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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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韶鎭 |
이칭/별칭 | 장봉래(張鳳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혜린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9월 26일 - 장소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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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장소진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11월 - 장소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장소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장소진(張韶鎭)[1886~1924]은 1886년 9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석포리[현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에서 태어났다. 장봉래(張鳳來)라고도 불렸다. 장소진은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장제덕(張濟悳)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오늘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나와서 참가해야한다’는 뜻을 전하고,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군중을 지휘하여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도록 하였다. 이영쇠가 화수리 경찰관주재소에 불을 지르자, 주재소 안에 있던 조선총독부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총을 쏘며 도망하였다. 장소진은 차희식(車喜植)·장제덕(張濟德)·정서송(鄭庶松) 등과 함께 가와바타 도요타로를 쫓아가 난타하여 처단하였다.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 방화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어 1924년 8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얼마 지나지 않은 1924년 11월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순국한 공적이 확인되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