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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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民亂-年- |
영어음역 | 1813nyeon Jeju Millan |
영어의미역 | Jeju Uprising in 1813 |
이칭/별칭 | 양제해의 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금순 |
성격 | 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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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13년 |
종결연도/일시 | 1814년 |
관련인물/단체 | 양제해|이재수 |
[정의]
1813년(순조 13)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일으킨 민란.
[역사적 배경]
1813년(순조 13) 제주도 백성들에게 부과된 부역이 너무 과중해지자 양제해가 김익강·고덕호·강필방 등과 함께 거병을 모의하였다. 이때 사람을 모으고 병기를 만들어 제주성과 정의·대정에서 거병하기로 뜻을 모았다.
양제해는 제주 영읍의 네 관원을 죽이고, 섬 전체를 장악한 후 배가 육지로 못 나가도록 한 뒤, 육지의 배가 들어오면 재물을 빼앗고 배를 엎어버려 북쪽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버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목적]
제주도민에게 부과된 부역의 과중함에 항의하고, 사회·경제적 폐해를 개혁하며, 제주도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민란이었다. 또한 한정된 관직 자리를 둘러싼 인사 행정, 잡역·잡세의 병폐 등을 일소하려 하였다.
양제해는 제주도민의 부역의 무거운 고통과 간교하고 사악한 서리 및 장교의 타도를 주장하면서 제주도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각종 폐해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영문(營門)과 삼읍 4관장(官長)[목사, 판관, 양읍의 현감]을 제거해야 한다면서 민란을 일으켰다.
[경과]
고덕호는 거병하여 성을 치는 데 가담하였고, 양제해의 아들 양일회는 제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윤광종이 이 사실을 알고 관에 밀고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 목사 김수기가 민란 주동자들을 문초하였고 양제해 등 7명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제주 찰리사 겸 위유어사로 부임한 이재수는 사건의 전말을 조사한 뒤, 2명에게 사형을, 4명에게 무기한 정배를, 6명에게 귀양을 언도하고, 25명을 석방하였다.
[결과]
이재수는 민란의 원인을 관리들이 계를 만들고 당을 이루어 백성들을 학대했기 때문으로 보고, 이를 조사하여 폐단의 근원을 없애려 하였다. 또한 문무과 시험을 시행하여 궁핍한 제주도 백성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과거 시험이 실시되었고, 문과 4명, 무과 193명이 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