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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90
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기미독립운동,기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창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일원
관련인물/단체 공문학|김봉빈|안백균|배세동|임창무|오연길|장택석|이석재

[정의]

1919년 3월 2일부터 4월 4일까지 전라북도 김제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무단 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인은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다양한 경로로 나타났다. 한편 국외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자고 주창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1919년 1월 21일 사망한 고종이 일제의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동요하였다.

2월 8일에는 일본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경에 있는 조선 YMCA회관에 모여 독립 대회를 열었다. 이 사실이 국내에도 알려졌고, 이어 기독교·천주교·불교 관련 국내 명망가들이 모여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애초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선언 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파고다공원에서는 운집한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독립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김제 사람들도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발단]

김제 지역에서는 천도교 조직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유포되었다. 3월 2일 당시 김제읍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선언서가 도착했으며, 교구장 공문학은 바로 교인 김봉빈과 안백균 등을 통하여 죽산·부량 등 각 면과 인근 고을에 배포하였다. 3월 4일에는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선언서 꾸러미가 발견되었고, 3월 6일에는 김제읍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려다 적발되었다.

[경과]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이 3월 13일 전주읍장에 갔다가 만세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뒤, 4월 16일 같은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의논하여 20일 원평장날을 기하여 만세 시위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준비 끝에 3월 20일 오후 원평리 원평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 수백 명의 군중이 시장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만경 지역에서는 만경공립보통학교 훈도 임창무, 오연길, 장택석, 이석재 등이 일찍부터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경장날인 4월 4일 정오경에 임창무가 3~4학년 생도를 교정에 모아 놓고 일제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한 뒤 시위 참여를 선동하고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100여 명의 생도가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뒤따랐으며, 행렬이 시장에 이를 무렵 수백 명의 면 사람들이 동조하여 시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결과]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군중이 모이는 곳을 감시하던 경찰에게 원평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이 체포·구금되었다. 시위의 핵심 인물이던 배세동 등 10여 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6개월에서 1년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만경 지역에도 당일 오후에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하여 폭력 진압을 벌이면서 대열이 해산되고 임창무 등 주동 인물들이 검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1919년 3월과 4월에 걸쳐 펼쳐진 김제 지역의 3·1운동은 일제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김제 사람들이 전개했던 활동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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