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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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羲純 |
영어음역 | Jo Huisun |
이칭/별칭 | 덕일(德一),학해당(學海堂)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정의]
조선 말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평양. 자는 덕일(德一), 호는 학해당(學海堂). 아버지는 진사 조존영(趙存榮)이다.
[활동사항]
1864년(고종 1)부터 3년간 죽산부사를 지냈으며, 1866년(고종 3) 12월 부령부사에 임명되었으나 1867년(고종 4) 병으로 교체되었다. 1868년 10월 이후선(李後善)[1813~?]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72년(고종 9) 5월에 떠났다.
재임 중인 1869년(고종 6)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가을에는 홍수가 나 흉년이 들어 아사자가 많이 생겼다. 변방 방위에 대비하기 위해 무사 200명과 총사 1백 명을 특별히 배치하여 당번을 세웠고, 후일 총사 50명을 증원 배치하였다.
1868년 4월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 김종려(金鍾呂)의 임기가 만료되어 김만일(金萬鎰)[1550~1632] 후손 중 유학(幼學) 김광준(金光俊)이 맡도록 하였다. 1868년 10월 제주판관 이재정(李載貞)이 지난 1865년(고종 2) 7월에 부임하여 1868년 11월에 만기가 되었으나 그의 행정 능력이 뛰어나 내년 보리 수확기까지 유임해 주도록 조정에 요청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조정에 쌀 2천 석과 내탕금 2천 냥을 요청하여 기민들에게 분배하였다. 또 진휼에 쓰다 남은 돈으로 서책을 매입하여 향교와 서원에 나누어 주었고, 향교를 중수하고 군기를 수리하며 화약도 제조하였다.
1871년(고종 8) 여름 서원 훼철령에 따라 제주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사우인 삼성사, 귤림서원, 영혜사, 향현사, 송죽사, 의사묘 등을 모두 철폐하였다. 1872년(고종 9) 제주목사를 떠난 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오위도총부부총관·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고종 18) 관제 개편 때 군무사 당상경리사로서 근대식 군부의 개편에 참가하였고,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에게여 발탁되어 금위대장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 정권이 붕괴하자 좌변포도대장에 임명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는 『손자수(孫子隋)』가 있으며, 글씨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방선문(訪仙門)의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72년(고종 9) 9월에 세운 ‘사상조공희순선정비(使相趙公羲純善政碑)’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다. 1872년(고종 9) 10월에 세운 ‘목사조공희순교궁개수비(牧使趙公羲純校宮改修碑)’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소재의 제주향교에 있다. 또한 1878년(고종 15) 5월 향리들이 세운 ‘사상조공희순영세불망비(使相趙公羲純永世不忘碑)’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관덕로 25] 소재의 제주목 관아지(사적 제380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