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41 |
---|---|
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History of Hwaseong-S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창훈 |
[정의]
삼국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의 역사.
[개설]
경기도 화성 지역에는 삼국 시대부터 정치체가 성립하기 시작하였으나, 정치체의 명칭이나 위치 등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삼국 시대에 들어서는 백제-고구려-신라 순으로 통치하였는데, 백제 관련 유적이 가장 풍부하다. 화성 지역은 경기도권 내에서도 백제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여러 정황상 백제 중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백제는 5세기 후반까지 화성 지역을 지배하였고, 이후 약 80년간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놓였다.
신라가 화성 지역을 차지한 것은 6세기 중반 무렵부터인데, 이때부터 화성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특히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갇혀 있던 신라는 그간 중국 대륙과 직접 교류하기가 어려웠는데, 남양만을 끼고 있는 화성 지역을 확보하게 되면서 비로소 중국과의 직접 통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7세기 후반 나·당동맹에 사활을 걸고 있던 신라 입장에서 화성 지역은 반드시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양만 일대는 이후 남북국 시대에 이르러서도 중국으로 출발하는 기항지이자 해상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삼국 시대 초기의 소국]
중국의 정사(正史) 중 하나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은 3세기 무렵 한반도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당시 한반도 중·남부는 한(韓)이라 불렸는데, 『삼국지』 동이전은 지금의 경기도에서 전라남도에 이르는 지역을 따로 마한(馬韓)으로 지칭하여 구분하였다. 마한에는 모두 54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고 하며,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일대에도 3개 정도의 소국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지명 발음의 유사성과 발굴 조사된 유적의 분포를 고려하여 봉담읍 지역을 모수국(牟水國)으로, 남양읍·비봉면 일대를 원양국(爰襄國)으로, 우정읍·장안면 일대를 상외국(桑外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들 소국은 늦어도 4세기 무렵에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삼국 시대]
화성 지역은 삼국 시대 초기부터 5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특별시]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이자, 고구려에 밀린 백제가 웅진[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한강 유역을 비롯하여 화성 지역도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지금의 봉담읍 일대에는 매홀군(買忽郡)을, 남양읍 일대에는 당성군(唐城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6세기 들어 신라가 급성장하면서 551년에 백제와 함께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553년, 백제가 차지하였던 한강 하류 유역까지 탈취하며 한강 유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자연히 화성 지역에 설치되었던 매홀군과 당성군도 신라에 귀속되었는데, 행정 구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중국 대륙의 당은 7세기 이후 신라의 국제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대국이었는데, 남양만에 인접하여 있던 당성군은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 교통의 관문이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남양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상 교통로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당항성을 축조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에 있는 '화성 당성'이 당항성으로 비정된다.
[남북국 시대]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였고, 신라는 영토를 9개의 주(州)로 정비하였다. 이때 화성 지역은 한주(漢州)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봉담읍 지역에 있던 매홀군을 수성군으로, 남양읍 지역에 있던 당성군을 당은군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당은군의 영현은 둘이었는데, 차성현(車城縣)과 진위현(振威縣)이다. 823년(헌덕왕 15)에는 당은군과 수성군을 통합하였는데,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얼마 가지 않아 829년(흥덕왕 4)에 당은군은 다시 당성진(唐城鎭)이란 이름으로 분리되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당성진에는 군사적 기능이 부여되어 있었는데, 9세기에 들어 국제적 문제로 부각된 해적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에 설치된 혈구진(穴口鎭) 등과 함께 해적을 퇴치하고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