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화산마을에서 말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조선 시대에는 여수시 화양면을 ‘곡화(曲華)’라 하고 화동리에 말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감목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개도리[개도]에서도 말을 길러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개도 마녀목 설화」는 말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조선 시대에는 화양면 화동리에 말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감목관을 파견하여 화양면 일대는 물...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모전마을에 있는 모전 자갈밭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도리 모전마을 앞 바닷가는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조류에 깎이고 닳아져 만들어진 고운 잔자갈이 600m 정도 형성되어 있다. 수심이 얕아 여름철 가족 피서지로 적당한 모전해수욕장은 백사장과는 다른 자갈밭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달 밝은 밤에 자갈 사이로 밀려드는 파도 소리와 다시...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개도리 월항마을에서 용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도 월항마을 용바위(아기장수) 전설」은 개도리[개도] 월항마을에서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부모가 역적으로 몰려 가족이 몰살당할 것을 염려하여 사내아이를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개도리[개도]의 월항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부...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두모리에서 금오도 신선대와 불무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금오도 두포마을의 신선대 및 불무골 전설」은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 바위와 경복궁을 중건할 때 나무를 베기 위한 연장을 만들었다는 불무골에 얽힌 이야기이다. 두모리 두포[초포]마을과 함구미마을 사이에는 100여 m 높이의 수직 절벽 위에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어 달밤...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심장리 심포마을에서 망산과 대감산소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금오도에는 망산이 있는데, 명성황후를 시해한 주범인 이주회(李周會)가 금오도로 귀양 온 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배의 한을 달래며 바라보았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망산 오른편에 대감산소등이라는 부봉이 있는데, 당시 이주회가 이 산의 명당 자리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였다. 그런데...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유송리 여천마을에서 당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금오도 여천마을 당제와 호랑이 전설」은 유송리 여천마을에서 당제를 지낼 때면 당주를 보호하기 위하여 암컷 호랑이와 수컷 호랑이가 지켜보며 따라다녔다는 이야기인데, 호랑이도 감동할 만큼 정성을 다해 당제를 모셔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송리 여천마을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 밤 해시부터 정월 초하루...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금오도에 있는 옥녀봉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금오도 우실마을 옥녀봉 전설」은 하늘에서 살던 선녀가 금오도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내려왔다가 올라가지 못하고 섬에 살던 총각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으나 화가 난 옥황상제가 옥녀와 총각을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하늘에서 선녀 네 명이 금오도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내려왔는데, 셋은 승천하였지만 한 명...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유송리 함구미마을에서 순천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금오도 함구미 비사리구시 전설」은 유송리 함구미마을 뒷산의 비사리나무를 순천 송광사로 가져가 구시[구유]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울 때 유송리[금오도] 함구미마을 소나무를 가져가서 목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즈음 금오도 송광사 터 부근에...
-
대가야의 가실왕 때 우륵이 작곡한 여수의 노래. 우륵의 12곡은 대가야의 가실왕이 궁정악사인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한 12개의 곡이다. 각 곡은 가야의 각 지방의 지명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네 번째 노래인 달이(達已)는 상다리와 하다리로 나뉘며, 각각 지금의 여수시의 육지 쪽과 여수시 돌산읍을 포함한 도서 쪽을 가리킨다.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의 이름은...
-
전라남도 여수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배향한 충민사의 중수기. 충무공을 모신 충민사 묘문 밖에서 동서 제실을 아직 짓지 못하고, 다만 석천사의 승사(僧舍)를 대신 쓰고 있었는데, 숙종 36년에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忠愍公)이 여기에 재사를 창건하였으나,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사우가 황폐된 것이 많아, 재력을 모으고 그 터를 개척하여 담과 또 좌우 재사를 허술함이 없이 만들었는데,...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충민사를 중수 할 때 쓴 조선 후기 상량문.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최초의 사액사당이다. 충민사 중수 상량문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의 사당을 중수하는 이유를 밝히고 한산도 노량 해전에 함께 나아가 싸웠던 충무공 이순신과 보성군수 안홍국을 모심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사당이 피폐해짐을 아쉬워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적었...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 대횡간도에서 괴목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횡간리 대횡간도의 중심부에는 괴목[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수령을 500년 이상으로 추정한다. 마을 노인들은 이 나무에 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해의 풍흉(豊凶)을 점쳤다고 한다. 북쪽 가지가 무성하면 위쪽 시절이 좋고 남쪽 가지가 무성하면 아래쪽 시절이 좋다고 구전되어 왔다는 것이...
-
고종 때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문집 및 정무 일지. 고종 연간 문인이자 지방관인 오횡묵(吳宖默)[1834~?]이 1897년 5월부터 전라남도 여수군 군수로 있으면서 적은 지방행정에 관한 기록. 3책으로 1책에 시 259수, 2책에 시, 256수 3책에 송(頌) 1, 서(序) 10, 기(記) 7, 제문(祭文) 15, 상량문(上樑文) 1, 전문(箋文) 1, 율령문(律令文) 1, 애사...
-
1919년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대될 당시 여수 지역에도 「독립선언서」가 순천을 통해 율촌면과 여수읍 내로 전달되었다. 이후 4월 1일 쌍봉면·소라면·율촌면의 3개 면에서 산발적인 소규모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또 그날 밤 돌산면·화정면·남면·삼산면 등 4개 면에서도 일부 어민들이 산발적인 시위 운동을 벌였다고는 하나 본격적...
-
서도마을 선착장에서 동북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 신성슈퍼가 있다. 이 슈퍼의 뒤편에 있는 마늘밭에 조개더미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밭은 서도마을의 박철현의 밭으로 면적은 15m×10m 정도이다. 주변에는 민가들이 있고 동북쪽으로 서도초등학교가 보인다. 이 유적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덧무늬토기 등의 토기와 골각기 등이 수습되고 있다. 6,000년 전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
국립광주박물관은 2007년 1월 2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90일에 걸쳐 안도의 조개더미를 발굴 조사했다. 조사 구역 내에서는 무덤 2기, 불 땐 자리 7기, 움집 유구[竪穴遺構] 7기 등이 확인되었는데, 무덤은 얕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넣은 뒤 조개껍질이 섞인 흙으로 덮은 토장묘(土葬墓)로 추정된다. 이러한 무덤은 경상남도 통영시 연대도·욕지도 등 남해안과 동해안 지...
-
부산에 살고 있던 이춘송이 1950년 8월 3일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 이야포에서 있었던 미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그 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증언자의 부모와 두 동생을 포함한 140~150여 명의 민간인이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증언 내용...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발굴된 가야 토기.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가야계 토기는 시기별로 다양하다. 즉 시기와 종류가 다양하여 4세기~5세기 전반대의 아라가야 토기, 5세기~6세기 전반대의 소가야 토기, 5세기 말~6세기 전반기의 대가야 토기, 그리고 백제계 토기와 공반하거나 대가야와 백제계 토기의 혼합 양식까지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수 지역에서 출토된 가야 토기로는...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도요지. 유문암이 도자기의 주원료로 사용됨에 따라 취적리·청대·신풍 산곡 저수지 부근 등 수암산 주변에 도요지가 분포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리 도요지는 가장리 저수지에서 동남쪽의 도로를 따라 50m 떨어진 산의 사면에 위치한다. 도요지는 현재 석산의 개발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작은 자기 조각이 흙더미 속에서 가끔식...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병담(康秉談) 목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와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의 우학리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0년 5월경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삼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식민 정치의 종말을 말세론과 비유하여 설교하는 등 교인들에게 일제의 국체(國體) 변혁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강화선(康華善)은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의 우학리교회, 제주특별자치도의 모슬포교회 등 7곳의 교회를 개척한 강병담(康秉談) 목사의 6남매 중 장녀이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07년부터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성장하였다. 강화선은 전라남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
1876년 개항 이후,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나라에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인 원산학사가 1883년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세워진 후, 대한제국은 근대 교육 제도를 받아들여 1896년 2월 「보조공립 소학교 규칙」을 공포하면서부터 제도적으로 근대 학교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05년을 전후해서 애국지사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교육으로 민족의 보강을 이룩하고...
-
거문도(巨文島)라는 지명은 문자 그대로 ‘큰 학문이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거문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거문도는 원래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삼도(三島)’라 불렸다. 그러다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불법으로 1885년부터 1887년까지 거문도를 점령한 거문도 사건 당시 청나라의 정여창(丁汝昌) 제독(提督)이 거문도에 자주 상륙하여 섬 주민과의 회...
-
조선 말기 거문도 점령 사건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유촌리에 설치된 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이란 1885년(고종 22)부터 1887년까지 약 2년 동안 영국동양함대사령관 포트 해밀턴 중장이 불법 점령한 사건을 말한다. 영국군 철수 후 경략사 이원희를 보내 동도 유촌리에 거문진을 설치하였고, 첨사 겸 수방장 신석효로 하여금 창사를 건립케 하였다. 그러나 8년 만인 1...
-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전투함의 하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3척으로 추정되는데, 명칭은 본영거북선, 방답거북선, 순천거북선으로 모두 여수에서 만들어졌다. 제작 지역은 본영선소[중앙동]와 방답진선소[돌산읍], 그리고 순천부선소[시전동]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그림으로 전해지는 거북선의 종류는 세 가지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 거북...
-
선사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의 전라남도 여수시의 역사. 여수 지역에는 삼한시대 마한연맹체의 하나인 원지국(爰池國)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4세기 후반 백제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전라남도 지역에 위치한 여러 소국들은 백제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여러 소국들을 곧바로 군현(郡縣)으로 편제하거나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다. 소국의 족장세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내마을에 있는 조선 전기 진성지(鎭城址). 고돌산성이 있던 돌산포만호진은 배후에 있는 수박등을 의지하여 산 위에서부터 바닷가의 완만한 경사진 곳을 이용하여 성곽을 두르고 서문, 북문, 수구문을 냈는데, 북쪽 고외마을로 통하는 길목에 북문을 내고, 남문과 수구문 밖이 바로 바다로 연결되어 그곳에 굴강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성(城)과 굴강의 옛 모습을...
-
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에 설치되었던 수군기지. 『문화유적총람』에는 1488년(성종 19)에 설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렵엔 이미 이곳에 진성이 축조되고 있었을 때이므로 성종조 설진설은 잘못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설진과 축성의 순서를 보면 고돌산진뿐만 아니라 어느 수군 기지든지 처음에는 진을 설치하고, 진을 설치할 때는 간단한 여사 정도만 만든다. 그러다가...
-
936년 후백제 멸망 이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전라남도 여수시의 역사. 개성 지역의 호족 세력으로 발전한 왕건(王建)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다. 935년 신라의 투항을 받아들인 후,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히 통합하였다.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 구역을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통일신라시대에 해...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설립되었던 일본인 회사. 한일합병이 되자 일본 정부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본격적인 식민 작업에 들어갔고, 고뢰농장이 여수에 진출한 것도 이 식민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후 고뢰농장은 일본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자본다운 자본이 없던 여수 지방에서 많은 축재를 하였다. 1911년 3월 다카세[高瀨]명명회사(命名會社) 여수지점의 이름으로 여수 지...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조선 중기 산성. 과녁산성에 대해서는 관련 문헌이 없어 연혁이나 그 축조 연대를 추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창마장(倉馬場)·역기동(驛騎洞)·모름지[馬飮址]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당시 왜구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군마 사육과 병사 훈련을 목적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녁산성은 본산성, 수죽산성과 함께 죽포산성지를...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곽찬신(郭贊信)은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광주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 조길룡(曺吉龍)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독서회에 가입해 독립 의식을 키우며 항일 운동을 모의했다. 1929년 11월 12일 전개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93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월산리에 있는 시대 미상의 절터. 『전라남도 유적문화총람』에 현 위치에 절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언제 건립되고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수시 율촌면 신촌마을의 북쪽 월산리 6번지 일대에 절터가 남아 있다. 여수시 율촌면은 일찍부터 불교를 숭상해 온 곳으로 생각되나 현존하는 사찰은 하나도 없고, 관음사지와 수암산에 있는 보리암 터, 사림산에...
-
일제강점기 여수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로 청년과 학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여수 지역에서는 일부 면에서 산발적 시위는 있었으나 대규모 만세시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가담했던 재경 여수유학생들이 조직한 맞돕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항일의 기운이 유지되었는데, 이는 곧 태평양전쟁 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42년에 벌어진...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현천리에 있는 대한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 국사암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절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주변마을은 물론 율촌면과 화양면, 멀리 여수 시내에서까지 많은 신도들이 찾아오고 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국사암의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는 없다. 현재의 국사암은 박후남이 일으킨 것이다. 박후남은 불문에 눈을 떠 살림집에서 부처님을 모시...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사직단은 국토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인 991년(성종 10)에도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에서 발견되는 신석기시대 고기잡이 도구로는 작살·그물추[漁網錘]·이음돌 낚시 도구(조합식 또는 결합식 어구) 등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다양한 고기잡이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안도 ‘가’ 유적에서 발굴된 작살은 대표적인 어구인데, 이등변삼각형으로 만들고 나무 등과 묶기 위한 구멍 네 개가 정교하게 파져 있어 투창으로 활용되었...
-
전라남도 여수 출신 교육자이면서 서예가. 여수 출신 교육자로 후학을 양성하고 여수 지역에 음악 단체를 창립하여 지도하고, 여수시교육장과 문교부 교육과정 심의위원 등 교육 관료로서 헌신하였으며, 말년에는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여수시 봉산동 출신으로 대구사범대학을 졸업 하고 한 때 여수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본 동경성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상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광복을...
-
한국 최초의 프로 권투 세계 챔피언. 함경북도 북청 출신으로 월남하여 여수에 정착하였다. 방호남 사범의 지도로 권투를 시작하여 전국을 석권하고, 국가대표를 거친 후 1966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에 올라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월남하였고, 여수여항중학교 교장선생님의 권유로 복싱에 입문하였다. 방호남 사범의 지도하에 ‘여수...
-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정치인 및 경제인. 은행 근무를 시작으로 경제인으로 활동하다가 국회의원과 여수군수를 지낸 정치인이다. 여수시 서교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고, 해동은행, 한성은행, 동아일보 여수지국 등에서 근무했다. 1948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하였고 여수군수를 지냈다.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의 사위이다....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손병희(孫秉熙), 강기덕(康基德) 등의 지휘 아래 각 학교에 독립선언서가 교부되던 1919년,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김백평(金柏枰)은 경성고등보통학교(京城高等普通學校)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김백평은 학교에 도착한 독립선언서 중 200매를 할당받아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3월 1일 오후 2시 탑골 공원에서 대한 독립을 선...
-
전라남도 여수에서 활동한 개화기 관리 출신의 신교육 선각자.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출생으로 육군교관(1903), 경무관(1905) 등의 고관직을 역임했으며, 사재를 출연하여 1906년 11월 16일 사립낙영학교를 설립하였다. 스스로 교장 겸 교사가 되어 신교육을 실시했다. 호는 우탁(又濯). 삼산면 서도리 출생으로 개화기에 신교육의 선각자다. 1899년 일본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
-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경제인 및 정치인. 여수에서 출생하여 한국은행부총재를 역임하는 등 금융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 하였고, 5.16 군사정변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자문위원으로 초빙되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깊이 관여를 하였다. 제8대와 제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사단법인 한국산업정책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14년 여수에서 출생하여 여수공립보통학교 졸업, 부산제2공...
-
광복 공간에서 6.25 전쟁까지 활동한 정치인. 보성전문대학과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건국준위윈회의 여수치안부장 그리고 6. 25전쟁 때 인민위원장 역임하였다. 김수평은 광복 공간에서 여수 지역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광복 후 좌익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여수·여천향토지』와 문정인의 기록을 통하여 김수평을 단면이나마...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순배는 전라남도 광주(光州)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여수읍(麗水邑)교회 신도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전라남도 광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는 천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김순배를 필두로 한 기독교인과 숭일학교 및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光州川)을 타...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곡화목장 감목관 김시좌의 선정비. 김시좌 선정비는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교문 앞 느티나무 숲에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을 다듬어서 마애비로 석각을 하였다. 고인돌의 덮개돌 하나에 3기 감목관 정현 선정비와 감목관 송유식 선정비, 감목관 김시좌 선정비를 같이 새겼다. 비신의 높이는 110㎝이고, 너비는 40㎝이다. 바위[고인돌...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양호(金良浩)는 여수공립수산학교(麗水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이던 1930년 3월 하순 정보한, 윤경현, 이용기, 백인렬, 오놀보, 정재석, 정학조, 진자미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 조직인 독서회의 창립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윤경현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동시에 다수가 만날 경우 경찰에 발각될 우려가 높을 것으...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0년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항일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이다. 김용환(金龍煥)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을 때 여수보통학교에서는 동조 시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1930년 1월 25일 항일 격문 80여 매를 작성하여 교실 및 교정 등에 살포한 후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다. 19...
-
일제강점기에는 언론인으로 광복 후에는 부흥부장관을 지낸 정치인. 일본과 미국 유학을 거쳐 일찍이 구미 각국을 순방하여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일제하에 동아일보 기자와 만주국의 재무부 참사관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의 외자청의 구매처장을 거쳐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호는 종산(種山)으로 김한승의 아들로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인물로 일찍...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의 갈치 낚시 선수는 김유성[75세, 2008년] 할아버지이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안도 부근에는 갈치 어장이 형성된다. 안도에서 갈치를 낚는 방법은 주낙과 낚시가 있다. 갈치 주낙은 동고지 까치섬[鵲島] 부근에서 성행하였으며, 입감은 주로 들망과 석조망에서 구입하였다. 한 박구(둥근 바구니 모양으로 실을 담는 어구)는 약 300m 정...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여수군청 근무를 시작으로 화양면장, 여수시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제3대 여수읍장으로 발탁된 뒤 정부 수립 후 지방자치법의 시행에 따라 여수시장이 되었다. 재임기간에 시내 간선도로를 확장 개설하는 업적을 남겼다. 1958년 여수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60년 세 번째 여수시장에 임용되었다. 여수보통학교와 여수수산학교를 졸업하고...
-
개항기 지방관리이자 자선가. 삼산면 서도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인동부사까지 지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서도리에 유배되어 살았다.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섬 주민에게 백미 600석을 풀어 섬 주민들을 구한 자선가이다. 삼산면 서도리에서 김석옥(金錫玉)의 4남으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인동부사까지 지냈다. 재임 중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광주 독립 만세 운동에 전라남도 광주 숭일학교의 대표로 참석했던 인물이다.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에 살고 있었으며 광주 독립 만세 운동의 숭일학교 각 학년별 대표 5인 중의 1인이었다. 1919년 3월 10일 숭일학교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독립 선언문 20여 매를 받아 배부하고 모여든 1,000여 명의 군중과...
-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지낸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김한승은 여수군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여수군 주사 등 하급 관리직을 지냈으나, 이후 지역 유지로서의 이력이 더 두드러진다. 1910년부터 주요 공직을 거쳤으며 1920년에는 전라남도 도평의원에 선출되어 세 차례 연임했다. 조선수산회 이사로 여수자동차 중역,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여수군 주사 재직 때 사재를 기부하여 여수 지...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형석은 1929년 12월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재학 시 광주 학생 운동에 이은 각지의 동맹 휴교에 동참하여 신용우(申用雨), 강대성(姜大成) 등과 함께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을 조직하고 격문의 인쇄 배부 및 동맹 휴학·만세 시위 등을 주동한 인물이다. 1929년 12월 7일 중동학교 교실에서 “동지들이여 싸우자. 우리들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화가이자 독립운동가. 김홍식은 여수시 교동 234번지[진남상가길 21-1]에서 1897년 1월 11일 김한익과 유목임 사이의 7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 때인 1910년 여수보통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가 문을 열자 1회로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5학년 때인 1914년 정재진과 결혼했다. 191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유지의 추천...
-
전라남도 여수시 여서동에 있는 옛 역원 터. 역원은 일종의 교통, 통신기관으로 나라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거나 변경 지방에 긴급한 군사적 사태가 발생하면 이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물자를 전송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참적(站赤)제도라는 것을 본떠 참(站)을 만들었다. 육지에 있는 것은 육참(陸站)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통 역참으로 불렀고, 해상...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냉천암 터에 고려시대 때 호국 도량을 목적으로 암자를 지었는데, 절터에서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고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냉천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제당을 설치하고 음력 정월 14일 밤 자시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약 400여 년 전부터 정월 보름날이 되면 마을 정자인 느티나무...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노병주는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 간의 충돌 사건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강당에서 향후의 행동 방침을 세우기 위해 열었던 집회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당시 5학년 대표였던 노병주(盧秉柱)는 이형우(李亨雨) 등의 제의를 받아들여 가두시위 투쟁을 결정하고 대오를 정비하...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 대청마을에 있는 절터. 대청마을은 들판이 되기 이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숲 속에 대청사라는 절이 있었다. 절 이름을 따서 대청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마을에 대청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책이나 기타 기록 등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청사의 동서남북에 암자 네 곳이 있었는데, 동쪽은 소장리의 한두재, 서쪽의 이목리, 남쪽은 이영...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동에 있는 암자. 도솔암은 불교에서 부처로 태어나기 위해 거쳐야 되는 곳, 즉 도솔천에서 비롯한 명칭으로, 기도 발원을 많이 하는 암자이기도 하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흥국사에 속한 암자는 열네 곳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도솔암 한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솔암이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759년에 제작된 흥국사 괘불탱화 후면의 시주질에 도...
-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 여수의 도요지는 소라면과 율촌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소라면 사곡리와 분계동에 분포한다. 백자 가마터는 율촌면과 소라면에 분포한다. 율촌면에는 신풍리 신산마을 뒷산, 가장리 가장저수지 동남쪽, 취적리 산177번지 일대에 있으며, 소라면에는 봉두리 천주교 공원 묘지 일대에 있다. 1. 사곡리 분청사기 가마터...
-
서도마을의 돌담은 참 아름답다. 직선으로 가지런히 쌓여 있는가 하면 골목길의 천연스런 곡선미는 감탄을 자아낸다. 서도리에서 돌담을 제일 잘 쌓는 분을 추천하라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이상수[남, 82]를 추천했다. 교회 밑에 산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방파제에 꽁치 낚시하러 갔다고 해서 발길을 돌려 방파제로 가던 길에서 이상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82세의 나이답지 않게 정정...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와 둔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 목장성지. 돌산 목장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라도에는 함평현 해제 목장, 나주군 압해 목장, 진도 부지산장, 흥양현 도양 목장 등이 1445년(세종 10)에 설치되었다. 돌산 목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성종실록』19년 6월 2일조에는 목마동(牧馬洞)이란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돌산 목장은...
-
삼국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의 지명.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평양 천도 후 백제를 쳐서, 개로왕(蓋鹵王)을 살해하고 수도를 빼앗았다. 수도를 점령당한 백제는 왕자 문주를 받들어 공주로 천도하였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그 뒤 성왕이 즉위하여 538년(성왕 16)에 수도를 기름진 평야에 해상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금강 유역의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겼다. 안으로는...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에는 일본식 어장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이스구리라고 하는 어장이 유행했다. 이스구리라는 말은 일본말이라며 김연수[70세, 2008년] 할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말을 이었다. 동력선이 없었던 시절 풍선(風船)에 노를 네 개 걸고 남면 일대를 무대로 어로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사가미라고 하는 지휘선이 그물을 싣고 선두에 자리하고 마미 두...
-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조선 후기 기실비. 현감 심인조(沈仁祚)가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장방형 비신 뒷면 음기에 "숭정기원후주갑무술인정일립(崇禎紀元後周甲戊寅丁...
-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는 금오도와 마찬가지로 왜구가 침입해 왔던 길목 또는 그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明宗實錄)』을 보면, 1546년(명종 1) 9월 25일 기사에 전라도수사 김세한(金世澣)의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면서 전교한 내용이 적혀 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
1950년 8월 9일 여수시 남면 두룩여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미군의 불법적인 폭격으로 희생된 사건. 6.25전쟁 당시 전선이 여수 지방까지 남하하자 위기를 느낀 미군은 전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여수시 남면 소두라 인근의 두룩여 해상의 어민들까지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증언자들이 비교적 많이 생존하고 있고, 인근의 섬에 살...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 있는 안도는 섬인데도 배들이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섬이다. 그 이유는 두멍안이 있기 때문이다. 두멍안이란 ‘둥구안’이라고도 하는데, 안도섬의 내부 지형이 호수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서고지쪽 섬과 동고지쪽 두 섬이 이야포 등천이라고 불리는 육계사주로 연결되어 나머지 두 섬 사이가 마치 호수처럼 되어 이러한 특이한 지형이 형성되...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존속한 특수 행정구역. 두평소는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지역에 존재했다.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도호부에는 부곡(部曲)이 송림(松林)·하이사(下伊沙)·이촌(梨村...
-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전라남도 여수시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당산제가 행해졌다. 당산제는 산제(山祭)·동제(洞祭)·당산굿·대동치성(大同致誠)·당제(堂祭)라고도 한다. 대개 음력 정월대보름과 정초에 지내나 10월 보름에 치르기도 한다. 제단 주변을 깨끗하게 한 뒤 부정을 막기 위해 황토를 펴고 금(禁)줄...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소동들이 어른으로 인정받기 위해 또는 농사에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해 들었던 돌. 들돌은 정월 대보름·유두·칠석·백중·추석 등의 명절 때 사용되었다. 주로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노두목·당집·정자·장자집 마당 등에서 볼 수 있다. 각 마을마다 들돌은 보통 1~3개가 있으나 많은 곳은 5~7개도 있다. 1인력(一人力) 들돌을 넘기면 어른의 품...
-
고려 후기 전라남도 여수에서 출항했다 침몰 후 2011년 발굴된 난파선. 마도3호선은 13세기 중반인 고려 후기 나무로 만든 배이다. 발굴 위치는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이며, 2009년 마도Ⅱ지구 광역 탐사 중 선체가 발견되어 2011년 5월부터 10월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는 2009년 마도1호선, 2010년 마도2호선이 발굴...
-
고려 후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출항했다 침몰 후 2011년 발굴된 마도3호선에서 건져 올린 목간. 마도3호선은 13세기 중반인 고려 후기 나무로 만든 배이다. 출발지는 전라남도 여수 지역으로, 최종 목적지는 당시 고려의 임시 수도였던 강화도였다. 발굴 위치는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이다. 2009년 마도Ⅱ지구 광역 탐사 중 선체가 발견되었고, 2011년 5월부터 10월...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의 당제는 정월 보름 오후 다섯 시 무렵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린다. 제당은 상당과 하당이 있는데, 상당은 한 칸의 시멘트 벽돌에 함석지붕 건물로 마을 뒷산 정상 숲속에 있다. 내부에는 이 마을의 개척 선조인 정씨(鄭氏) 할아버지 내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하당은 방과 부엌으로 된 두 칸 집이다. 제관은 선출하지 않고 동수(洞首) 영...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조선 후기 다리. 마주교는 1666년(헌종 12)에 마을 주민 김석휴 등 8명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큰 돌을 놓아 만들었다고 하여 독다리로 불리기도 한다.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복개되었다. 다리의 아랫부분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쪽에는 다리를 설치하면서 판 우물이 있다. 마주교 옆에는 다리를 만든 8명의...
-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에 있는 조선시대 절터. 만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780년 4월에 기록된 흥국사 「선당 수집상량기(禪堂 修葺上樑記)」 시주록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1780년 이전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이 절이 표기되어 있으나 1902년 발간된 『여수읍지』에는 이미 폐사된 것으로 나타나 있어 1800년대 말에 해체된 흥국사 승...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 청년들이 조직하였던 사회 운동 단체. 3·1운동 때에 서울에서 유학하던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학생들은 여수향우회를 만들어 활약하였다. 3·1운동의 후유증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하고 피신한 여수향우회 소속 학생들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여수 지역에 은신하고 있는 몇 사람들이 모여 서로 맞잡고 돕자는 뜻으로 맞돕회...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의 어로 활동은 가두리 해상 양식과 어선 어업이 주종이다. 30여 호가 해상 가두리로 우럭과 돔을 양식하고 있다. 해상 가두리 양식면적은 6㏊ 정도이다. 가두리 양식 외에 ‘간여’ 안팎에서 고기를 잡는 어선 어업에 종사하는 어가도 있다. 작업 인원은 2~3명인데, 여수 시내에서 선원을 구해와 조업 후 6:4나 5:5로 나눠먹는 방식이다....
-
목장은 육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에도 바다목장이라는 것이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에도 옛날 황금 어장을 형성했던 이야포만에 바다목장이 있다. 이 바다목장은 섬사람들의 어려운 경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며 안도의 미래이기도 하다. 인구 증가와 소득 향상으로 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배타적 경제 수역(EEZ) 설정과 수산 자원 남획 등으로 어...
-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 묘도리 유두산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묘도동 산성의 축조에 대한 문헌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체성이 거의 무너져 있어서 성곽의 초축 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다. 다만, 출토 유물 가운데 기와류가 고려시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 산성은 고려시대와 그 이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뿐이다. 이 산성에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신공기 49년조에...
-
서도마을의 집안을 살펴보면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재미있는 생활 도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도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옛날 서도마을 사람들의 생활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맷돌이다. 서도마을에서 볼 수 있는 맷돌의 재료가 구멍이 송송 뚫린 제주도의 현무암이라는 것을 볼 때 서도마을과 제주도가 여수를 중심으로 생활권이 옮겨지기 전에는 교류가 빈번했으리라는 것을...
-
가장 안전한 바람은 북풍(높하늬바람)으로서, 하늬바람이나 높하늬바람이 불면 지금 당장 파도가 치고 있어도 운항이 안전하다고 할 만큼 북풍은 섬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바람이다. 이에 반해 가장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람은 마파람과 서마바람이다. 여름철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이들 바람은 높은 습도를 품고 있어 조업에 나가지 않더라도 끈적끈적하게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싫어한다. 다음은...
-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경찰공무원으로 출발하여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호는 양촌(陽村)으로 광양 출신으로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여. 제10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그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졸업을 졸업하고. 26세의 젊은 나이로 총경으로 전주경찰서장을 지냈다. 1972년 신민당 공천으로 전남 제4선거구(여수, 여천, 광양)에서 제9...
-
제2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여수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선장면허를 얻어 선장으로 활동하다가 광복되던 해 조선 선박운항통제 주식회사의 선박감독관이 되었다. 1953년 6월 중장으로 제2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삼산면 거문도 덕촌리 출신으로 일본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전문부를 졸업한 후 관립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1932년 갑종 선장면허를 얻어 선장으로 있다가 광복되던 해...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채영(朴采永)은 1930년대 노동자, 농민 중심의 항일 노동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인식하여 노동자, 농민 중심의 항일 민중 의식 고취와 조직화된 저항만이 유효한 항일 투쟁 방법임을 확신하고 항일 노동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1월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2년의 옥고를 치른 후 1945년 해방될 때까지...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석축성. 방답진성은 돌산도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그 앞바다는 요형(凹形)의 만을 이루고 있다. 그 앞에 다시 송도가 가로막고 있어 천연의 양항을 이루고 있다.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이면서 왜구 방비의 요충지이다. 돌산포만호진(고돌산진)은 내륙과 접근되어 있어 왜구의 방비를 최전방으로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돌산포만호진을 폐하...
-
1523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설치한 수군 진(陣). 방답첨사진은 지금의 돌산읍 군내리에 있었던,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최일선 수군거진(水軍巨鎭)이었다. 원래 돌산은 고려시대까지는 돌산현으로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여수현과 함께 폐현시켜 순천부의 일개 면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1523년(중종 18) 전라좌수영...
-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만 앞 장군도와 돌산도를 잇는 수중 석축. 장군도는 여수시 중앙동 산1번지를 이루는 무인도로 섬의 주위가 60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섬[竹島]으로도 불린다고 알려졌으나 장군도에 대나무는 없다. 죽도는 대섬을 한자로 음차한 이름이다.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육지...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배세동(裵世彤)은 전라남도 여수 출신이지만 1919년 당시 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 구월리에 살고 있었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인 같은 월 20일 전도명(田道明)·전도근(田道根)·전부명(田富明)·이병섭(李秉燮)·김성수(金成守) 등 8명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서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에서 고종과 순종의 장례식에 통곡단을 조직하여 참석한 사건. 1864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왕조 제26대 왕에 등극한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으로 1907년 퇴위하기까지 43년 동안 실로 내우외환이 겹치는 국난 가운데서 초의한식(草衣寒食)으로 편할 날이 없다가 1919년 1월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나도는 가운데 서거하였다. 1919년 3월 3일의 고종의...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장수리와 안포리 사이 봉화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적이 침입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전투를 담당한 군사적 고지(高地)이기도 하다. 백야곶 봉수대는 화양반도에서 백야도를 왕래하는 관문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야곶 봉수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
-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백야리에 있었던 조선 중기 목장성. 백야산성의 축조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문화유적총람』과 『여수·여천향토지』에 의하면 1592년(선조 25)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받고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백호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성이라고 전해진다. 백야산성은 백호산 정상과 중턱 주위 능선을 둘러싸고 있다. 백호산정은 현재 화정면사무소 터가 있는 백야...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각 급 학교에서는 독서회 형태의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여수공립수산학교(麗水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이던 백인렬(白仁烈)도 1930년 3월 정보한, 윤경현, 이용기, 김양호, 오놀보, 정재석, 정학조, 진자미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인 독서회의...
-
뱃골은 골짜기에 돌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또는 배가 계곡 사이로 다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함)이며, 뱃골 아래 바닷가는 삼호팔경(三湖八景) 중의 하나인 이곡명사(梨谷明沙)인 모래밭이다. 뱃골은 현재 서도리의 중심지인 돌팽이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이곳을 일제는 비행장으로 사용하여 침략 전쟁의 전초기지로 활용했음을 서도 주민 이대춘[73세]은...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에 있는 조선 중기 전라좌수사 변국간의 선정비. 변국간 선정비는 임진왜란 4년 전인 1588년(선조 21)에 전라좌수영 백성들이 변국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새로 만들어진 비좌와 장식이 없는 단순한 비갓으로 되어 있다. 비석에 "수사변공국간선정비만력십육년육월일(水使卞公國幹善政碑萬曆十六年六月日)"이라 쓰여 있다. 비각 안에 보관되어 있으나...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에 있는 옛 절터.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관내에는 현존하는 사찰은 하나도 없으며, 불교유적이라고는 몇 개의 암자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은 일찍부터 불교를 숭상해 온 지역으로 여겨지지만, 현존하는 사찰은 하나도 없고 수암산에 보리암, 사림산에 성국암, 신촌마을 뒤에 관음사 등의 절터와 앵무산 암자 터, 어리암의 암자 터가 남아...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본산에 있는 고대 석축 산성. 본산성에 대한 축성이나 사용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축성 기법으로 볼 때 백제 시기에 쌓은 성곽과 흡사하여 초축 연대를 백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류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로 추정되고 있어 초축 연대를 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본산성은 과녁산성, 수죽산성과 함께 죽포산성지를 이룬다. 3...
-
전라남도 여수시 봉계동 계원마을 뒷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토축 산성. 봉계동 토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현재 찾을 수 없다. 1986년에 간행된 『문화유적총람』에는 ‘토성 주삼동 봉계리 석창성지 동북쪽 야산에 있음. 기와편·자기편·주초석으로 보이는 돌 등이 있음. 원형을 이루고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계동 토성은 해발 401m의 호랑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에 위...
-
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있는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사직단은 국토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인 991년(성종 10)에도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
전라남도 여수시 봉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철 생산지. 전라좌수영 고지도에는 ‘사철(沙鐵)’이라는 표기가 있다. 또한 『문화유적총람』에는 “제철지 봉산동 1568~1609년 임진왜란 때 사철이 생산되어 무기 제작에 사용, 영조 27년(1751)에 절도사 정익량이 사철소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산동 사철소는 전라좌수영 본영으로부터 해안쪽으로 약 2㎞ 떨어져 위치해 있다. 봉...
-
불과 연기를 이용한 전통 시대의 통신 수단. 봉수제도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 수단이다.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일정한 간격의 산을 지정하여 밤에는 불빛으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낸다. 우리나라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봉수제도는 기록상 고려 후기인 12세기에 처음으로 보인다. 봉수는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으며...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분청사기 도요지. 사곡리 도요지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는 주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인데, 수습되는 대부분의 문양은 돼지털이나 말총으로 묶은 큰 붓으로 문양을 낸 귀얄문이 대부분이나, 유약에 도자기를 흠뻑 담그는 덤벙 기법과 인화 기법, 조화 기법도 발견되고 있다. 조화 기법을 이용한 기면 장식은 항아리나 병 등에서 볼 수 있으며, 간...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 있는 옛 절터.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관내에는 현존하는 사찰은 하나도 없으며, 불교유적이라고는 몇 개의 암자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중 사림사는 성국암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사림사지는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 사림산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은 일찍부터 불교를 숭상해 온 지역으로 여겨지지만, 현존하는 사찰은 하나...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에 있는 옛 성터. 축성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산수리성은 원형을 띠며 흙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터의 둘레는 약 360m 정도에 달한다....
-
1997년 9월 9일 주민 투표에 의해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의 3개 행정구역의 통합. 여수 지역 행정구역 통합 논의는 여수상공회의소가 1983년 1월 여수시와 당시 여천지구출장소의 통합 당위성에 대한 용역을 하여 홍보하면서 대두되었다. 그러나 여수시 쪽의 일방적인 처사에 격분한 여천지구출장소 관내 유지들이 통합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4년 2월 14일 정부와 여당은 당정회의...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지역에 존속한 특수 행정구역. 삼일포향은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 가운데 하나인 향의 형태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지역에 존재했다. 삼일포향은 다른 지역의 향·소·부곡과 마찬가지로 천민 집단촌이었으며, 이러한 집단촌은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된 것으...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은 2007년 전라남도에서 어촌 체험 관광 마을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어업 생태 체험, 쉼터, 개매기 체험, 역사 유물 체험 지구 등이 세워질 예정이다. 어업 생태 체험은 어촌을 찾은 관광객들이 바다에서 직접 잡은 고기와 채취한 해산물을 가족이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요리함으로써 관광객들이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
서도리의 경관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녹산이다. 그 녹산에는 돌담에 쌓여있는 독특한 형태의 묘들이 있다. 녹산의 끝 등대 바로 아래에 두 기(基)의 무덤이 있는데, 선략장군김공(宣略將軍金公)의 묘와 유인청주한씨(孺人淸州韓氏)의 묘이다. 이 두 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동자석이 있다. 동자석의 가슴에 새를 두 마리씩 안고 있는데 마치 화가인 샤갈(Marc Chaga...
-
서도리 사람들의 생계 활동에서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확연하게 나뉜다. 농토가 별반 없고 농사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남자들은 농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밭작물을 중심으로 한 농사는 여성들의 영역이다. 그리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바다 일은 남자들의 영역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서도리 남자들은 지게질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할 줄 모르는...
-
1976년 서도리 뒷개인 큰이기미 바닷가 모래밭에서 모래를 채취하던 임형래에 의해 오수전(五銖錢) 980점이 발견되었다. 이들 오수전은 대개 3종으로 구분된다. 즉, 천상횡문오수전(穿上橫文五銖錢 : 구멍 위에 가로무늬가 있는 오수전), 천하반성문전(穿下半星文錢 : 구멍 아래 반쪽 별 무늬가 있는 오수전), 무특징전(無特徵錢) 등이다. 이들 오수전은 주로 Ⅱ, Ⅲ 형식에 속하는 것으...
-
서도리는 1999년 3월 현재 총 151가구에 164세대, 인구 450명(남 212, 여 238)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 중 농가가 49호, 어가가 47호, 농어겸업이 30호, 기타 25호이다. 수협에 가입되어 있는 어촌계원은 120명으로 서도리에 100명, 변촌에 20명이 살고 있다. 성씨로는 김해김씨 축은공파·도촌공파와 선산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 김해김씨는 마을...
-
예조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징조로써 예견하는 일이다. 서도마을에서 유행했던 예조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태가 좋지 않으면 비가 온다. ·까마귀가 울면 초상난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돼지꿈을 꾸면 돈이나 복이 들어온다 ·숭어가 뛰면 날이 궂다. ·저녁노을이 생기면 바람이 분다. ·정월 보름달이 왼쪽으로 기울면 시절이 좋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좋지 않다...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돌산군수 서병수의 선정비. 단순한 형태의 기단과 비갓을 갖춘 조촐한 비석이다. 서병수 선정비의 높이는 127㎝이고, 너비는 48㎝이다. 서병수 선정비의 앞면에는 "군수서병수애민선정비(郡守徐丙壽愛民善政碑)"라고 쓰여 있다. 돌산읍 군내리 군 관청 옆에 다른 비석들과 같이 위치해 있다. 풍화 작용으로 훼손될 우려가 있으나 아직은 비교적 상...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앞에 있는 돌로 만든 화대. 석주화대는 동헌에서 야간에 불을 밝히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난중일기』 임진년[1592년] 2월 8일에 “동헌정 입석주화대(東軒庭 立石柱火臺)”가 나온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는 말로 이것이 석주화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한다. 『여수·여천향토지』에는 “석주화대 4기 중 1개는 진남관의 전정에 있...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여천 선소 유적 내에 있는 임진왜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를 매어 두는 돌기둥. 선소 계선주는 높이 약 1.4m의 돌기둥 형태이며, 선소 유적 안에 복원된 세검정(洗劍亭) 건물 앞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에 선소가 생겼다고 한다. 계선주는 이때 선소 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계선주는 거북선과 판옥선을...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대부분 주민이 물 부족과 수지타산 때문에 농업을 기피하고 있다. 그나마 일부 고령자들이 보리나 고구마, 마늘을 심는 정도이다. 현재 안도마을에는 방풍과 황금 등 약초 경작 가구가 50호, 고구마를 심는 가구가 70~80호 있다. 고구마는 평균...
-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여수 선소유적 내에서 무기를 제작했던 곳. 임진왜란 당시 수군과 관계 깊었던 건물이 임진왜란 이후 보수 또는 개축되면서 ‘세검정’이라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여수 선소 유적지 내에 있으며, 산기슭에 인접해서 북쪽 해안을 향하고 있다. 건물의 장축은 동서 방향이며 초석의 배치 상태는 알 수 없지만 잔존한 초석의 주간(...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지역에 존속한 행정구역. 소라부곡은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지역에 존재했다.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도호부에는 부곡(部曲)이...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경남 사천시 출신으로 여수에 이주하여 일본에 유학,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의 주치의를 거쳐 보사부장관을 지냈다. 대한적십자 총재직 시절 여수에 적십자병원을 유치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여수 야구의 저변확대에 공헌을 하였다. 손창환의 출생지는 『여수·여천향토지』에는 사천시 삼천포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손창환 묘비에는 전라남도 함평으로...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유송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송광사에 얽힌 이야기. 송광사(松廣寺)는 금오도 송고산 남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조국사가 금오도에다 송광사를 세웠다고 하였으나 현존하지 않고 있다. 옛 기록을 보면 “부서(府西)의 송광사만 있으니 이름은 동일하나 이전에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부서의 송광사는 곧 순천 조계산(曺溪山) 송광사의 이름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
전라남도 여수시 신기동 비봉산[수문산]에 있는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 산성. 수문산성에 대해서는 관련 문헌이나 증빙 자료가 없어 연혁이나 축조 연대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 왜구의 침략으로 피난민들이 쌓았다고 한다. 수문산성은 여수시에서 구 여천시로 넘어가는 민드래미재 오른쪽 산정에 위치한다. 여수공업고등학교의 임업시험장 사이로 난...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선창에 있었던 돌로 쌓아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만(灣)처럼 굽어 있는 구조물의 터. 수장은 1592년 조선 후기 숙종 때 수사 윤하가 여수항의 큰 물결을 막을 목적으로 쌓은 구조물이다. 해안 가까이의 바닷속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난중일기』 임진년 2월 1일에 “出船滄 點擇可用板子 時水塲內鯈魚雲集[선창에 나가서 쓸 만한 판자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시대 미상 석축 산성. 산성에 대한 정확한 문헌이 없어 건립 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근처에 위치한 본산성, 과녁산성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수죽산성은 과녁산성, 본산성과 함께 죽포산성지를 이룬다. 3개의 성은 죽포마을을 중심으로 3각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다. 수죽산성은 죽포리 마을 뒷산 정상에 자리한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에 일본 어민들을 식민시키기 위해 만든 집단 이주촌. 1900년 전후로 일본에서 조선 이민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식민어촌 건설이 주창되었다. 식민어촌은 일제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본국 어촌의 과잉 인구를 분산하기 위한 식민지 어업 정책으로서 한국 연안에 이주시킨 일본 어민의 취락이다. 당시 식민어촌 조성 조건으로서 가장 중시한 것은 어장 근처의 적당한 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신복리와 금성리에 있는 조선시대 추정 석축 산성지. 신기산성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그 축성 연대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타지에서 피난해온 사람들이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 축조했다고 한다. 이 성은 동서를 연결하는 장축의 성으로 길이가 길어 만리성으로도 불린다. 『호남읍지』의...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법부대신 신기선의 비. 신기선은 갑신정변 후 개화당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고금도와 흥양현 여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갑오개혁 후 법부대신으로 등용되었을 때, 섬사람들이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도재의 건의를 받아들여 완도군, 지도군과 함께 돌산군이 창설되었다. 이때 신기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군민들이 그...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조개더미 유적이 세 곳 있다. 2007년 3월 27일 안도 조개더미 발굴 현장 설명회를 통해 밝혀진 안도 조개더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움집 유구는 돌을 채운 움집[集石竪穴]과 조개껍질을 채운 움집[貝殼竪穴]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조개더미 가장 위쪽에서 확인된 것으로 지름 약 210㎝의...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수군절도사 신택희의 불망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대로변에 있는 여감바위, 또는 역의암이라고 부르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비신만 있다.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37㎝이다. 비의 앞면에는 "수군절도사신공택희영세불망비(水軍節度使申公宅熙永世不忘碑)"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석질이 사암이라 마멸의 속도가 빨라 시멘트로 보전(補塡...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순사건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사태로 무장 봉기가 발생하여 유격전화되자 정부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했다. 이에 14연대 소속의 지창수·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1948년 10월 1...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상산에 있는 시대 미상 봉수대 터.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적이 침입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전투를 담당한 군사적 고지(高地)이기도 하다. 안도리 봉수지는 해발 206.9m의 상산 정상에 위치한다. 상산은 안도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안도리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산 정상은...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 있는 안도리사무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가는 길에 돌다리민박집이 있는데 돌다리민박집 앞에 고인돌 모양의 돌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공덕비와 함께 돌다리 유래를 적은 비가 있다. 비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당시 해마다 홍수가 나 내림천이 범람하여 나무다리가 유실되자 김순점(金順店)이 사비를 들여 해발 180m의 상산 중턱 돌밭에서 너...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雁島)는 여수시에서 남쪽으로 34㎞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북쪽에 금오도가 있고 남쪽에 연도가 있다. 면적은 3.96㎢, 해안선 길이는 29㎞이며, 섬 중앙에 솟은 상산(上山)[207m)]이 가장 높다. 상산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는데, 왜구의 침략과 상황을 알리던 요망소로 추정되며 금오도의 심포마을 요망소와 서로 연락을 취했을...
-
조내이 또는 후릿그물이라고도 하고 그 행위를 “조내이 당그러 가자.”, “후리질 한다” 등으로 표현하며 개인이나 몇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생선을 잡는 재래식 방법이다. 잡는 어종은 망성어(망치), 게, 잡어 등이나 갯가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므로 큰 물고기보다 작은 물고기를 어획해서 반찬거리로 삼을 정도의 어획법이다. 그물의 형태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입구가 비교적 크고 뒤로 갈...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 있는 안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어디서든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파도에 씻기고 갯바람에 깎인 그들은 숱한 애환과 함께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과 언어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그들은 거의가 풍어제를 지내고 출어 날에는 오색기를 배에 꽂고 배 위에서 용왕제를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용왕제의 용왕은 당우(堂宇)가 없어도 바다를...
-
남북국시대 전라남도 여수를 거쳐 간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지은 일본인 승려. 승려 원인(圓仁)은 일본 헤이안시대인 794년에 시모쓰케국[下野國] 쓰기국[都賀郡]에서 태어나 802년 9세 때 불교에 입문하여 808년 15세 때 일본 천태종 개조이며 엔랴쿠사[延曆寺]를 창건한 사이초[最澄]의 제자가 되었다. 호류사[法隆寺]에서 법화경을 강술하고 838년 45세 때 청익승으로 선발되어...
-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遣唐請益僧] 엔닌[圓仁][794~864]은 838년 6월 13일 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遣唐使船]를 타고 지금의 규슈 후쿠오카를 출발하였다. 엔닌은 천태종의 발상지인 천태산 순례가 좌절되자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에 머물며 당나라 불교를 배울 방도를 찾다가 840년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오대산 대회엄사...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여도현(呂道玄)은 1929년 3월 23일 전라남도 광주보통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졸업식장에서 일본인 교장을 응징한 사건으로 1929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6월 집행 유예 4년을 선고 받았다. 또한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모체인 비밀 결사 성진회 사건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여수공립수산학교 학생들의...
-
통일신라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설치된 행정구역. 통일신라시대는 통일 후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면서 자연히 지방 행정구획의 재편성을 단행하였다. 이 지방 행정조직의 개편은 대개 677년(문무왕 17) 무렵 당의 세력을 밀어내고 687년(신문왕 7)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9주(九州) 5소경(小京)의 제도 형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신라가 단일 정부로서 중앙에서 백제·고구려의...
-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열 곳과 가장 맛있는 음식 열 가지. 여수 10경, 여수 10미(麗水 十景, 麗水 十味)는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직접 선정하였다. 여수 10경에는 오동도, 거문도와 백도, 금오도 비렁길, 향일암, 여수세계박람회장, 진남관, 여수 밤바다와 산단[여수국가산업단지] 야경, 영취산 진달래, 여수해상케이블카, 이순신대교가 있다. 여수 10미는 돌산갓김치...
-
전라남도 여수시 문수동·미평동·둔덕동 고락산에 있는 백제시대 석축 산성. 여수 고락산성에 대해서는 관련 문헌이 없어 연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락산성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의 본영을 방비하기 위해 고락산의 양 봉우리에 쌓은 성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백제시대의 기와로 추정되는 와편(瓦片)들이 다량으로 수습되고, 축성 기법으로 볼 때 600년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에 있는 조선 중기 성지. 석창성지는 여수 지역에서는 여수석보(麗水石堡)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여수석보는 삼국시대 백제의 원촌현과 통일신라시대 해읍현 이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수 지역의 치소로 추정되고 있다. 여수석보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목책으로 진흙을 바른 성이며, 둘레는 143보”라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
-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전선의 정박처 및 수군의 일차적인 제반 업무를 수행하는 항만시설을 포함한 일정한 군사적 공간. 여수 선소유적이 위치하던 곳의 포구는 예로부터 장생포라고 하였다. 장생포는 고려 공민왕 초 왜구가 장생포로 침입해 왔을 때 유탁이라는 장수가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적을 물리쳤다. 이것 때문에 병사와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며 부른 노래가 ‘장...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의 고분 유적. 여수 죽림리 차동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가야계 토광묘, 가야계 석곽묘, 백제 석곽묘, 고려 석곽묘, 백제 와관묘, 조선 시대 토광묘 등이 조사되었다. 1997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여수 죽림 택지개발 사업지구에 대하여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죽림리 차동 유물...
-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 내에 있는 조선 중기 이순신 부하들이 세운 추모비. 여수 타루비는 이순신이 죽은 지 6년 후인 1603년에 부하들이 공의 덕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여수 고소대 내 비각 안에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 동령소갈이 있다. 향좌에 있는 비가 타루비이다. 타루비의 비좌 아래는 땅에 묻혀 알 수 없다.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
전라남도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조선 중기 이순신 장군의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가 1942년 봄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대첩 비각을 헐고 대첩비와 타루비를 반출했던 것을 1946년 경복궁 뜰에서 김수평이 발견하여 1948년 5월 24일 여수에 복구하였다.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
-
1919년 여수군청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여수군청은 간숙당이라는 건물로, 1479년(성종 10)에 전라좌수영성과 같이 지어졌다. 역대 수군절도사들의 시무청인 운주헌으로 불려오다가, 1897년 여수군이 설치되면서 여수군청으로 사용되어온 건물이었다. 위치는 전라좌수영 역내 지금의 군자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2.314m²의 부지에 결승당과 완경루 등의 두 부속 건물이 있었다. 내삼...
-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에서 열리는 북 축제. 여수동동북축제는 고려 가요 「동동(動動)」의 지역적·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여수의 숨은 역사적 인물인 유탁(柳濯) 장군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창안한 축제이다. 1998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합치는 삼여통합으로 통합 여수시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여수시의 대표 축제인 여수거북선대축제가 구 여수시 권역에서 추진되어 구 여천권 주민들...
-
전라남도 여수시 충무동에 있는 시민들의 정신 치유와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육 시설. 여수마음학교는 인성 교육과 지역 클러스터 조직 및 운영을 위한 시범 사업에 참여하며, 전라남도 여수교육지원청을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 인성 교육 네트워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입시 위주의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인성 교육 부재로 다양한 청소년 문제가 대두되면서 여수시 지역 사회...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에 있는 임진왜란 때 제작된 석인상. 여수석인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거북선 등 전선(戰船)을 만들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쓴 의인전술(擬人戰術)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한다. 석인은 기단석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되었다. 관모(官帽)를 쓰고 단정한 관복에 두 손을 공수(拱手)하고 있는 문반의 모습이다. 석인은 7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나...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 진남관에 있는 조선 중기 이량이 쌓은 방왜축제를 기념하는 비석. 여수 이량 장군 방왜축제비는 1497년(연산군 3)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온 이량(李良) 장군이 장군도 동쪽과 돌산 북쪽 사이의 해협으로 왜적이 침입하는 것을 봉쇄하고자 둑을 쌓은 사실을 적은 내용으로, 원래 장군성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이량의 5세손 이배원(李培元)이 글을 짓고,...
-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안숙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적비. 여수 절도사 안공 사적비는 1823년(순조 23)에 세운 것으로, 1809년(순조 9)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한 안숙은 문무를 권장하고 좌수영을 수리하여 주민들의 구제에 심혈을 기울였고, 부하 군졸을 가족처럼 여겼다. 또한 서민의 혼례, 장례 등 길흉사를 돕는 등 선정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
고려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행정구역. 918년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940년(태조 23)에 전국을 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행정구역을 개혁하였다. 따라서 신라시대에 해읍현(海邑縣)[여수]·여산현(廬山縣)[돌산]이라 불리던 여수 지방의 이름도, 여수현(麗水縣)·돌산현(突山縣)으로 바뀌었다. 이때 처음으로 ‘여수(麗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되나, 모두 승평군(昇平郡)...
-
전라남도 여수시 연등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사적비. 1779년(정조 3) 지방의 군사들과 의승(義僧)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호남좌수사로 부임한 김영수(金永綬)가 좌수영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보강하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또한 군기, 잡물 등을 마련하고 월과미(月課米) 및 정조(正租) 등을 마련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신은 방형의 머릿돌을 갖추고 있다. 높이는 167...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여운종(呂運鍾)은 1930년대 민중 속에서 항일 노동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30년 1월 25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을 때 유독 여수보통학교에서는 동조 시위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독립 선언서 80여 매를 작성하여 교실 및 교정 등에 살포한 후 일경에 피체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당시의 국내외...
-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 여자만 해상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1950년 8월 9일 여수시 여자만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미군의 불법적인 폭격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6.25전쟁 당시 전선이 여수 지방까지 남하하자 위기를 느낀 미군은 전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여자만 해상의 어민들까지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8...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에 있는 1885년 거문도 사건과 관련된 영국군의 묘지. 거문도 사건은 1885년(고종 22)부터 1887년까지 약 23개월에 걸쳐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군 묘지는 거문도 사건의 과정에서 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군을 묻은 묘지이다. 영국군 묘지는 본래 여객선 터미널에서 동북쪽으로 100m 떨어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오놀보(吳㐗甫)는 전라남도 완도 사람으로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당시인 1930년 3월 항일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 조직인 독서회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용기, 정학조와 함께 제1조에 편성되었다.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다수의 회원을 독서회에 가입토록 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9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수감...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19세기 말에 정선군수(旌善郡守), 자인현감(慈仁縣監), 함안군수(咸安郡守), 고성부사(固城府使),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智島郡守), 여수군수(麗水郡守) 등을 역임한 학자이며 문신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旌善郡守), 자인현감(慈仁縣監), 함안군수(咸安郡守), 고성부사(固城府使),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智島郡守), 여수군수(...
-
13~16세기에 걸쳐 일본의 해적 집단이 여수 지역을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한 사건. 왜구는 일본의 해적집단으로 일본 중세기의 혼란기에 중앙 통치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할 때 가까이는 한국, 멀리는 중국 연안까지 침입하여 큰 해를 주었다. 이 해적들은 주로 서부 일본의 연해민으로서 생활필수품인 쌀 등을 구하기가 어려워 해적활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왜구의 침입이...
-
거북제를 지내는 장소는 서도 해상방파제이다. 거북제는 거문리와 죽촌 사이의 해상에서 풍어제가 끝난 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 1시경부터 시작하는 용왕제를 마친 뒤 오후 2시 30분경부터 시작한다. 거북제를 지내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유래는 서도리 주민 이대춘[73세]이 어렸을 때 직접 구경하였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때는 1948년 음력 8월경 거북 한 마...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에 있는 옛 절터.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에 옛 절터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불교가 한참 성행했던 때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암사는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의 당촌 서북쪽 운암마을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거문도 주민들은 항상 왜구들의 노략질로 인하여 불안에 떨면서 살고 있었다. 그때 육지로부터 오척 단구의 키가 작은 한 청년이 마을 앞 해안에 표류하여 왔다. 동네 사람들은 이 청년을 극진히 간호하여 살려 주었는데 이름이 ‘오돌이’라고 했다. 오돌이 총각은 힘이 대단히 세어 지금의 죽촌 소하천 돌다리도 그때 오돌이 총각이 혼자서 만들어 놓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왜구들이...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항일운동가. 원세학은 1858년 2월 19일 삼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수문장을 지냈으며, 1914년 임병찬의 유배 생활 도중에 이루어진 어린이 교육을 도왔다. 임병찬은 구한말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그 결과 1914년 음력 6월 1일 감금형을 받아 원세학이 있던 거문도로 유배되었다. 임병찬의 유배 생활중...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원정상(元正常)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항일 운동가이자 상록수 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 사건인 1929년 원산노동연합회 총파업 주모자(당시직책: 원산노련 상무집행위원)로 체포되었다. 이후 법원으로부터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1909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에서 원세학의 5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원종상(元鍾常)은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동맹휴학’ 가담으로 퇴학당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고향의 덕흥학원 교사 및 삼산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면서 덕흥학원에서 청소년 100여 명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였다. 야학에...
-
마한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있던 나라 이름. 삼한시대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원지국(爰池國)이 여수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백제시대 여수 지역은 원촌현(猿村縣)이었는데 ‘원’의 고음(古音)이 [jiwon]이고, ‘촌’은 ‘지(支)’ 또는 ‘지(知)’ 등 성(城) 내지 취락과 상통하고 또한 ‘지(池)’가 되므로, 원촌은 원지라고 유추한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부근으로...
-
백제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행정구역.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평양 천도 후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蓋鹵王)을 살해하고 수도를 빼앗았다. 수도를 점령당한 백제는 공주로 천도하였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그 뒤 성왕이 즉위하여 538년(성왕 16)에 수도를 금강 유역의 부여로 옮겼다. 이때 백제는 사비를 중심으로 전국을 오방제로 나누어 다스렸다.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대미산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 산성지. 월암산성지는 해발 359m의 대미산 정상에 위치한다. 대미산은 달암산 또는 월암산으로도 불린다. 성은 대미산 정상으로부터 산의 7~8부 능선을 향하여 둥그렇게 쌓은 테뫼식[산정식(山頂式)] 산성이다. 성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를 띤다. 성의 평면 형태는 각이 죽은 모양에 가깝고, 총 둘레는...
-
전라남도 여수시 출신의 의사. 일본에 유학 후 군의관으로 전역하고 병원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여수로타리클럽 회장, 여수시 체육회장, 진남제전위원회 위원장, (사)진남제전보존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발전에 노력하였다. 호는 청송(靑松)으로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제강점기 때 군의관 소령으로 전역하여, 중앙동에서 제중의원을 개원하여 시민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유광로의 선정비. 장방형의 비좌 위에 세워진 철비로, 옥개가 가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왼쪽 가지는 부러진 상태이다. 비의 앞면에 "수사유공광로청덕선정비함풍사년십이월일영내(水使柳公光魯淸德善政碑咸豊四年十二月日營內)"라고 쓰여 있다. 철제로 된 비이지만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부정 부패가 극심했던 철종 때 세워진 청덕선정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봉목(兪鳳穆)은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1919년 8월 서울에 머물면서 독립 운동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감명을 받아 귀향한 후 여수간이수산학교 학생 이선우 등과 함께 청년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12월 20일 오후 1시 여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봉목 일행은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김여진의 집에서...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서 안도민박을 운영하는 문영월[63세, 2008년] 할머니의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이다. 섬에서 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사업 실패로 30대 초반에 어쩔 수 없이 섬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밖에 나가서 살고 싶어도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못나가겠다고 한다. 처음 여객선을 타고 안...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윤경현(尹炅鉉)은 전라남도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당시인 1930년 3월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기 위해 비밀 결사 조직인 독서회를 결성하였다. 매주 1회 모임을 가지면서 항일 투쟁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면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9월 독서회 활동이 발각되면서 결사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감목관 윤동계의 선정비. 고인돌의 덮개돌에 선정비를 새겼다. 비의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40㎝이다. 비의 앞면에는 "행감목관윤후동계선정비무술팔월(行監牧官尹侯東啓善政碑戊戌八月)"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이 있는 곳에 고인돌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둘러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자환(尹滋煥)은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천도교 신자였다. 1919년 3월 2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저전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에 독립 선언서 35매를 배포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윤자환은 독립 선언서를 일반인에게 알려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대중을 규합하기 위해 전라남도 순천군 해룡면 면사무소와 여수경찰서 게...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6일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서정희(徐廷禧) 등은 전라남도 광주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 및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전라남도 광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0일 오후...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지역에 존속한 행정구역. 율촌부곡은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지역에 존재했다.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도호부에는 송림(松林)·...
-
서도마을에서 등대까지 가는 산책로는 서도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등대를 가는 길의 초입 우측에 조그만 봉우리가 있는데 전망이 좋아 옛날에 봉수대가 있었고 육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상황을 살피던 망대(望臺)였다고 한다. 우리가 서도마을을 찾아갔던 2008년 3월에 여수시에서는 이곳에 봉수대를 복원하고 거문도 일대에서 출몰했다는 전설 속의 인어인 신지끼상을 세운다고 현장...
-
햇볕이 따사로이 비추는 돌담 아래서 이귀순[73세, 거문도뱃노래 보존회장] 할아버지는 오늘도 삼치 낚시 준비가 한창이다.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삼치 낚시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자 삼치 낚시의 도사답게 대답이 일사천리다. 겨울에 삼치 파시가 섰을 때는 세 섬(동도, 고도, 서도)을 배를 밟고 건너다녔을 정도로 굉장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삼치잡이 어선들이 몰려들었는데...
-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이규보의 자선기념비. 이규보는 천성이 영특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관리로서 백성을 위해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이에 감복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는데, 동문(洞門) 밖에 비를 높게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72㎝이고, 너비는 130㎝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이도빈의 선정비. 이도빈은 1644년(인조 22) 여수 진남관을 개축하였던 인물로, 『하멜표류기』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이도빈이 전라좌수영의 수사로 재임하면서 베풀었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좌수영의 백성들이 세웠다. 방형의 대좌 위에 장방형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올렸다. 옥개석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말기 학부대신 이도재의 불망비. 이도재는 갑신정변 후 개화당과 가깝다는 이유로 신기선과 함께 고금도와 흥양현 여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갑오개혁 후 학부대신으로 등용되어 섬사람들만의 행정 구역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법부대신 신기선에게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완도군, 지도군과 함께 돌산군이 창설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군...
-
조선 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항일운동가. 이병현(李炳鉉)은 1909년 전라남도 도서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의병 부대에서 활동을 했다. 1909년 음력 5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도와 여서도 등에서 ‘완도 삼림 문제’와 어민들의 경제적 착취를 위한 ‘어업법’ 시행 등으로 경제적 침탈이 심해지자 어민들의 생계 위협에 맞서 황준성 의병장 휘하의 김성택의 군사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이봉상의 선정비.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세손으로서, 1709년 3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곡창을 설치하여 곤궁한 백성을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혼례비와 장례비를 제공하는 등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1710년 퇴임 후 이봉상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장방형 지대석에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함은군 이삼의 불망비. 장군도에 방왜축제를 축조했던 이량 장군의 8세손으로, 1710년(숙종 36)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단순한 비좌 위에 비신이 세워져 있으며, 비갓에는 소박한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168㎝이고, 너비는 51㎝이다. 비의 앞면에 "함은군이삼거사불...
-
일제강점기 여수에 정착한 독립유공자.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도일, 교토에 살면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를 졸업하고 효고현에 있는 제강소에서 일본인의 모욕적 언동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고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 오다가 애국지사인 김경원(金京元) 등과 조선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인 징병제 실시 때에 군기 교란을 모의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선우(李善雨)는 항일운동가로 1919년 12월 12일 여수공립수산학교 기숙사에서 유봉목의 뜻에 따라 생도 김종력 등과 함께 12월 20일 조선 독립 만세 운동을 결의하였다. 12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생도 복습소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에서 미군폭격으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 6.25전쟁 당시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에서 미국 공군 전폭기에 의해서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으로서 아직까지 종결이 되지 않은 사건이다. 1950년 8월 3일 미군의 불법적인 안도리 폭격의 희생자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에서 남해안 도서로 소개되어 피난민 배에 탑승 중인 민간인이었...
-
일제강점기 여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여수 수산공립학교 재학시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여순사건 당시 여수시 인민위원장이었다. 여수공립수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3월 하순 정보한, 윤경현, 백인렬, 오놀보, 정재석, 정학조, 진자미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 조직인 독서회의 창립을 결의하였다. 이용기의 독서회 결성 동기는 학업 성적이 우수...
-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활동한 경제인이자 정치가. 여수 지역에서 정미소사업을 시작으로 경제계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계로 진출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석정(石亭)으로 여수보통학교와 여수간이수산학교를 졸업한 후 22세 때 자영 공성정미소를 설립했다. 광복 후에는 초대읍장을 역임했으며, 읍장 퇴임 후에는 여수국민회장, 금련(金聯)여수회장, 제2대 상공회의소 회장(1948~1951)...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순천부사 이종의 불망비. 소라면사무소에서 대포 쪽으로 가는 덕양역 부근 도로변 여감바위 위에 수군절도사 신택희 영세불망비와 나란히 서 있다. 단순한 형태의 좌대와 훼손이 심한 상태의 비갓이 올려져 있다. 비의 높이는 173㎝이고, 너비는 65㎝이다. 비의 앞면에 "행부사이후종영세불망비(行府使李侯宗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비바람에...
-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이순신 모친 초계변씨의 유적비. 1592년(선조 25)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충청도 지방이 전란에 휩싸이자 모친 변씨부인과 부인 방씨부인을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 집으로 불러들여 전란 중에도 모친에게 아침과 저녁에 문안을 올렸다. 현재 이 비가 있는 정평호 집에는 자당이 쓰던 절구통과 밥솥이 보존되어 있다. 1973년 여천군에...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이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어머니와 가족을 피난시킨 거처.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이 임진왜란 때 5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는 노모에 관한 기록이 88일 분이나 있어 그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년째인 갑오년 정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형영(李亨永)은 1919년 3·1운동 이전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항일 운동가이다. 1919년 당시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 부속 공업전습소 1년생이던 이형영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韓偉鍵)·김형기(金炯璣),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김대우(金大羽), 경성전수학교의 전성득(全性得)·윤자영(尹滋瑛) 등과 함께 학생 대표로서 만...
-
개항기 여수출신의 무신. 개항기 무신으로 돌산군의 군정에 적극 참여를 했으며, 고향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삼산면 손죽리 출생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참서(宣傳參書)와 혜민원참수(惠民院參壽)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호방한 성격으로 문객이 많았으며 군정(郡政)에도 적극 참여해 고향발전에 공헌함이 컸다. 고향에 처음으로 고구마를 파종한 것도 그의 업적중의 하나로 전해 오고...
-
전라남도 여수 출신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경성여자 사범학교 졸업 후 여수서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여수여자고등학교 등에서 15년간 교사로 봉직하고 제1대 전라남도 교육위원을 지낸 교육자이며, 한국부인회 여수지회장과 사단법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여수에서 민족 교육과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이상호의 딸로 1942년 경성여자사범학교 졸업하였다. 여수서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여수...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말기 전라좌수사 이희갑 불망비. 비갓은 유실되고 좌대와 비신만 있다. 비의 높이는 156㎝이고, 너비는 48㎝이다. 비의 앞면에는 "절도사이공희갑영세불망(節度使李公熙甲永世不忘)"이라고 쓰여 있다. 비갓은 유실되었고, 좌대와 비신만 남았으며, 비석의 재질이 사암이라 마멸이 심하다....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의 황금 어장에 일본 어민들을 끌어 들인 사람은 이주회(李周會)이다. 이주회는 1843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고, 병법을 배워 오위장이 되었다. 병인양요 때 결사대를 조직하여 프랑스 함대를 내쫓아 대원군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연일현감·외무위원을 역임하고 김옥균·우범선과 교류하면서 개국론을 주장하였다. 임오군란 후 대원군 일파로 지목되...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에는 어로 방법과 뱃노래에 일본식 방법과 일본식 소리가 혼재해 있어 안도 문화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사연[70세, 2008년] 할아버지는 들망의 기억을 재구성해냈다. 들망이란 고정 닻을 놓고 덕배를 기준으로 양쪽 배(마미, 사가미)에서 그물을 쳐 놓고 불배가 멸치를 유인하여 그물 안으로 모으면 양쪽 배에서 그물을 들어 올려 잡는 고...
-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도서 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고,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됨으로써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후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면 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9세기 중엽 일본 승려 엔닌의 불교 성지 여행기.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일본인 특유의 꼼꼼한 기록으로 9세기 중엽 당나라의 정치, 경제, 민속, 종교, 법제, 지리 등 사회상 전반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신라와 발해 및 일본에 관해서도 정사에 나오지 않는 귀중한 자료를 곳곳에 남기고 있다. 특히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에 기착한...
-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터미널 옆 야트막한 산을 자산(資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았다고 해서 자산산성이라고 한다. 자산산성을 척산산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산의 자를 길이를 재는 단위인 자[척]로 착각 한 것에서 온 것이다. 자산의 ‘자’는 성의 옛 말로 자산은 성이 있는 산이라는 우리말이다. 성(城)의 우리말은 ‘자’...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는 조선 중기 이량 장군이 장군성을 쌓고 세운 비석. 1497년(연산 3)에 이량 장군이 왜적을 막기 위해 장군도와 돌산 사이에 제방을 쌓았는데, 이것이 국내 유일의 수중성인 장군성이다. 이량 장군이 방왜축제를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여수시 중앙동 장군도 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 있다. 사암으로 된 비신에 비갓이 새겨...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방답첨사 장익복의 선정비. 단순한 좌대 위에 비갓 없이 비신만 있다. 높이는 100㎝이고, 너비는 37㎝이다. 비의 앞면에는 "첨사가선대부장공익복영세불망비(僉使嘉善大夫張公益福永世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바닷가에서 해풍을 맞으면서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방답진(防沓鎭)의 첨사에 관한 유일한 비석으로 방답첨사 장익복의 행적을 알 수 있...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평완(張平完)은 1930년대 여수사회과학연구회, 여수청년전위동맹, 여수적색노동조합전우조직 등을 결성하여 투쟁한 항일 운동가이다. 1929년 8월에 조직된 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0년 여수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회계 책임자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1월에는 전라남도 여수읍 서정 자택에서 오우홍, 최준모, 강동주, 김양시...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고소동·동문동에 있는 조선 전기 전라좌수영 성지. 1479년(성종 10) 전라좌수영이 창설됨에 따라 전라좌수영성 축조와 함께 관내 청사도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전라좌수영성은 창설 당시에는 둘레가 1.7㎞나 되는 성터로서 여수 진남관 외 78개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기록에 남아 있는 전라좌수영성 내 청사(廳舍) 34개 동은 다음과...
-
여수는 옛날부터 전복이 유명했다. 여수의 역사책인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의하면 섬에다가 잠수군(潛水軍)을 두고 전복을 잡아 말려서 진상하고 생전복은 역마를 통해 서울로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안도의 전복은 육상 수조나 해상 가두리에서 양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의 종패를 바다에 뿌려 해저에서 자연 상태 그대로 키운 것이다. 전복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현재...
-
거문도 갈치는 제주도 갈치와 함께 그 맛이 좋기로 유명하며, 갈치구이, 갈치회, 갈칫국, 갈치창자젓갈 등 다양한 요리와 식품은 미식가들의 입맛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다. 갈치는 빛을 따라 모이는 추광성(追光性) 어종으로 갈치 어장이 형성되는 여름이 되면 온 바다가 불야성을 이룬다. 이것이 이른바 삼호팔경 중의 하나인 홍국어화(紅國漁火)이다. 이제는 어장의 형성도 시원치 않고...
-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정계생의 신도비. 사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임진왜란 공신인 정철, 정린, 정춘, 정대수와 그의 부친 정계생의 가계와 신상을 살필 수 있는 비이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故月川丁公歿三百餘年至哲宗壬戌에 始贈公吏曹參判하고 高宗甲子에 又加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弘文館直提學하니 於法에 得竪碑神道而後孫이 久以孱力未遑이러니 今其遺裔龍洙相...
-
전라남도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정대수의 신도비. 정대수(丁大水)는 자는 여숙이고 호는 용서(龍西)며 1565년에 웅천 송현마을에서 증 호조참판 정호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사성 정득우의 9대손이고 월천공 정계생의 증손으로 정철, 정춘, 정린의 종질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의 별장으로서 노량해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진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두범(鄭斗凡)은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나 1919년 광주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하는 등 독립 운동에 적극 가담한 항일 운동가이다. 1919년 3월 6일 김복현(金福鉉)·김강(金剛)·서정희(徐廷禧) 등은 전라남도 광주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 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3월 10일 광주 장날을...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각 급 학교에서는 독서회 형태의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여수공립수산학교(麗水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이던 정보한(鄭輔漢)도 1930년 3월 백인렬, 윤경현, 이용기, 김양호, 오놀보, 정재석, 정학조, 진자미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인 독서회의...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항일운동가. 정용수(丁龍洙)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대표 유림이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정용수를 비롯한 정충섭, 김병순, 정영민, 정병훈 등 전라남도 여수 지역 유림 42명(여성 6명 포함)이 백기통곡단(白旗痛哭團)을 조직하여 상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수 유림들에 대한 평판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3·1운동과 같이 적극...
-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서울 중앙고보 재학 시절 3.1운동 주동자로 활약하였으며, 일본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청년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가 철도시설을 위하여 철도연변(鐵道沿邊) 부지를 헐값에 강제 매입하려는 일제의 횡포와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상적인 보상을 받는 등 주민의 권익옹호에 앞장섰으며, 여수군수, 전남도 사회교육과장, 여수일보사장, 제2대 때부터 5대...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무신 정춘의 신도비. 여수시 여천동 여천고등학교 건너편 내동마을 입구 표지석 위 학동 정수장 아래 오른쪽에 사충사 유허비와 함께 있다. 원래의 비는 비좌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첨석도 한쪽이 완전 박락되고 비신도 박리현상이 심하였다. 비의 높이는 196㎝이고, 너비는 55㎝였다. 이 비는 풍화정도가 너무 심해 비문 해독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충조(鄭忠朝)는 1930년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항일 노동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인식하여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항일 민중 의식 고취와 조직화된 저항만이 유효한 항일 투쟁 방법임을 확신하고, 민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항일 노동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6월 일본 경찰에...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각 급 학교에서는 독서회 형태의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여수공립수산학교(麗水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이던 정학조(鄭學朝)도 1930년 3월 백인렬, 정보한, 윤경현, 이용기, 김양호, 오놀보, 정재석, 진자미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인...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감목관 정현의 선정비.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선정비를 새겼다. 비의 높이는 100㎝이고, 비의 너비는 40㎝이다. 비의 앞면에는 "행감목관정후현선정비무술팔월(行監牧官鄭侯鉉善政碑戊戌八月)"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이 있는 곳에 고인돌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서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
2007년 3월 27일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 조개더미 유적지에서 현장 설명회가 있었고, 이후 유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설명회가 4월 24일 다시 열렸다. 국립광주박물관에 따르면 3월 27일 이후 유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구의 인골이 추가로 발굴됐고, 이 가운데 3호 인골은 팔목에 다섯 개의 조가비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는 앞...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말기 돌산군수 조동훈의 영세불망비. 여수가 한창 복군(復郡)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초대 돌산군수로 임명된 조동훈이 종포에 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 유지들은 조동훈에게 돌산을 돌산군에 편입시켜 여수에서부터 돌산까지 다스려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조동훈은 조정에 여수 네 개 면(面)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주민들...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조문현의 선정비. 조문현의 전직은 승지(承旨)로 1869년에 절도사로 여수에 부임하였다. 부모를 모시듯 군사와 백성을 사랑하고 아껴 관내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그를 생불(生佛)이라고 불렀으며, 이임 후 선정비를 세웠다.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 입구의 비각 안에 있다. 형식적으로 조각한 조잡한 귀부 위에 철제로 된 비신을 세웠...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병호(趙炳浩)는 전라남도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당시인 1930년 3월 항일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 조직인 독서회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다가 1931년 9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1년 9월 4일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독립 유공자 공적 조...
-
전라남도 여수에서 1945년 해방 후 조직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한 임시 행정기구.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체제로 바뀌자 대부분의 지방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개조되거나 인민위원회에 흡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초기에 미군정에 협조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은 이를 배척하였다. 결국,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에는 갈등 대립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상당수 많은 시군...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 존속한 행정구역. 조수소는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 가운데 하나인 소의 형태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지역에 존재했다.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도호부에는 부곡(部曲)이 송림(松林)·...
-
전라남도 여수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음악가. 충청남도 천안 출생으로 온후한 인품에 천성이 청민(淸敏)한 교육자다. 22세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청주공립보통학교를 시작으로 공주, 나주, 광주 등지를 거쳐, 1925년에 여수수산학교에 부임하여 여수와 인연을 맺고 여수여고와 수산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다. 1946년에는 여수 야간상업중학원[현 정보과학고]를 설립하였고, 1947년에는...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라남도 여수에 존속한 지방하급 행정구역.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도호부에는 부곡(部曲)이 송림(松林)[남 15], 하이사(下伊沙)[남 15], 이촌(梨村)[서 70], 죽청(竹靑)[북 20], 적량(赤良)[재삼일포], 율촌(栗村)[동 30], 별량(別良)[남 30], 가음(嘉音)[서 90], 진례(進禮)[재여수현동], 소라(召羅...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주원석(朱元錫)은 1930년대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자 항일 운동가로서 여수공립수산학교 생도들의 항일 운동을 배후 조종한다는 혐의를 받아 경찰에 수차례 구속되었다. 이 때 일제가 내린 25일 구류의 언도가 부당하다고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등 조선총독부 재판부에도 철저히 항거하였다. 1932년에는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를 조직하여 정미 노동...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주재년은 1940년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최연소 항일 지사로 1929년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작금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43년 돌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5세 때 조선 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하고 다니면서 마을 담장 밑 큰 돌 4개에 ‘일본과 조선은 다른 나라(朝鮮日本別國), 일본은 패망한다(日本鹿島 敗亡),...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마주교 옆에 있는 조선 후기 비석. 1666년(헌종 12) 김석휴 등 마을 사람들이 만재석교(또는 마주교)를 만들었다. 만재석교비는 당시의 마을 주민들이 다리를 만든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는 오랜 풍상으로 인해 글씨 등이 많이 마멸되어 1961년에 재건되었다....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수암산에 있는 조선 중기 석축 산성. 죽암산성에 대한 축조연대나 성의 규모 등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그 연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투구봉 전설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기 위해 수암산 투구봉을 중심으로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리 4호 가마터의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통해 10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수암산 가...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본산성·수죽산성·과녁산성으로 이루어진 산성지. 죽포산성지는 죽포마을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다. 본산성은 해발 271m인 본산의 정상에 위치한다. 본산은 둔전마을과 죽포마을의 경계이며, 임진왜란 때 왜적의 본영이 있었다고 한다. 수죽산성은 죽포리 마을 뒷산 정상에 자리한다. 과녁산성은 두문마을 앞 산 정상에 있으며, 방죽포와 인접...
-
1931년 중국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전라남도 여수에서 발생한 중국인 추방운동.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에서 발생한 만보산 사건이 국내의 일부 신문에 의해, 만주의 우리 동포들이 중국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습격당했다고 전해졌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들을 박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여수에서도 중국인 추방 운동이 벌어졌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만주로...
-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동 지역에 존속한 행정구역. 진례부곡은 전근대 사회에 존재했던 향·소·부곡의 특수 촌락 집단 가운데 하나인 부곡의 형태로, 지금의 여수시 상암동 진북마을과 진남마을 일대에 존재했다.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 및 붕괴 과정에서 국가 제도에 따라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순천...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동 진례산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대.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적이 침입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전투를 담당한 군사적 고지(高地)이기도 하다. 진례산 봉수대는 상암동 진례산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돌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묘도 봉수대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봉수터는 군사시설로 인하...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면서 각 급 학교에서는 독서회 형태의 항일 비밀 결사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시 여수공립수산학교(麗水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이던 진자미(秦者味)도 1930년 3월 백인렬, 정보한, 윤경현, 이용기, 김양호, 오놀보, 정재석, 정학조 등과 함께 여수 등대산(燈臺山)에서 비밀 결사인 독서회의...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차원부의 유고 문집 『차문절공유사』를 새긴 조선 후기 목판. 차원부(車原頫)[1320~1407]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로 본관은 연안,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거사,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역학에도 밝았다. 조선 개국공신 하륜 등과의 갈등...
-
전라남도 여수시와 연결되어 있는 철로 위에서 차량을 운전하여 여객과 화물을 운송하는 설비 및 수송 체제. 우리나라 철도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군사적 차원과 식민지 경제 수탈을 위한 경제적 차원에서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철도 역사는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제물포-노량진]의 개통으로 시작되었고, 여수 지역 철도 역사는 1929년 2월 26일 남조선철...
-
조선 중기 이순신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에 축조한 쇠사슬로 만든 방비시설. 철쇄방비시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구축한 방비시설 중 하나이다. 즉,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만든 방비시설로서 왜구가 야간에 좁은 수로를 지날 때 쇠사슬에 걸려 피해를 입도록 한 것...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차동 유적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 갑옷. 철제갑주는 2008년 죽림리 차동 2지구 9호 석곽묘에서 발견되었다. 장방형 철판 다수를 상하로 연접하여 원두정(圓頭釘)[대가리가 둥근 못]으로 고정시킨 철판 갑옷으로 횡장방판정결판갑이다. 상부가 결실되어 정확한 형태는 파악할 수 없으나 현재 상하 4단이 남아 있다. 유사한 형태의 합천 옥전 28호분의 출토품을...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는 나라의 미래를 보고자 하면 그 나라의 청년을 보라고 했다.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 있는 안도는 작은 섬이지만 지역 사회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런 인물을 키워내는 데 축이 되었던 단체가 안도소년단이었다. 안도소년단은 1931년 안도리 916번지에 살며 의사를 했던 강대원의 처남 목일선이 서울에서 휴양차 내려...
-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 최완의 청덕비. 전라좌수사 최완은 1720년(숙종 46)에 부임하여 여수의 동쪽에 동서재(東書齋)와 서쪽에 서서재(西書齋)를 세우고 학문을 장려하였다. 제주목사로 전임하자 고장 백성들이 청덕비를 세워 그의 공을 기렸다.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 입구 비각 안에 있다. 개석은 없어지고 비신이 장방형의 비좌 위에 서 있다. 비의 높...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완규(崔完奎)는 1940년 6월 일본 동경 소재 목백상업학교(目白商業學校)에 재학하면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이 때 같이 근무하던 안명수(安明洙)로부터 영향을 받고 항일 독립 운동 행동 강령을 정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2년 6월 30일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5개월 간 옥고(獄苦...
-
망치는 망상어의 사투리로, 특이한 것은 알을 산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새끼를 낳는 태생 어류이다. 크기는 성어가 25㎝ 정도이며 보통 15㎝ 정도면 식용이 가능한데 새끼를 배 안에 품고 있을 때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한다. 예전에 풍부하던 망치는 지금은 어족이 줄어 망치치기는 1970년대까지 이루어졌던 어획법이다. 망치는 대개 보리가실(수확) 때에 새끼를 낳는데, 이 시기에 바위에...
-
전라남도 여수시 덕충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우의 중수 내력을 기록한 글. 충민사를 중수해야 하는 당위성과 충민사를 여수에 세우게 된 연유와 이순신과 안홍국을 배향한 이유 그리고 부정(副正) 호암 박대복의 공이 지대함에도 충민사에 배향하지 못한 이유와 박대복의 가문의 충절과 영호남의 향원을 동원하여 충민사를 중수하는데 앞장을 선 충의와 효열을 기록한 글이다. 순천부(府)의 남쪽이며 좌...
-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 도요지. 수암산에 있는 투구봉 동쪽으로 구릉 정상에 당산나무가 있다. 여기서부터 서쪽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진 소로를 따라 500여m 정도 내려가면 소로와 인접한 산록에 광산이씨 이영호의 묘가 있다. 취적리 도요지는 이 묘역 주변에 위치한다. 도요지는 현재 파괴된 상태이며, 깎아낸 산의 단면과 길 양옆에서 적은 양의 백자 조각들...
-
전라남도 여수시 선원동 테미산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 테미산성의 명칭은 토미산성, 선원동산성 등으로 불리고 있다. 테미산성은 토미산 또는 테미산으로 불리는 산 정상에 있는데 테미산은 산의 고어인 미에 테가 둘러진 산성이란 의미로 테뫼식 산성[산정식산성]이 있는 산을 통칭한다. 토미산은 테를 한자로 표기가 어려워 토(兎)로 표기한 것이다. 선원동산성은 테미 또는 토미 등 혼란스런 표...
-
1999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여수시가 삼여통합 1주년을 기념하여 매설한 타임캡슐. 삼여 행정 기구를 합하여 하나의 통합 행정 기구를 만들기 위해 통합여수시설치준비단이라는 한시 기구를 1997년 12월 24일 발족시켰다. 마침내 「전라남도 여수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에 관한 법률」 부칙 제1조에 의해 1998년 4월 1일 통합 여수시가 개청되었다. 통합 여수시가 발족됨에...
-
조선시대에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운용되었던 널빤지로 지붕을 만든 군선(軍船). 조선 전기의 군선은 조운(漕運)을 겸하는 맹선(猛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군용으로서 제구실을 못했다. 특히 16세기에는 삼포왜란·사량왜변·을묘왜변 등 변란이 속출했는데, 맹선으로 왜구를 제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군선 개발에 부심한 결과, 1555년(명종 10)에 새로 개발해...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성터.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달암산성과 함께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평사성지는 많이 파괴되었으며, 성 규모는 높이 5m, 길이 약 300m 정도라고 한다....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마을은 조개더미 위에 마을이 형성된 집촌이다. 그래서 늘 식수가 부족하고 가뭄이 들면 하나 있는 큰 샘 앞에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흉년이 들어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시대인 1967년부터 1970년에 미국에서 원조한 밀가루로 안도리 98번지(음달) 일대를 저수지로 만들기 위해 둑을 쌓고 마을까지 약 1.5㎞를 관으로 연결하여 골목골목마다...
-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광복 공간에서 활동한 정치인. 한학을 닦아 일제강점기에 도평의원을 지냈고, 동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건국 후에는 줄곧 어협조합장, 면의회의장, 도교육위원 등 공직에서 활동하였다. 삼산면 동도리 출생으로 호는 귤산(橘山)이다. 한학을 닦아 일제강점기에 도 평의원을 지냈고, 1925년 거문도 동도리에 동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건국 후에는 줄곧 어...
-
여수의 선박은 민가의 어선뿐만 아니라 전함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예부터 여수가 어항이면서 조선 초기에 설진된 진례만호진·돌산포만호진·내례만호진, 성종 때 설진된 전라좌수영, 중종 때 설진된 방답첨사진의 관방이 있었고, 여수 근해에 풍부한 어장과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본격적으로 여객선이 운행된 것은 1950년대부터이며,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
-
통일신라시대 전라남도 여수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는 데 있어 자연히 지방행정 구획의 재편성을 단행하였다. 지방 행정조직 개편은 677년(문무왕 17) 무렵 당의 세력을 밀어낸 후 687년(신문왕 7)에 걸쳐 완성되었다. 9주(九州) 5소경(五小京)의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신라가 단일정부로서 중앙에서 백제·고구려의 옛 영...
-
1945년 해방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949년 6월 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같은 해 8월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 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여수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월 1일 여천지구 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
-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뭐니뭐니해도 전라좌수영과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충무공 이순신의 공이 크다.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신설한 군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왜구와 접촉이 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에 각각 좌·우 양영으...
-
전라남도 여수시 둔덕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산성. 신라 말 화랑들이 수련했다는 전설이 있어 일명 ‘화랑산성’이라고도 부르며, 산성 주위에 있는 굴을 화랑굴이라고 한다. 1988년 여수시 문화원에서 발간한 『여수·여천 발전사』에 “호랑산성은 삼일읍 호명리에 있는데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왜적의 침입을 막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해 석벽을 구축한 것이나 확실한 것...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선착장에는 2006년 1월에 GS칼텍스에서 기증한 풍향대가 있다. 기단 위에 스테인리스를 이용해 3층으로 꾸민 10m 높이의 시설이다.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는 풍향대는 1918년 안도어업협동조합에서 처음 세웠으나 낡아져 20여 년 전에 보수했지만 또 녹이 쓸고 제 구실을 못하던 것을 GS칼텍스에서 지역 주민 만족 사업의 하나로 제작해 준...
-
멸치는 갈치와 마찬가지로 빛을 쫓아다니는 추광성(追光性) 어종(魚種)으로 서도리에서는 불을 밝혀 멸치 떼를 유도하여 포획한다. 챗배를 이용하여 멸치를 잡는 시기는 연중 음력 5월, 6월에 집중된다. 이때 밤마다 멸치를 잡기 위해 수십 척의 배가 호수와 같은 바다 가운데서 불을 밝힌 채 작업하는 광경은 육지에서 보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어 또 하나의 홍국어화(紅國漁火)를 거문도 내...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백야곶목장[곡화목장] 감목관들의 선정비.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앞 도로가의 느티나무 숲에 있다. 비의 형식을 갖춘 비석 입비(立碑) 3기는 도로가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향좌로부터 높이 130㎝, 폭 40㎝의 "행감목관구후준원구민선정비(行監牧官具侯駿遠救民善政碑)", 높이 110㎝, 폭 40㎝인 "행감목관김후학례영세불망비(行...
-
전라남도 여수시 화장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기와요지. 여수시 화장동 선사유적 공원 내에 있으며, 기와를 굽던 2기의 가마가 남아 있다. 1. 1호 가마(동쪽에 있는 가마) 반지하식 굴가마로 소성실 바닥에 모래가 섞여 있다. 전체 길이는 840㎝, 소성실(燒成室) 길이는 430㎝, 소성실 최대 너비는 197㎝, 소성실 높이는 68㎝이다. 출토 유물로는 막새류는 보이지 않고 암키와,...
-
전라남도 여수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5.10 총선거로 여천 지역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과 여수어업조합장, 한국 어민회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여수시장을 역임하면서 지역개발에 기여하였다. 여수수산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5월 10일 여천 지역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여수어업조합장,...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횡간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라좌수사·군관·순천부사·방답첨사 등이 남긴 각석문.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이 위치한 곳은 계단식으로 된 50평 정도의 암반을 이용하여 건너편 돌산읍 금성리에 있는 해안굴을 과녁 삼아 활을 쏘는 지방관원들의 연마장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관들의 놀이터 역할도 겸했다고 하여 지방민들은 놀이청으로 부르고 있다. 횡간도 놀이청 각석문은 전...
-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의 금오도-안도간 연도교 가설 공사로 1313번지 일대 890평에 산재한 안도 조개더미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자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2007년 1월 2일부터 4월 6일까지 약 90일에 걸쳐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흑요석 220여 점이 확인되어 단일 유적으로는 가장 많은 수량이 발굴되었다. 흑요석은 날카로운 날을 얻을 수 있는 화산...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안포리의 자연마을. 힛도는 바다 지명이 육지의 지명으로 바뀐 대표적인 예이다. 힛도는 원래 백야도[화정면 백야리]와 화양반도 사이 좁은 해협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흰섬’이라고도 불렸는데 해양 지명 중 도진(渡津)[나루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힛’은 백야도가 하얗게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접두사이며, ‘도’는 명량(鳴梁)이나 노량(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