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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2632
한자 魯城七兄弟-
영어의미역 Noseong Seven Brothers' Duremegi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승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두레 풍물놀이
감독(연출자) 김재범(민속놀이 연출가, 전 놀뫼국악원 원장)
출연자 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 회원 95명
창작연도 2005년 10월 3일연표보기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일원에서 행해졌던 합두레를 공연화한 두레 풍물놀이.

[개설]

본래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논산시 노성면 일대에서 일곱 마을의 두레조직이 두레계를 맺고 합두레를 먹었던 전통 민속놀이였다. 교촌리 향교골을 비롯하여 읍내리 고랭이·둥둥골·옥거리·주곡리 숯골·한천리 들말·안골 등이 바로 그 일곱 마을이다. 이들 7개 마을은 오늘날의 편제와는 무관하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노성현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서, 서로 의형제를 맺고 두레별로 김매기가 끝나면 합두레메기를 했다.

칠형제 두레메기의 유래와 역사는 분명치 않다. 다만 두레조직이 확산되는 조선 후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칠형제 두레메기 중 좌상격인 선생두레는 숯골두레로 알려져 있다. 숯골이 칠형제 두레 중 으뜸 마을이 된 것은 노성 동쪽 지역에서 가장 먼저 농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견해와, 영조 때 훈련대장으로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이삼 장군의 고택과 재실이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다른 마을보다 세력이 컸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성대하게 베풀어졌으나 6·25전쟁 이후 이촌 향도 등 농촌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쇠퇴·소멸하였다. 그러다가 전통문화의 계승에 심혈을 기울여온 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가 발족되어 이 지역 두레풍장을 복원·보존 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두레놀이를 시연한 바 있다. 2005년 6, 7월 엄밀한 학술조사 및 현지 고증을 거쳐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가 복원되었으며, 현재 회원은 126명이 활동을 하고 있다.

[공연상황]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에서 제작한 두레메기 놀이로, 2005년 10월 3일 개최된 제46회 한국민속예술축제(장소: 경기도 포천종합운동장)에 출품되었다. 김재범의 연출에 따라 보존 회원을 주축으로 95명의 출연자가 참여하여 아리랑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강경젓갈축제에도 참가하여 축제에 참여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있다.

[내용]

1. 첫째 마당 : 두레공사 및 기고사

하지를 전후로 모내기를 마치면 좌상이 마을 총회를 소집하여 두레회의를 한다. 이 때 좌상, 총각좌상을 비롯한 두레의 임원을 정하고 품값, 논을 맬 날짜와 작업 순서 등을 정한다. 이를 ‘두레공사’라고 부른다. 두레가 처음 나는 날, 각 마을별로 정자나무 밑에 농기를 세워놓고 그 좌우에 영기를 꽂은 후 기고사를 지낸다. 기고사는 두레가 났음을 마을의 신과 농신에게 알리고 풍년을 축원하는 의식이다. 농기 밑에 돼지머리와 떡시루, 삼색실과, 포 등을 차려놓고 재배한다. 기고사를 마치고 나면 한바탕 풍장을 치고 나서 영기와 농기를 앞세우고 김을 매러 간다.

2. 둘째 마당 : 아시·이듬·만물매기

보통 김매기는 세 번 하게 되는데 두레꾼들이 논을 처음 매는 것을 아시매기라 하고, 두 번째는 이듬, 세 번째는 만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노성 지역에서 아시매기는 주로 품앗이로 해결했기 때문에 두레로 매는 것은 이듬과 만물이 많았다. 이 때 장구를 맨 소리꾼이 맨 앞에서 구성진 목소리로 「아시매는 소리」를 선소리로 매기면 두레꾼들이 후창을 하며 논을 맨다.

김매기를 하는 중에 좌상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두었다가 새참을 먹게 한다. 아낙네들이 새참을 이고 오는 모습이 보이면 좌상은 두레꾼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 때 아낙네들은 시집살이의 설움이 담긴 「저(겨)개떡 노래」 등을 흥겹게 부르며 와서 새참을 내놓는다.

3. 셋째 마당 : 두레싸움

두레가 나서 김매기를 하는 기간에는 종종 마을끼리 두레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대마을 사람이 농기가 꽂혀 있는 것을 보고도 그 앞을 그냥 지나치면 불손한 행위로 받아들여져 때로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두레패가 서로 이동 중에 마주치게 되면 서로 먼저 인사하라고 어르다가 기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두레싸움의 전초전은 풍장 싸움이다. 이는 어느 마을이 풍물을 더 잘 치는가를 겨루는 것인데, 승부가 나면 진 마을에서 기세배로 인사를 하고 한바탕 합굿을 치고 가는 것이 예의이다. 간혹 이를 거부하거나 무시하면 험악한 두레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두레싸움은 마을의 자존심이 달려 있기 때문에 매우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호미로 상대방을 찍고 때리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두레싸움은 상대마을의 꿩장목을 먼저 빼앗거나 수세에 몰린 마을이 먼저 꼬리를 내리면 승부가 난다. 노성 지역에서는 동맹을 맺은 일곱 마을 간에는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고, 형제 마을이 두레싸움에 휘말리거나 타 마을에서 시비를 걸면 공동 대응을 하기도 했다.

4. 넷째 마당 : 기세배

기세배는 동맹을 맺은 칠형제 두레 간에 서열을 재확인하고 일체감을 다지는 의식이다. 각 마을별로 두레의 결산이 마무리되면 일곱 마을의 좌상이 날짜를 잡고 합두레메기를 거행한다. 주로 노성천과 인접한 숯골 앞 백사장이 장소로 활용되었다. 합두레메기는 선생으로 추대된 숯골 좌상이 일곱 마을의 총좌상이 되어 행사를 주관한다. 이 날 선생두레는 형제두레를 위하여 탁주 대두 한 말씩을 하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꿩장목이 부러졌거나 농기가 없는 마을에 기폭을 하사하기도 했다.

합두레메기는 기세배로 시작된다. 선생 기를 중심으로 나머지 여섯 마을이 서열대로 도열해 있다가 한 마을씩 차례로 기세배를 한다. 이어서 여섯 마을이 동시에 기세배를 하고 선생 기는 빠진다. 그러면 선생 기의 자리에는 그 다음 서열인 교촌 농기가 나와서 서고, 나머지 다섯 마을이 차례로 기세배를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열별로 한 마을씩 선생 기 자리에 서서 기세배를 받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5. 다섯째 마당 : 합굿

기세배를 마치면 어느 마을이 풍물을 더 잘 치는가를 겨루는 일종의 풍장싸움이 시작된다. 일곱 마을의 풍물패들은 지게에 무동을 태우고 상쇠가 이끄는 대로 백사장을 빙글빙글 돌면서 서로 잘 하려고 기세를 올린다. 이처럼 여러 마을이 합굿을 치는 것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구경나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의의와 평가]

급속도로 산업화가 발달함에 따라 우리들의 소중한 전통놀이가 사라져 가는 요즈음 과거 논산평야에서 행해졌던 「노성 칠형제 두레메기」를 복원하여 전승하는 것은 논산 지역의 농경 세시 민속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역동성 있는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보존하는 데도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엔에스아이뉴스(www.nsinews.co.kr)
  • 인터뷰(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 회장 이성식, 남, 74세, 2008. 6. 22)
  • 인터뷰(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 기획실장 윤석찬, 남, 72세, 2008. 6. 22)
  • 인터뷰(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 부회장 문기범, 남, 64세, 2008. 6. 22)
  • 인터뷰(노성두레풍장전승보존회 총무 김영수, 남, 64세, 2008.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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