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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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漢基 |
영어공식명칭 | Do Hangi |
이칭/별칭 | 예숙(禮叔),관헌(管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세욱 |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성주 출신의 유학자.
[개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벼슬을 멀리하며 오로지 성리학과 저술로 생을 보낸 순수한 유학자이다.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字)는 예숙(禮叔), 호는 관헌(管軒). 고려조 도순(都順)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도석진(都錫晋)이고, 어머니는 성주 배씨(星州裵氏) 배의범(裵儀範)의 딸이다. 부인으로 상산 박씨(商山朴氏) 박만식(朴晩湜)의 딸과 여주 이씨(驪州李氏) 이주형(李柱亨)의 딸을 두었으나 조카뻘인 도승모(都承模)를 통해 가계를 이었다. 뒤에 아들 도학모(都學模)를 얻었고 문익재(文翼在), 이만조(李萬祚), 전재두(田載斗)를 사위로 두었다.
[활동 사항]
도한기(都漢基)[1836~1902]는 어릴 때부터 경학(經學), 산학(算學), 병학(兵學), 의가(醫家), 역가(曆家), 패관(稗官)의 지식을 두루 섭렵하였고, 약관(弱冠)의 나이에 시부(詩賦)로 이름을 얻었다. 특히 옥사(獄事)에 밝아 관찰사나 병마사가 도한기의 명성을 듣고 옥사에 관련된 큰일에는 반드시 도한기의 의견을 물어 처리하였다. 30세 이후에 성리학에 침잠하여 육경(六經)[중국 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에 관한 성인의 가르침, 낙민(洛閩)[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희(朱熹)는 민중(閩中) 사람이므로 이 두 학파인 정주(程朱)의 학문을 말함]의 서적을 두루 읽고, 동방 제현의 설들을 융합하려 하였다. 학문적 표상으로 이정(二程)[정호와 정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과 주자(朱子)[주희를 높여 이르는 말]의 작은 영정을 벽에 걸어 두고 절하며 자신을 경계하였다. 혹세무민의 도술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근검절약하였지만 이웃에 궁핍한 자가 있으면 힘을 다해 구제하였다.
젊어서부터 책을 수집하는 성벽이 있어 필사하거나 모은 책이 2,000권에 달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의 난에 가산이 모두 소진되었으나 책만은 문묘(文廟)에 옮겨 둘 정도로 책에 대한 애착이 심하였다. 이후에도 향교에 부족한 경사(經史)[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서적을 구입하여 제공하는 등 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고을 북쪽 월전(月田)[성주군 초전면 소성동 월전산]의 천석(泉石)[물과 돌로 이루어진 자연의 경치]을 좋아하여, 만년에는 그곳에 정자를 지어 탁래정(濯來亭)[옛 견해를 씻어 내고 새로운 뜻을 맞이해 온다는 의미]이라 부르며, 교우하고 강론하며 소요하였다. 관찰사 엄세영(嚴世永)[1831~1900]이 도한기의 명성을 듣고 이조(吏曹)에 천거할 정도로 학행이 높았다.
[학문과 저술]
이진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로 성리 서적에 전념하며 육경과 정주서(程朱書)를 비롯하여 명현(名賢)들의 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깊이 있는 논설을 남겼다. 저서로는 『관헌집(管軒集)』 19권과 그 밖에 『소학문난(小學問難)』, 『대학강설(大學講說)』, 『춘추의례(春秋義例)』, 『사례절략(四禮節略)』, 『관복집설(官服輯說)』, 『심근강의(心近講疑)』, 『흠서속어(欽書續語)』, 『읍지잡기(邑誌雜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