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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023
한자 歷史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집필자 나종우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김제시의 변천 과정.

[개설]

전라북도 중앙부의 서쪽에 위치한 김제시는 동쪽으로 노령산맥의 주능선을 경계로 완주군과, 남쪽으로는 동진강을 경계로 정읍시 및 부안군과, 북쪽으로는 만경강 및 그 하구를 경계로 익산시·군산시와 인접하며, 서쪽으로는 서해에 접하고 있다. 김제의 자연환경을 보면 동부에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높이 500~700m의 산지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으로 분포하는데, 모악산을 중심으로 구성산·국사봉·상두산 등이 있다. 모악산상두산에는 두월천·원평천이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죽산면에서 서해로 유입된다.

그밖에 황산면황산과 서해 연안의 봉화산·진봉산 등 100m 내외의 산지를 제외하면 시 전체가 50m 미만의 야트막한 언덕과, 동진강·원평천·만경강 주변의 광대한 충적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호남평야의 중심이 된다. 호수로는 능제·대율저수지·백산저수지·석동제·웅제 등이 있어 농업 관개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의 만경강과 남쪽의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망망한 김만평야를 안은 김제는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으로,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고대]

역사적으로 볼 때 김제시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여 생활의 터전을 닦아온 곳이다. 김제시 금산면 일대의 남방식 고인돌을 비롯하여 관내 곳곳에서 긴 돌칼이나 유구석부(有溝石斧) 등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벽골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볍씨 자국이 찍혀 있는 민무늬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는 김제 지역이 청동기시대부터 농경 문화가 상당히 발달된, 우리나라 논농사의 시원지 중 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서 54개 부족국가 가운데 가장 방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벽비리국(辟卑離國)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백제시대 이곳은 벽골군(碧骨郡)이었다. 벽비리국이나 벽골군은 모두가 ‘벼의 고을’ 또는 ‘볏고을’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김제가 일찍부터 논농사의 중심지였기에 나온 말이다. 또한 백제 때에는 ‘벽지산(辟支山)’ 또는 ‘피성(避城)’이라고도 불렸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피성은 한때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660년(의자왕 20)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난 후 주류성[지금의 부안]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을 펴던 부흥군이 662년 12월에 본거지를 피성으로 옮겼다가 두 달 후인 663년 2월에 다시 주류성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약 60일간 백제 부흥군의 수도였던 셈이다. 금산사는 그 뒤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으로서 불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 통일기 김제를 살펴보면, 757년(경덕왕 16) 전국적으로 지명을 중국식 한자로 변경하였을 때 벽골이 김제로 바뀌었고, 만경·금구 등의 이름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특기할 것은 851년(문성왕 13) 해상 영웅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淸海鎭)이 폐지되면서 그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백제 부흥군이 이곳으로 왔던 사실이나, 청해진 주민을 이곳으로 옮긴 사실은 모두가 이곳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40년(태조 23)에 김제 지역은 부윤(富潤)거야(巨野)로 개칭되었다. 1143년(인종 21)에는 김제현금구현으로 나뉘었고, 예종 때 와서는 다시 만경현·김제현·금구현이 차례로 현령관(縣令官)으로서 독립 행정구역이 되고 전주목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김제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1403년(태종 3)에 김제현이 다시 김제군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김제군의 호구는 409호, 인구는 2,065명이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만경현이 한때 김제군에 병합되기도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만경향교, 1676년(숙종 2)에는 금구에 향교가 세워져 교육과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남하하는 왜적을 무찌른 금구대첩이 이곳에서 있었다. 이후로 왜구들의 코베기가 극성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김제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웅치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전사한 정담(鄭湛)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때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용인에서 큰 공을 세운 나형(羅珩)이 있다.

[근대]

조선 후기 철종 때에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금구 지역에서도 수백 명의 농민들이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방 관리의 행패를 들어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민 봉기는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는데, 김제 지역에서는 김봉년(金奉年)·김덕명(金德明) 등 2천여 명이 이에 호응하여 백산에 진을 치고 관군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만경장날인 4월 4일을 기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근대의 인물로는 한말의 지사였던 장태수(張泰秀)와 만보산사건 때 선두에 서서 투쟁하면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정한조(鄭瀚朝), 독립투사인 정현섭(鄭賢燮)과 지역 교육의 선구자인 조재돈(趙在敦) 등이 있다.

[현대]

일제 때에는 미곡의 집산지로서 발전이 이뤄지면서 인구가 증가했으나, 해방 후에는 미곡 반출이 중지되면서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기능이 쇠퇴하였다. 또 한국의 산업 구조가 공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농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진 김제의 인구는 정체하거나 감소하였다.

1970년대 초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이 김제 지역에서도 이루어져서 농촌 지역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공단 조성 등 산업화는 늦어져서 1989년 1월 1일에야 시로 승격하였다. 1989년 시로 승격된 이후 1994년 말까지 김제시의 개발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져서 농공단지 등 공단을 조성하고, 도시 기본 계획을 재정비하였으며, 상·하수도 및 교통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5년 1월 1일부터는 도농 균형 발전을 위한 통합 김제시로 발전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1세기의 김제시는 지방 도시 생활권의 거점 도시로서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광역 교통권 도시로 자리 잡고, 궁극적으로는 농촌형 공업 도시의 기반을 다진 상태에서 시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끌어올리는 쾌적한 관광 도시가 되는 것이 과제이다.

이용자 의견
박** 이 페이지가 검색 혹은 왼쪽 목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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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변
  • 디지털김제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서 담당자에게 전달하였습니다.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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