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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411
한자 靑年運動
영어의미역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은지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중심의 민족운동.

[개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의 각 지방에는 근대식 학교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한 지역 청년들에 의해 각종 청년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군이나 면 혹은 동리 단위로 청년수양단체를 결성한 뒤 야학·생활 개선 등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과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활성화된 이러한 각종 인격수양운동·품성도야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은 일종의 신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청년운동 내부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됨과 더불어 청년운동의 성격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에 조직된 상당수의 청년단체들이 1925~26년경부터 혁신총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조직의 강령과 규약을 바꾸는 등 사회주의적 경향을 띄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이러한 혁신청년회들은 지역사회 내에서 청년총동맹 산하의 혁신청년회, 조선농민총동맹이나 조선노동총연맹 산하의 농민·노동조합, 신간회, 근우회 등의 결성을 통하여 당시의 관료-유지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민족·민중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논산 지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논산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요 청년운동단체, 청년운동단체 조직혁신 및 연대운동, 주요 청년운동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변천]

논산 지역의 청년운동단체들이 정확하게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1920년 1월의 강경청년회 총회 개최 기사, 1920년 5월의 논산청년구락부의 지역 보통학교 강연회 개최 기사, 1921년 12월의 박영채, 김창규 등의 주도에 의한 양촌면 양촌리 노동수양회 창립 기사 등으로 미루어 논산 지역에서도 3·1운동 전후 시기부터 청년단체의 활동이 어느 정도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조직적이고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청년단체들의 설립은 1920년대 초반의 각종 사회단체들의 설립과 더불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청년단체로는 강경청년회를 비롯하여 1922년 2월에 설립된 양촌면 인천청년회, 1923년 4월에 설립된 논산청년회, 1926년 7월에 설립된 논산군 연산청년회, 1926년 10월에 설립된 상월면 노동청년조합, 1927년 3월에 설립된 성동면 노동청년조합, 1927년 4월에 설립된 성동면 노동청년회 등을 들 수 있다.

[조직혁신 및 연대운동]

당시 면단위로 조직되어 있던 청년운동단체들은 주로 1920년대 중반 경부터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년운동단체의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양촌면 인천청년회의 경우 1925년 10월 회무의 쇄신과 청년가맹의 건을 결의한 뒤 이른바 청년회혁신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강경청년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전임회장 윤길중 등의 전횡을 탄핵함과 동시에 조직내부를 정비하는 혁신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논산 지역 전체 청년단체들을 아우르는 군단위의 통일조직 결성에는 실패하였다.

특히 양촌면 인천청년회는 1927년 12월에 이른바 ‘쇄신총회’와 함께 전논산청년단 축구대회를 개최하여 각 청년단체의 연대를 강화함은 물론, 군단위의 전체 청년단체들의 통일조직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시도의 실패 이후로 논산 지역, 특히 강경읍논산읍의 사회단체들은 어떤 부문의 운동 단체들이든지 간에 연대 기구를 형성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청년운동가]

1929년 1월 현재 논산 지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았던 청년운동가는 양촌면 인천청년회 회장을 역임했던 장일환이었다. 장일환은 일본 유학시기 북성회에 가입한 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가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했을 때 북성회 대표자로 참여했으며 이후 저명한 공산주의자 이연윤, 박형병 등과 함께 북성회를 탈퇴한 뒤 서울청년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23년 12월 군산에 내려가 해당 지역 활동가 조용환, 김영휘 등과 함께 5개 단체를 망라하여 군산노동연맹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리에서 민중운동자동맹의 기관지인 민중운동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5년 1월 보안법위반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어 같은 해 12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며 1926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장일환은 이와 같은 중앙단위의 활동보다는 인천청년회 활동 등과 관련된 논산 지역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생각’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권영민을 비롯한 논산 출신의 활동가들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1932년 1월 출판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8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1933년 11월에 다시 검거된 후 1934년 12월 공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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