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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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田漢老孝行談 |
영어의미역 | Jeon Hanro's Filial Conduct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삼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종익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삼산리에서 전한로의 효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전한로는 조선 후기 성동면 삼산리 사람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1779년(정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정려문 현판은 ‘효자진무부위우군 사용증 승정원좌승지 전한로지문(孝子振武副尉右軍司勇贈承政院左承旨 田漢老之門)’이라 되어 있다. 전한로 효행 정려는 원래 성동면 삼산리에 있었는데, 1987년 논산 지방 대홍수로 인하여 이재민 주택 부지로 조성되면서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로 이건하였다.
[채록/수집상황]
1991년 논산문화원에서 간행한 『놀뫼의 전설』에 실려 있으며, 1994년 논산문화원에서 발행한 『논산 지역의 지명유래』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내용]
전한로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고기반찬을 원하면 해드리기 위해서 집의 앞뜰에 연못을 파고 온갖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부모가 원하면 그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아 반찬으로 만들어 드렸다. 전한로가 9세되던 해 아버지가 설사병으로 복통이 심하였는데 그 증세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전한로는, “하느님, 저의 아버님 병환을 낫게 해주십시오. 제가 죽어서 아버님 병환이 낫는다면 죽기라도 하겠나이다.” 하며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변에 혀를 대고 직접 맛을 보아 병 증세를 짐작하면서 극진히 간호를 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지극한 효성도 보람 없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전한로는 3년 동안 산소 옆에 묘막을 짓고 그 속에서 시묘 생활을 하였다.
아버지 사후에 어머니도 병이 들었다. 전한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어머니에게 좋다는 약은 다 구하다가 정성껏 달여 드렸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추위를 무릅쓰고 약을 구해 가지고 온 전한로에게 어머니가, “한로야, 앵두가 먹고 싶구나. 앵두를 먹으면 내 병이 나을 것 같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앵두가 있을 리 없었다. 전한로는 앵두를 구하려고 애태우며 다시 기도하였다.
“하느님 저의 어머니를 낫게 해주세요. 어머니께서는 앵두를 잡수시고 싶답니다.” 라며 정성을 다하여 빌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집 앞에 있는 앵두나무에 앵두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전한로는 앵두를 따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사람들은 전한로의 효심이 갸륵하여 하늘이 앵두를 열리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전한로가 13세 되던 해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전한로는 슬퍼하며 3년 동안 시묘 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지극한 전한로의 효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서 정조는 벼슬을 내려주었고, 전한로가 죽자 추증을 하여 승정원 좌승지로 삼았다. 또한 전한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전한로가 물고기를 기르던 연못 옆에 봉우사라는 정려를 세웠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전한로 효행담」의 주요 모티프는 부친의 상분(嘗糞), 모친의 앵두 구하기, 두 번의 3년 시묘살이 등이다. 검루가 아버지의 병세를 알고자 아비의 배설물을 맛보았다는 『삼강행실도』의 「검루상분(黔婁嘗糞)」처럼 전한로는 상분을 하면서까지 지극 정성으로 아버지의 병간호를 했다. 또한 어머니를 위한 전한로의 행위와 기도가 하늘에 닿아 한 겨울에도 앵두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하는 효행담을 담고 있다.
이렇게 불가능한 방법으로 효행을 하거나 흔히 기대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러야 하는 요건 때문에 효행설화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부모상에 3년간 시묘살이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전한로는 어린 나이에도 부친 3년, 모친 3년 모두 6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기에 나라에서 효자의 정려를 내렸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