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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0561
한자 農民運動
영어의미역 The Peasant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용현

[정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농민이 그 생활 조건 또는 사회적 환경의 개선을 위해 전개한 사회운동.

[개설]

일반적으로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같이 계급으로서의 농민이 스스로의 노동 조건과 경영 조건의 유지·개선·확장 또는 사회·정치적 생활 조건의 유지·향상을 위해 단결해서 행동하는 조직적 투쟁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흔히 농민조합운동, 농촌갱생운동, 농촌청년운동 등을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농민의 계급투쟁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농민운동으로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여 실패로 끝난 구한말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일제강점기의 농민운동들을 들 수 있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도 이들과 연계하여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논산 지역의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농민군의 1차 농민전쟁기에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주 화약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집강소가 설치된 이후부터 2차 농민전쟁기까지 논산 지역에서도 소규모의 동학농민군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894년 7월 6일에서 8일 사이에 연산의 동학농민군 100여 명이 연산관아를 습격하여 총과 돈, 말 등을 탈취했으며, 8월에는 노성의 동학농민군들이 노성 관아의 무기창고를 열어 군기를 탈취하였다.

논산 지역 동학농민군은 대규모 조직이기보다는 6~7명의 접주가 두령이 되고 수십 명의 부하로 구성된 소규모의 조직이었다. 연산의 접주로는 박영채(朴泳采), 은진의 접주로는 염상원(廉相元)이 활약하였으며, 노성 무기고 탈취사건의 주도자는 이인(利仁)의 동학 도집강(都執綱) 김창순(金昌順)이었다. 이후 논산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와 더불어 개최된 논산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논산에서 합류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손병희의 북접농민군이 연합하여 동학농민군 대본영을 설치함으로써 논산 지역은 제2차 농민전쟁기의 동학농민군 주력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논산대회에는 극소수였지만 이전에는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유생들도 참가하였다. 이 중 공주 출신의 유생 이유상(李裕尙), 여산부사(礪山府使) 겸 영위(榮衛) 김원식(金元植) 등은 대회 참가 전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 활동을 수행하였으나 항일의병 활동을 위해 동참한 자들이었다. 손병희가 직접 인솔하여 논산에 집결한 북접농민군 1만여 명과 남접농민군 중 전봉준의 직할 부대 1만여 명은 나머지 다른 부대원 3만여 명과 함께 같은 달 21일경 논산을 출발하였다. 노성과 공주의 경천점(敬川店)에 군영을 설치한 후 3가지 길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1월 8일에서 11일까지 4일간 전개된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패배한 농민군은 노성으로 후퇴하여 진영을 수습하였다.

다음 날인 12일 동학농민군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의 이름으로 관군과 이교(吏校) 및 백성들에게 척왜(斥倭)와 척화(斥化, 반개화당)를 내세우는 포고문의 발표와 함께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4일경 노성의 동학농민군은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가 이끄는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의 공격을 받고 논산 대촌(大村)의 원봉(圓峯)으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공격을 받게 되자 다시 황화대(皇華臺)로 후퇴하였다가 같은 달 17일 강경에서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여 전라도 전주로 퇴각하였다. 논산과 노성에서의 농민군의 패배는 우금치 패배 이후 재봉기를 준비하던 농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겨주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전반의 농민운동의 경우 논산 지역은 삼남 지역에 비해 비조직적이었으며 활발하지 못하였다. 타 지역과는 달리 논산 지역에서는 군 단위의 합법적인 농민조합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작 문제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전적으로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했을 뿐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논산 지역의 대지주들은 지주회나 조선농회, 총독부 등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하게 소작 문제를 풀어갈 수 있었다.

1923년 봄 경성 지주 윤덕영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4년 봄 유성 거주 지주 심재후의 토지에서 발생한 악사음의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1926년 봄 부적면 부황리 지주 김명수의 토지에서 발생한 소작권 이동 관련 분규 등이 발생했을 때도 논산 지역의 소작농민들의 지주와 마름의 횡포에 대한 저항은 조직적으로 전개되지 못하였다.

이후 논산 지역의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인 노성농조의 창립과 더불어 다소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12월 상월면 대명리 농민야학 회관에서 창립된 노성농조는 1927년 3월 대명농조로 개칭하고 같은 해 12월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조선농민총동맹에의 가맹, 대명 농민야학에 대한 후원, 조합원의 계급의식 각성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회원 수는 1929년 1월 현재 83명에 불과했다.

한편 당시 논산 지역에는 대명농조 외에도 채운면성동면에 면단위 농민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중 성동농민회는 1928년 봄 소작권 이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부 지주와 악사음을 직접 방문하여 경고하거나 경고문을 발송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논산 지역의 혁명적 농민운동은 합법적인 농민조합의 결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촌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5월경 경찰이 머슴계 설립을 불허하자 70여 명의 양촌면 농민들이 적기 시위를 감행하였으며 경찰이 출동하여 동지들을 검거하자 동지 방면을 위한 투쟁까지 전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양촌면 지역에서는 머슴을 잃고 폐농 지경에 이른 지주가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모두 19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권영민과 이지용을 포함한 총 1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무집행방해죄로 1933년 2월 28일 공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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