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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77
한자 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3·1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기미운동,3·1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연표보기 - 3·1운동 송산 지역 만세 시위 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 15일 - 3·1운동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 - 3·1운동 노구치 고조 척살 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3·1운동 향남면 발안장 만세 시위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3·1운동 장안·우정 지역 만세 시위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3·1운동 향남·팔탄 지역 만세 시위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송산면사무소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제암리|고주리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지도보기|팔탄면 고주리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홍효선|홍면옥|이규선|차병한|백낙열|노구치 고조|가와바타 도요타로|아리타 도시오

[정의]

1919년 3월에서 4월 사이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의 만세 운동은 등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중에는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지만, 사전 계획에 의해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 운동도 있었다. 화성 지역의 3·1운동은 공세적인 만세 시위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3·1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위 운동이다. 시위 과정에서 2명의 일본인 순사가 처단되었으며,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이러한 시위 운동에 대해 일제는 잔혹한 보복과 비인도적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은 서울 인근 지역인 경기도에 빠르게 전하여졌다. 3월 16일 수원에서는 장날을 이용한 만세 시위 운동이 있었고, 3월 23일에도 수원역 부근의 서호에서 7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과 헌병대, 소방대의 제지를 받아 해산하였다. 인천 등지에서도 3월 7일부터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인천은 송산면 마산포 항구를 통해 남양 지역과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난 곳이었다. 수원 읍내와 인천, 안산 등지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은 자연스럽게 화성 지역민들에게 전하여졌을 것이다.

이외에,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신문 보도에 의해서도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이 알려졌다. 홍효선(洪孝善)은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 돌아와 주민들에게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고, 홍면옥(洪冕玉)의 경우는 『매일신보』를 통해 소식을 접하였다고 한다. 또 일부 인사들은 종교 교단 조직을 통해 만세 운동에 관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송산면에서는 홍효선홍면옥, 이규선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여 나갔다. 또,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온 백낙열(白樂烈)[장안면 수촌리], 김성열(金聖烈)[팔탄면 고주리], 안종후(安鍾厚)[향남면 제암리] 등 역시 비밀리에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26일 홍효선, 홍면옥, 이규선 등은 가까운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하였다. 3월 26일은 구장 집에 모여 세금을 납부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었다. 오전 9시경 송산면 사강리 구장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호세(戶稅)를 납부하려고 120명 정도가 모였고, 홍효선은 주민들에게 다른 마을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우리도 만세를 부르자고 외쳤다. 홍면옥, 홍효선 등의 주도로 주민들이 송산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오후 5시경 사강리 송산면사무소 부근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7일에도 송산면 서쪽 육일리 방장면에서 만세 소리가 들렸고, 면사무소 뒤 언덕에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은 사강 장날이라 마을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 사강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고, 홍면옥, 이규선, 홍효선 등은 송산면사무소 뒷산으로 가서 인근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약 1,000명의 군중이 국권 회복을 위해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시위대를 탄압하기 위해 출동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홍면옥 외 2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홍면옥의 어깨에 총상을 입히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노구치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려서 척살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장에서도 약 1,000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발안장에 모인 사람들은 일본인 거주지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시위는 다음 날까지 이어져 4월 1일 발안장 주변 산 80곳 이상에서 봉화에 불을 붙이고 ‘일본인은 나가라’는 요구를 하였다.

4월 3일에는 장안·우정 지역에서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장안·우정 지역 시위 운동에서는 각 마을의 구장들이 주민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석포리 구장 차병한, 수촌리 구장 백낙열이 시위를 주도하였고, 구장들은 사환을 시켜 집마다 연락을 해 주민을 동원하고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후 석포리, 주곡리, 수촌리 주민들이 장안면사무소에 집결하였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고 몽둥이 또는 돌로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며, 사무소 내에 비치된 서류와 집기를 훼손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장안면우정면 사이에 있는 쌍봉산으로 갔다. 모인 사람은 600~700명이었고, 이영쇠의 선창으로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으로 출발하였다. 군중은 점차 불어나 1,5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가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1,500명의 군중은 우정면사무소의 유리창을 깨고 돌이나 몽둥이로 시설을 부쉈으며, 장부와 서류를 다 태웠다.

시위대는 다시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군중은 둘로 나뉘어 원형으로 진을 치고,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십여 명이 주재소 앞뜰로 들어가고 일부는 뒤쪽으로 가서 사무실 뒷벽을 부수고 불을 붙였다. 이때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가 뛰쳐나와 권총을 발포하였고, 장안면 사곡리이경백(李敬伯)이 맞아 순국하였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가와바타 순사를 추격하고, 정서성, 이영쇠, 이순모, 차인범 등이 몽둥이로 가와바타를 구타하여 척살하였다. 당시 장안면 석포리에는 개간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간석지 매립에 주민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들의 사적인 개간과 간척이 빈번히 이루어지면서 주민들이 입는 피해와 불만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일제의 수탈과 강제 동원이라는 배경이 대다수 주민이 참여한 대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

향남·팔탄 지역의 3·1운동은 주로 장날에 이루어졌다. 장날을 이용한 시위는 다른 지역의 3·1운동에서도 이루어진 일반적 형태였다. 장날 장터에 모인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고창함으로써 군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4월 3일 장안·우정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한 향남·팔탄 주민들은 4월 5일 발안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4월 5일 발안 장터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인근 제암리고주리의 주민들도 주재소로 몰려와 투석전을 전개하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수원수비대와 주재소의 순사들이 시위대에 칼을 휘둘러 이정근과 김영태가 쓰러졌으며, 김경태는 즉사하였다. 주재소로 끌려온 이정근도 부상이 악화되어 그날 사망하였으며, 이봉구는 수원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결과]

수원경찰서에서는 별도의 검거반을 편성하여 11명으로 구성된 헌병, 경찰 혼성 부대를 파견하여 4월 2일부터 4일간 원곡, 양성, 안성, 발안, 수촌 등지에서 시위 참여자 및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장안·우정 지역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나자, 검거 인력을 증원하여 총 32명으로 편성된 특별검거반이 활동하게 되었다. 특별검거반은 4월 9일부터 오산, 발안, 우정, 장안, 남양, 팔탄, 사강, 수원 등지에서 시위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4월 13일에는 천안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79연대의 병력이 발안에 파견되었다.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의 인솔하에 모인 일본군은 4월 15일 제암리고주리에서 방화 및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순사 사망 사건의 범인 수사를 빌미로 803명을 검거하였으며, 검거 과정에서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선교사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향남면팔탄면 등 지역에서만 317동의 가옥이 소각되었고, 주택을 잃은 사람은 약 1,600명, 피살된 자는 39명이었다.

송산 지역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이들 중 홍면옥, 홍준옥, 문상익, 왕광연은 각 징역 12년, 임팔용, 홍명선, 차경현, 김교창, 홍남후, 박춘흥, 홍문선, 민용운, 황칠성, 홍관후, 김용준, 전도선, 정군필은 징역 7년, 최춘보, 오광득, 이윤식, 안순원은 징역 6년을 판결받았다. 장안·우정 지역 만세 시위 참가자 역시 재판에 회부되어 차희식, 이영쇠는 징역 15년, 장소진, 장제덕, 정서성은 징역 12년, 차인범, 이순모는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밖에 차병한, 김흥식, 정순영은 징역 5년, 김흥삼, 김덕삼, 백순익, 인수만, 김명우,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덕근, 차병혁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화성 지역 3·1운동송산면에서의 일본인 순사 처단을 시작으로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는 등 공격적으로 진행됨으로써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3·1운동의 시위 방식을 공세적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격렬한 시위는 황해도 수안이나 경기도 안성 등 일부 지역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주민의 수는 매우 많았는데,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에서 참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부농, 중농, 자작 및 소작농 등을 포함하였고, 연령도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였다. 학력적 배경도 한문, 신학문, 문맹 등 각양객색이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등 여러 다양한 종교 세력이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적극적 참여와 격렬한 투쟁의 배경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수탈, 개간 사업에 빈번히 동원되는 등의 현실적인 불만이 있었다.

한편, 제암리·고주리의 민간인 학살은 일제가 자행한 대표적 만행으로 국제 사회에 소개되었고, 일본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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