개태사태조의 명에 의해서 국가가 직접 창건한 사찰, 이른바 국찰(國刹)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성격의 국찰은 대개 수도였던 개경에 주로 창건하였는데, 지방에 세운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하겠다. 둘째, 개태사후백제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념하고자 하는 뜻에서 창건한 것이며, 불력(佛力)의 힘으로 후백제의 땅이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뜻에서 창건했다는 사실이다. 즉 후백제 옛 땅의 민심을 수습하고 동향을 감시하고자 한 것이다. 사찰 이름은 국가의 태평을 연다는 뜻에서 개태사라 불렀고, 후삼국 통일이 불(佛)과 하늘[天]의 보호에 의해 가능했다 하여 산의 이름도 천호산(天護山)이라 했다. 따라서 개태사는 통일 고려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 태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창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후백제가 멸망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견훤의 맏아들인 신검 계열과 넷째 아들 금강 계열의 갈등과 대립을 꼽을 수 있다. 이 여파로 견훤은 스스로 고려에 가서 복종하게 되었고, 이것이 후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견훤고려에 복종하면서 후백제의 내부는 더욱 분열되었고, 박영규 같은 장군도 스스로 복종 의사를 밝혀왔다.

후백제 내부 사정에 정통해 있던 견훤후백제를 치도록 왕건에게 청하였다. 견훤의 도움으로 왕건은 군대를 출동하여 후백제 신검을 격파할 수 있었다. 견훤을 따르던 후백제의 장수들이 항복하였고, 신검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하여 승리하였다. 군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또 일시적으로 패했던 신검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내응(內應)으로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황산군(연산)까지 도망하여 결국은 항복하는 신세가 되었다. 따라서 신검 계와 견훤·금강 계가 대립하였다 하더라도 견훤고려에 스스로 복종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신검이 패하여 후백제가 멸망한 직후 견훤도 운명을 다하였다.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이다. 견훤의 최후에 대해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즉 “왕이 친히 견훤의 책사인 능환을 불러 꾸짖기를 ‘처음부터 양검 등과 모의하여 임금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너의 짓이다. 신하된 의리로서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니 능환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왕은 드디어 명을 내려 능환의 목을 베었다. 양검(견훤의 둘째아들)·용검(견훤의 셋째 아들)은 진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에 죽였다. 신검은 왕위를 찬탈한 것이 다른 사람의 위협에 의한 것이고, 죄가 두 아우보다 가벼우며 항복하였다 하여 특별히 죽이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 이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황산의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견훤왕건신검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해 근심하고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사실로 믿는다면 견훤은 자신을 금산사에 가둔 신검을 죽도록 미워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견훤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억울하고 분하여 등창이 나 수일 만에 황산의 어느 불사(佛舍)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왕건 일행은 후백제의 수도 전주에 입성했으나 견훤은 이들과 동행하지 않았다. 견훤이 병 때문에 동행할 수 없었다는 사정도 고려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왕건이 같이 가자고 청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는 왕건견훤의 이용 가치가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추측한다면 왕건견훤을 죽게 내버려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견훤이 죽은 황산의 불사는 어디였을까?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어디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견훤이 죽은 절이 연산현의 동쪽 5리에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천호산 부근에 있는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황산에는 개태사를 비롯하여 불암사·상암사·만운사·고운사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불암사·상암사·만운사는 계룡산에 있는 절이었고, 개태사고운사천호산에 있었다. 계룡산은 연산의 북쪽에 있으므로 불암사·상암사·만운사는 견훤이 죽은 절이 아니다.

천호산이 연산의 동쪽이므로 견훤이 죽은 사찰은 개태사고운사일 가능성이 있다. 개태사는 936년 공사가 시작되어 4년 만인 940년(태조 23) 완공되었다. 고운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고운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다면 이 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확언할 수 있는 자료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개태사가 바로 견훤이 죽은 장소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즉 개태사가 936년 처음 창건된 것이 아니고, 이미 있던 절을 허물고 다시 창건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부처님이 붙들어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관사(官司)에 명하여 불당[蓮宮]을 창조하였습니다. 이제 그 공역(工役)을 마치고 보찰을 일신하여[一新寶刹] 우러러 하늘의 도움을 잇고, 엎드려 신령의 공덕에 힘입어 천하를 맑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고로 천호(天護)로서 산의 이름을 삼고 개태(開泰)로써 절의 이름을 삼았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사료는 940년(태조 23) 개태사가 완성되자 왕건이 직접 지은 발원문의 내용이다. 그런데 기록을 자세히 보면 “창조연궁(創造蓮宮)”이란 표현의 뒤에 “일신보찰(一新寶刹)”이란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이는 “보배로운 사찰을 일신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신’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신은 “아주 새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기존에 있었던 것을 창조하다시피 새롭고 웅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기존에 조그만 사찰이 있었는데 이를 다시 전면 개축 내지 증축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사찰이 견훤이 머무르다 죽은 사찰일 가능성을 짙게 해준다. 김정호견훤이 죽은 사찰이 개태사라고 못 박고 있다.

그렇다면 왜 왕건이 이 사찰을 전면적으로 일신했을까? 그것은 그곳이 신검의 항복을 받은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견훤이 머무르다 죽은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못하면 후백제 잔존 세력의 정신적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사찰을 그대로 둔다면 후백제 왕이 죽은 곳이라 하여 후백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참배할 것임은 틀림없다. 이는 왕건고려 통치에 위험한 요소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사찰을 부수고 새롭게 고려식으로 재창건한 것이다.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을 통해서 본 개태사 창건의 의미]

개태사 창건의 뜻은 개태사에 조성한 삼존석불입상의 형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불상들은 부처님의 온화한 모습을 전혀 띠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갑옷 입은 무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머리가 큰 편이고 어깨가 벌어진 상체를 갖고 있으며 손은 육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후백제 세력을 위압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태사 창건의 뜻과 부합한다고 하겠다.

개태사지 석불입상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제작한 작품이다. 때문에 통일 후 고려왕조 최초의 불상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또 제작연대(970~1006년)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고려 전기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의 현황과 양식적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개태사 삼존석불입상은 원래의 봉안 장소로 생각되는 지금의 법당 자리에 복원해놓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그 자리에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2~3부분으로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모두 복원해서 현재는 완전한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다만 광배(光背)만은 애초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1. 본존불상의 특징

개태사지 석불입상 중 본존불상은 사각형 연꽃대좌 위에 서있는 거불의 입상이다. 상현좌(裳懸座)까지 합쳐 451㎝인데 1장 6척인 475㎝에 근사한 수치이므로, 아마도 장육불상(丈六佛像)으로 만든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 육계(肉髻)는 낮고 작으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머리는 원형을 이루면서 얼굴과 연결되는데, 여기에 표현된 나발(螺髮)이 거의 마멸되고 몇 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얼굴과 머리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아서 눈에 선 느낌을 준다. 육계를 제외한 전체 머리 모양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지만, 얼굴만 보면 이마에서 눈 꼬리 부근의 폭은 안면이 넓고, 턱으로 내려올수록 좁아지는 역삼각형 얼굴이어서 특이한 개성을 보여준다.

이런 얼굴은 기본적으로 충청남도 청양군 소재 장곡사 철불좌상의 얼굴과 비슷하지만, 눈꼬리 부근이 상당히 팽창한 듯 표현되고 있다. 이는 얼굴에 비해서 눈이 유난히 크고 길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 이 눈은 거의 꼬리 부근까지 확대해서 두드러지게 했기 때문에 불안(佛顔)으로서의 발랄한 생동감이 없어지고 가면 같은 얼굴 특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머리와 눈까지의 이마는 유난히 좁은 데 비해서 백호(白毫)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눈과 이마 사이를 전체의 얼굴에 비해서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즉, 코는 작고 짧으며, 입은 코에서 인중이 두드러져 내려오다가 곧바로 형성한 것으로 작고 빈약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러한 코와 입은 9세기 후반기 불상에서 흔히 표현된 특징인데, 경상남도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등의 불상얼굴과 친연성(親緣性)을 가지고 있다. 또 얼굴에 비해서 유난히 커다란 귀를 얼굴 좌우에 무의미하게 붙여놓은 듯한 모양은 서로의 친연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시대적 접근에서 오는 특징이라 보인다.

목은 귀와 연결되면서 가슴으로 연장되고 있어서 둥글면서도 굵은 편인데, 이것은 커다란 머리의 중량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표현되었을 것이다. 신체는 거의 원통형에 가까운 체구이다. 어깨 너비와 발목께의 너비가 거의 비슷하거나, 발목 부근이 더 넓은 편인 불균형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굴곡이 거의 배제되어 있어서 조각가가 추구하고 있는 감각은 괴량감(塊量感)을 강조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어깨를 들어낸 상체가 거의 둥글게만 처리되어 신체의 굴곡이 표현되지 않았다.

이러한 원통형 신체에 비해서 손과 발이 유난히 큼직한 점 역시 본존불상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왼손을 배에 대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인(印)을 한, 두 손은 모두 약간씩 구부려 변화를 주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들이 거의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조잡하게 복원하였고, 오른손은 중간의 세 손가락 끝이 절단되었다. 두 발은 유난히 큼직한 편인데, 투박한 두발은 발등까지 상의(裳衣) 자락이 덮었고 발가락들만 보이지만 묵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투박스러움은 불의(佛衣)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불의는 왼팔과 가슴의 일부만 가렸을 뿐 상체를 거의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 너머로 해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나온 대의(大衣) 자락은 무릎까지 덮으면서 왼쪽 허리를 돌아가는데, 왼쪽으로 이 자락을 잡은 것처럼 한 착의법(着衣法)이다. 어깨에서 배로 이어진 대의 깃은 띠주름을 이루었고, 팔의 옷주름은 돌출 의문(衣紋)이다. 전면의 의문은 매우 성근 완만한 곡선의 돌출 의문으로 착의법과 함께 투박하고 도식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 아래 발목 부근의 옷은 상의인데 세로의 평행층단식 주름을 표현하고 있어서 이 역시 불의와 함께 도식적인 처리라 하겠다. 이러한 불상의 특징은 창녕 인양사비 조사상에서부터 나타나는 것 같다. 인양사 조사상은 통견이고 앞면의 가사가 좀 더 촘촘한 것과 함께 다소 세련되었다는 점이 다르지만, 특히 상의의 평행층단식 주름 같은 것은 친연성이 매우 짙은 것이어서, 개태사 불상의 특징은 9세기 초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좌(臺座)는 4각형인데 하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좌의 중심은 복련(伏蓮)이 새겨진 것이다. 이 연꽃무늬는 빗긴 것으로 이런 모양의 연꽃무늬 4각형 대좌는 역시 9세기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 연꽃은 꽃 테두리를 굵은 띠 모양으로 만든 특이한 것으로, 신라 후기 형식과는 다른 것이다. 10세기경의 부도탑에 이런 무늬가 나타나지만, 충청남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머리 관석연화문(冠石蓮花紋) 등과 매우 비슷한 것이어서 동일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우협시보살상의 특징

우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서인지 귀로 돌아 내려간 머리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깨까지의 신고(身高)는 263㎝인데 무릎 부분의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복원해놓았으므로 머리와 함께 세 부분으로 절단되었을 것으로 본다. 어깨만 약간 움추린 듯하지만 우견편단(右肩偏袒)한 상체는 가슴이나 어깨의 굴곡을 제법 표현해서 본존불상과는 조금 다른 수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광주 철불좌상 정도로 굴곡진 것은 아니지만, 충청남도 청양 장곡사 철불좌상이나 충청북도 괴산 각연사 석불좌상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허리도 제법 표현되었지만 하체는 본존과 비슷하게 굴곡이 거의 없는 원통형 괴체 모양이다. 신체와 연결된 두 발은 동일하게 큼직한 사자 발 형태이다. 손 역시 발과 같이 신체에 비해서 큰 편인데,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였지만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굽혔다. 오른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하였는데 엄지 외에 네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 쥔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천의(天衣)는 그 자락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체의 천의자락은 어깨로 해서 오른쪽 허리께로 비스듬히 내렸으며, 양 손목을 감은 천의자락은 배와 무릎 부근에 U자 옷주름을 만들었다. 배 부근의 U자 옷주름은 어깨에서 내린 자락 속으로 들어갔고, 양 손목에서 좌우로 내린 자락은 평행단층식을 형성하면서 광배 모양을 형성하였다. 또한 상의(裳衣)는 허리띠에서 내린 자락이 U자로 되었는데, 끝단으로 화문을 새겼으며 무릎 아래로 U자형 주름을 짓고 있다. 이것은 개태사의 무릎 꿇은 공양보살상이나 강원도 강릉 한송사지 보살좌상의 것과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는 왼쪽 허리에 일부만 보이는데 U자 모양의 고리로 구성되었으며, 좌우로 벌어지면서 수술을 만들었다. 좌우 팔에는 팔찌를 장식하였는데, 연꽃무늬를 좌우로 겹치고 중앙을 고리로 고정하였으며, 연꽃무늬나 고리 장식 등은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왼쪽 손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는데 꽃무늬 장식을 중간 중간에 새겼으니 이 꽃무늬는 상의에 새겨진 꽃무늬와 비슷하다. 하체 좌우 평행계단식(平行階段式) 세로선 옷자락 주름의 외양부는 새끼를 꼰 듯한 새끼무늬를 새겨 장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비교적 정교한 장식무늬들이 새겨진 것은 투박한 본존불과 대비하면 상당히 정성 들여 제작한 불상들임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어서 태조가 친히 발원해서 조성한 석불상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이 불상이 다른 두 불상에 비해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은 이 불상 조성 연대의 차이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이 불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에 왕실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고, 다른 두 불상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기의 차이가 아니라, 단순히 조각가의 수준 차이로 볼 수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3. 좌협시보살상의 특징

여러 가지 형식면에서 좌협시보살상은 우협시보살상과 흡사한데, 좌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체 조각의 고찰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좌협시보살상의 머리 부분은 매우 긴 편으로, 관 모양의 머리칼을 높게 들어 올린 모양이다. 중앙이 갈라져 머리칼 모양을 이루었지만 다른 부분에는 머리칼을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이마 테두리를 따라 머리칼을 나발 모양으로 나타내고, 이 끝이 연장되어 두 귀 중심부를 감아내려 어깨까지 내려왔다. 이런 식의 머리칼 표현은 약간의 모양이 다르지만, 충청남도 부여군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이 세 불상은 지역적인 면에서나 형식적인 면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겠다.

얼굴 역시 긴 타원형인데 기본형은 본존 얼굴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갸름하면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에 비해서 코나 입이 비교적 큼직하고 눈은 본존에 비해서 가는 편이지만, 역시 본존 얼굴의 세부표현 기법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 같다. 이러한 얼굴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얼굴에 표현된 턱의 군살, 팽창된 뺨으로 이루어진 비만형과는 달리 턱이 날씬한 타원형 얼굴인 점이 다르지만 조각수법은 유사한 점이 많다. 또한 두 귀는 본존과 같이 어깨까지 드리워진 길고 큼직한 모양인데 이것은 본존과 동일한 기법이다.

신체 표현은 양 보살상과 흡사하지만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시무외인을, 왼손은 올려 여원인을 하고 있지만 손가락들을 모두 구부린 변형이라는 점이 약간 다를 뿐이다. 또한 상의자락에 표현된 꽃무늬나 팔찌, 그리고 좌우 새끼 모양 장식 등이 새겨지지 않았고 허리띠 매듭과 왼쪽어깨에서 비스듬히 내려진 천의자락 등에서 약간의 변형이 나타난 점이 좀 다를 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람찬 세 구의 삼존석불상이 거의 나란히 서 있는데, 보살의 높이는 본존불상의 눈높이와 비슷하여 시각적인 면에서 월등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불상에서 양식적 특징으로 가장 두드러진 점은 형태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원적 추상성이 나타나고 있다. 즉, 어깨 너비와 하체(종아리 부근) 너비가 비슷한 원통형의 체구, 손발이 유난히 큼직한 불균형, 얼굴에 비해서 기형적으로 큰 귀와 눈 등으로 일변 투박하고 둔중한 형태이면서 한결 도식적 추상성도 보인다.

이처럼 이 불상은 통일신라 양식의 특징인 육감적인 풍만함이나 긴장된 탄력성 같은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까지도 배제된, 새로운 둔중한 불상 양식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둔중하고 도식적인 추상성만 표현된 것은 아니다. 보살상에서 보이듯이 꽤 장식적이고 정교한 특징도 보이며, 얼굴에는 공양보살상처럼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사실주의의 특징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들 삼존, 특히 본존불상의 분위기는 이상적 불격(佛格)보다는 세속적인 인간화가 더욱 짙어졌으며, 도식적이고 일종의 추상성까지도 보이는 후삼국 내지 고려적인 새로운 불상 양식인 것이다.

이 점은 형태면에서뿐만 아니라 선의 면에서도 지적할 수 있으니 비록 정교하고 치밀한 점이 있긴 하지만, 둔중하고 덜 세련된 선의 흐름이 이들 조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은 아마도 10세기 이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많이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중에서도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많이 조성한 것은 태조의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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