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0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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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음역 | Gaesingyo |
영어의미역 | Protestant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성윤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발생하는 기독교 교회의 모든 신앙활동.
[개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고도 하는 개신교는 16세기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로, 로마 가톨릭교회·동방 정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개신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후반이다.
제주 지역에 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개항기인 1907년으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이기풍(李基豊) 목사를 선교사로 파견하면서부터이다.
[전래 과정]
제주 지역에 개신교가 들어온 1907년은 1901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 때문에 제주도민들 사이에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기풍 목사는 성내 장터에서 전도를 하다가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위협을 당했고, 가는 곳마다 적대시하는 눈초리와 침식마저 거절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이미 예수교인이 되어 내려온 신자들이 있었으므로, 이기풍 목사는 김행권의 집에서 기도회를 가지다가, 그 후 일도리의 초가집 두 채를 사들여 신도 십여 명과 예배를 드렸다.
1910년에는 삼도리 출신청(出身廳)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사들여 성내(城內)교회라고 이름 붙였다. 성내교회는 나중에 서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90년대 들어 다시 성내교회로 이름을 회복하였다.
성내교회는 신도가 늘어나자 1915년 총독부에 교회 설립 신고를 하였고, 1922년에는 목조 건물 60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신도들의 활동으로 점차 삼양, 금성, 한림, 김녕, 세화, 성읍 등으로 포교가 확대되었다.
1913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제주 지역 전도를 전라노회에게 맡기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부터 전라노회에서 파견한 윤식명(尹植明) 목사와 원용혁(元容赫) 전도사가 산남 지방의 전도를 담당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모슬포교회가 세워졌으며, 법환·중문·고산·용수·두모·협재 등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신자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제주 3읍 곳곳에 교회와 기도처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개신교인들은 밤 예배는 지역 교회에서 보면서도 일요일 낮 예배는 이기풍 목사가 설교하는 성내교회에서 보았다.
1930년 제주 지역에 17개 교회와 7개소의 기도처가 생겨나자, 전라노회에서 갈라져 제주노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감시도 심해졌다.
1940년경 제주도에는 24개 교회에 13명의 목사가 있었는데, 일본말로 설교를 하지 못한다는 구실로 11명의 목사를 육지로 내쫓아서, 한림교회 강문호(康文昊) 목사와 서귀포교회 조남수(趙南洙) 목사만 남게 되었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실시된 신사 참배 강요는 제주 지역 개신교인들에게도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일제는 제주 읍내는 물론 서귀포·한림·모슬포 등지에 신사를 세워 놓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개신교 지도자들과 교인들 모두 신사에 참배하고, 국경일에는 신사의 제례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성 안의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등은 일본군에 징발되었다. 이런 억압 상황에서 개신교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의 상황]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남수 목사가 중심이 되어 이도종(李道宗) 목사와 강문호 목사를 다시 불러들였고, 흩어졌던 교인들도 다시 교회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본군대가 사용하던 막사를 예배당으로 만들었다. 특히 1945년 7월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불타 버렸던 한림교회는 1947년 미군의 지원으로 신사 터를 불하받아 새로 지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4·3사건으로 교회는 다시 큰 타격을 입었다. 1948년 6월 화순교회의 이도종 목사가 무장대에 의해 돌과 창을 맞고 사망하였으며, 그 밖에도 무장대와 군경에 의해 피살된 교인들이 16명이다.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서 제주 지역 개신교인들은 무장대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무장대의 방화로 서귀포교회를 비롯하여 협재교회·삼양교회·조수교회가 불에 탔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1만여 명의 피난민이 제주도로 들어왔는데, 이들 중에는 유명한 개신교계 지도자들과 저명인사들도 끼어 있었다. 피난민으로 내려온 개신교인들은 곳곳에 교회를 만들고 전도를 함으로써 개신교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피난 온 개신교인들이 설립한 교회는 제주영락교회를 비롯하여 도두, 한라, 화북, 신촌 등 11곳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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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방 이후 교회수와 신자의 변화
[다양한 교단의 유입]
해방 직후부터 장로교단은 분열하여, 김재준 목사를 따르는 목사와 신도들이 ‘한국 기독교 장로회’를 따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제주노회에 속해 있던 제주읍의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등이 ‘한국 기독교 장로회’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장로교 이외의 다른 교파의 교회들이 들어와 제각기 선교를 시작하였다
감리교는 1951년부터 제주에서 포교를 시작했는데, 1980년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늘어나 2004년 현재 16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밖에도 1970년대에 6개 교단이, 1980년대에는 12개 교단이, 1990년대에는 10개 교단이 새로 들어옴으로써, 2004년 현재 제주 지역에는 모두 34개 교단이 있다.
그 중 예장 통합 계열이 가장 많아 2004년 현재 34개 교회로 증가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온 예장 합동측이 12개 교회로 증가하였다. 그 밖에 예장 고신파와 동신파를 비롯해서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등이 들어왔다.
1980년대에는 예장의 각 계파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오는 한편, 흔히 순복음교회라고 부르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들어와 2004년 현재 15개 교회로 증가하였다.
1990년대 이후도 10개 이상의 새로운 교단이 들어왔지만, 대부분 1~2개 교회에 그치고 있다.
[개신교회의 급성장]
1980년대 이후 제주 지역의 개신교는 다양한 교단의 유입과 함께 신자수와 교회수가 모두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1963년만 해도 제주 지역의 개신교 신자는 5,877명으로 인구의 1.9%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빠른 속도로 늘어나, 2004년도에는 51,62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9.3%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수치는 전국 평균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제주 지역만 놓고 볼 때는 엄청난 변화이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까지 보여 주었던 가파른 증가세는 1995년 이후 크게 둔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제주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는 1970년대 이후부터 절반가량이 제주시에 집중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현재까지 별로 바뀌지 않고 있다.
반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 시내에 있는 교회는 20% 이하로, 제주도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빠르게 늘어나 43.8%까지 증가하였다. 이는 교회의 제주시 집중 현상이 뚜렷해졌음을 말해 준다.
제주시의 교회당 평균 교인수를 보면 1973년에 216명이던 것이 1979년에 454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개척 교회가 급속히 늘어난 1980년대를 거치면서 1989년에 257명으로 뚝 떨어지고, 1990년대에도 계속 줄어 2001년에는 182명, 2004년에는 156명까지 줄어들었다.
교회당 평균 교인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교인수가 크게 증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교회가 빠른 속도로 늘어남으로써 교인들이 기존에 다니던 교회로부터 새로 생긴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현상이 대량 발생했음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