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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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壽寺址 |
영어음역 | Mansusaji |
영어의미역 | Mansusaji Archaeological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1275[만덕로 13-5]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성 |
성격 | 사찰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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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고려시대 |
소재지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1275[만덕로 13-5]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
[개설]
만수사지는 일명 동자복사라고도 한다. 만수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동자복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18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일명동자복재건입포동안(一名東資福在巾入浦東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에도 ‘일명동자복재건입포동안상(一名東資福在健入浦東岸上)’이라 기록되어 있다.
[변천]
만수사는 조선시대의 배불 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가 1702년(숙종 28)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李衡祥)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을 보면 “주성(州城) 동쪽에 만수사(萬壽寺)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海輪寺)가 있어서 각각 불상은 있으나 상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자체에서 한 사람을 정하여 돌보게 하고 또 네 명절 때면 서로 모여서 예불(禮佛)할 따름이다. 나는 말하기를 점차 오래 둘 수 없으니 곧 두 사찰을 헐어서 공해로 옮겨 세우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형상이 그리게 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건포배은’에는 1702년 12월 20일 이형상 제주목사의 선정에 대해 도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임금께 절을 올리는 모습과 신당이 불타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1733년에 작성된 그의 행장에는, “도민 700여 명이 건포에 모였는데 어찌 감히 공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냐면서 신당과 두 곳의 사찰을 불사르고 불상을 바다에 던졌다. 목사로 부임하여 불과 6개월여 만에 제주도의 신당 129개소를 불태우고,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서슬 퍼런 이형상의 행동으로 제주 불교는 한껏 위축되었고 비슷한 처지의 무교와 습합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신당과 불교의 융합은 미륵당으로 표현되어 이 시기에 보다 밀접하게 혼합된다.
구원을 약속하는 불교의 미륵불이 민간의 신당으로 내려가 마을과 민중의 수호신으로 함께 존재하며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보다 가까이에서 어루만져 주게 된 것이다. 현재 제주도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수사 동자복 미륵과 해륜사 서자복 미륵은 이러한 조선 후기 제주 불교의 신앙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황]
만수사지의 옛 절터에는 개인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만수사지 터에 고려시대 미륵불로 추정되는 복신미륵이 남아있을 뿐이다. 복신미륵은 제주 시내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에 각 1기씩 자리하고 있다.
그중 동쪽 건입동의 만수사 터에 있는 것을 동자복, 서쪽 용담동의 해륜사 터에 있는 것을 서자복이라 부른다. 만수사가 폐사된 후 동자복 미륵은 개인 주택 뒤뜰 7평쯤의 공간에 자리 잡게 되었다. 만수사지의 동자복 미륵은 제주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들은 제주도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차양이 빙 둘러진 모자를 쓰고, 예복을 걸친 후,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다. 동자복, 서자복 모두 다공질의 현무암 석질로 조성되어 있고 형상과 조각 수법 등이 동일한 것으로 미루어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의 유적들이 현존하지 않는 제주도에서 만수사지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수사지의 동자복 미륵이 문화재가 아닌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파손, 변형되고 있어 안타깝다. 빠른 시일 안에 이곳을 문화재로 승격시켜 보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