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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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亂 |
영어음역 | millan |
영어의미역 | upris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한금순 |
[정의]
제주도에서 발생한 12세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제주 민중의 항거.
[개설]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난 시기는 탐라가 고려에 병합되던 12세기부터이다. 이때의 민란은 탐라령의 횡포나 고려의 압정에 저항하면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 정벌 직후 원은 제주도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았는데, 외세의 지배 하에서 탐관 오리의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고려와 몽고의 이중적인 과세, 원의 일본 정벌 준비 과정에서의 가혹한 노역 등이 더해져 민란을 촉발시켰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빈번한 민란이 되풀이되다가, 조선이 건국하면서 잠시 평화의 시기를 맞았으나, 다시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삼정(三政)의 문란에 분격한 농민들이 궐기하여 임술민란을 일으킨 것을 기폭제로 잇달아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민란]
고려시대 대표적 민란으로는 ‘사용, 김성의 난’이 있다. 『고려사』 충숙왕 5년 「2월조」에 “제주민 사용, 김성 등이 무리를 모아서 난을 일으켜 성주, 왕자를 내쫓았다”라고 되어 있다. 관리와 토호 권세가의 이중적인 가렴 주구가 난의 원인이다.
또한 ‘목호의 난’은 원에서 제주도 목장에 파견하여 목마에 종사케 했던 몽고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탐관 오리의 침탈에 시달리던 제주도민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이외에도 1374년(공민왕 23)에 차현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으로, 최영에 의한 상당수의 마필 징발도 난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민란]
우선 임술 농민 항쟁은 1862년(철종 13) 당시 임헌대 방어사가 특정인의 청탁을 받아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고 그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겨 징수하는 등 가렴 주구를 멈추지 않음에 따라 발생하였다.
1862년 10월 안덕면 서광리에 살았던 강제검과 제주목에 살았던 김흥채 등이 삼읍의 농민을 이끌고 제주성문을 부수고 관청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결국 임헌대 제주목사는 화북으로 도망가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강제검과 김흥채 등은 목이 베어져 저자 거리에 내걸렸다.
경인민란은 1890년(고종 27) 12월 목사와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의한 민중 봉기였다. 1888년 제주에 부임한 송구호 제주목사와 1890년(고종 27) 부임한 조균하 제주목사는 민간의 재화를 갈취하는 데 급급하였다.
이에 홍수와 흉년, 호열자의 만연, 그리고 부역의 되풀이 등으로 오랫동안 비참한 상황 속에 놓여 있던 농민들은 애월읍 하귀리 출신 김지의 선동 하에 제주성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김지는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농민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1891년(고종 28) 정의현이 이완평, 현계환 등이 수많은 민중을 모아놓고 관리와 악질 토호들의 비위 사실을 성토하고 강력한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난이 진압되면서 이완평 등 4명은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병신민란은 1894년(고종 31)에 일어났다. ‘홍범 14’조를 위시한 각 분야에 걸친 새 체제의 급격한 강행은 당시 동요하던 민심을 더욱 자극하여 민중 사이에 반발을 일으켰다.
이에 1896년(고종 33) 3월 제주 사람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수천 군중을 이끌고 신설된 경무청에 난입하여 ‘제도 개혁 반대, 왜양축척(倭洋逐斥)’ 등을 내세워 민란을 주동했다. 그러나 이 난도 관군에 의해 진압된 후 송계홍은 자결하였으며, 강유석은 도망쳤으나 그의 자식들은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무술민란은 1896년(고종 33)에 이병휘 제주목사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일어난 난이다. 화전민인 방성칠은 원래 전라도 동복군 사람인데 제주목사의 가렴 주구에 분노해 마침내 동헌으로 몰려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주목사의 횡포가 줄어들지 않자 난을 일으켰고, 주성을 점거한 민란군은 관덕정 광장에 모여 밤새 함성을 지르며 제주목사와 군수를 비롯한 탐관 오리들의 비행을 성토했다. 그러나 이후 난이 진압되면서 방성칠은 대중 앞에서 붙들려 난자당하여 죽었다.
천주교란은 1901년(고종 38)에 발생했다. 이 난은 당시 구마슬 신부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인 특수 권력과 이에 편승한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제주도민들이 궐기하여 일어난 난이다.
당시에는 천주교도가 살인을 해도 관리가 체포하지 못했으며 시체의 검시도 허용하지 않았다. 천주교도가 남의 부녀를 빼앗거나 강간을 해도 백성은 이에 항의하지 못했다. 천주교도들은 이미 팔아넘긴 토지가 다시 필요해지면 원가만 지불하며 늑탈하고, 교회에 끌어다가 사형을 가하고 성서나 포교 책자 등을 강매하였다.
또 천주교도들을 비방하는 행위를 천주교에 대한 모독으로 단정 지어 교회에 연행한 뒤 징벌, 체형 등을 함부로 하였다. 이처럼 불법 행위와 약탈 행위가 극에 달하자 대정군의 유지들이 탐관 오리와 불량 교도들의 불법 행위에 대항할 자위 집단으로 상무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을 추대하여 천주교도에 맞서자 두 세력 간의 분쟁이 야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군중이 일어섰으나 당시 장두인 오대헌은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평화적 항의가 별 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자 비분을 참지 못한 이재수가 마침내 무장 봉기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 난으로 인해 피살당한 천주교도들은 400명에서 500여 명에 이른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함정이 5월 31일 제주항에 닿아 천주교도를 제외한 제주도민을 모조리 섬멸하겠다고 하였으나, 이재호 신임 제주목사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결국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은 서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프랑스 공사는 배상금 5,160원을 청구하였고, 이는 1904년 제주도민이 부담하였다.
[제주민란의 배경]
1.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조건
제주도는 구한말 농민층의 분해와 지주 경영이 강화되던 육지 상황과 달리 봉건적 신분제나 지주 전호제가 대단히 미약하였고, 육지의 산간 지방에서처럼 중소 지주나 영세한 자작농, 자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미개간 국유지가 많고 어업, 목축 등의 보조 생계 수단이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무산자나 임노동자 또는 걸인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사회, 경제적 동질성이 강하였고 이는 농민 항쟁 시 동일한 적대 세력에 대한 강한 계급적 연대성을 발휘하여 전 제주도민이 참여할 수 있었던 조건이 되곤 하였다.
또한 제주 민란 발생의 공통적 배경으로 특유의 토지 보유 구조와 주세 수취 구조를 들 수 있다. 원래 제주도의 경지는 공토(公土)로서 전답에는 소유권이 없었으며 그 매매 역시 오직 사용권의 매매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농민들도 지세가 아닌 지대를 납부하는 국가 소작인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경작권, 사음권, 지대율 등이 불안하고 이를 매개로 한 봉건적 수탈 착취가 용이하게 자행될 수 있는 토지 보유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제주도는 공물 상납을 제외하고는 행정과 재정 운영이 거의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중앙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는 자의적인 통치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의 악용의 소지가 많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부임한 목사들은 거의 다 수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때문에 제주도민은 전통적으로 국가 권력의 수탈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하였다.
2. 조세 수취 문제와 제주도에서의 세폐
광무 정권은 수취 제도의 근대적 개혁이란 명목 하에 지방 재정을 전부 중앙 재정에 편입시켜 일원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 지주제를 강화시키려는 한편 지대와 지세를 인상시켜 농민에 대한 수탈을 가중시켰다.
또한 부족한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전에 없던 호주세, 어장세, 시장세 등의 각종 세목 하에 잡세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같은 조세와 잡세의 수취는 중간 수취자에 의해 배가되는 양상이었다.
광무 정권은 세감(稅監), 봉세관(捧稅官) 등으로 불리는 세원을 파견하여 세원 조사와 세금 납부를 독촉하였다. 이들 세원은 조세 수취 과정에서 해당 사항이 아닌 전답 물품에까지 과세하거나 기존의 경작권, 사음권 등에 간섭하여 재래의 토지 보 유 구조를 재편성시키는 등 작폐를 불법적으로 자행하였다.
제주도에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은 전권을 행사하면서 징세가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와 산물을 조사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중 한 예로 논 1두락에 10량을 부과하였다.
이는 여타 지역의 세 배에 해당하는 무거운 액수였다. 조세 업무를 장악한 봉세관의 지위는 실질적으로 지방관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것이 제주 특유의 조건과 결합되면서 수탈은 한층 더 극렬히 표출되었다.
3. 천주교 문제와 제주도에서의 교폐
19세기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86년 한불 수호 조약과 1896년 교민 조약 등으로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프랑스 천주교는 실제 구한말 국가 내의 국가와 같은 조직 체계를 통해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포교 활동을 꾀하였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가 천주교 신자였는데, 이는 순수한 종교적 차원이라기보다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는 신부를 배경으로 그 특권과 보호, 원조를 향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 입교한 교인들은 자신들도 곧 법국인(法國人)이라는 치외법권적 명의 하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갖가지 불법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심지어 사형(私刑)까지 마음대로 시행하였다.
또 봉세관 강봉헌이 일부 불량한 천주교도들을 세금 징수인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들은 지세를 비롯한 잡세, 심지어는 가축, 수목, 계란에까지 일일이 세금을 매겼다. 이에 따라 관헌의 수탈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천주교도들에게 집중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반 천주교 의식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봉세관, 천주교인, 유배인이 결합되고 지방 통치 세력, 일반 민중들이 결합되는 형태로 침략, 침탈적인 외래 세력과 방위적인 제주도민 간의 적대적인 대립축이 형성되어 나아갔다.
[의의와 평가]
1901년 제주 민란은 세폐와 교폐의 혁파라는 운동 목표를 놓고 각계 각층이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전 제주도민이 참여한 연합 운동으로, 그 주도층이 하층 민중에 있었던 반봉건 반제 민중 항쟁으로서 그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를 시종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하였다는 점과 부수적인 현상이었지만 같은 외세이자 침략 세력인 일본인에 협력을 요청한 사실, 그리고 향장이었던 오대현과 관노였던 이재수로 대표되는 동서진간의 계급적인 갈등은 이 민란의 한계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이 항쟁을 통해 기존의 조세 수취 구조를 개선하는 17조항의 전령과 교폐 방지를 위한 교민화의 약정을 얻어내는 등 실질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