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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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of Hwaseong-S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창훈 |
[정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화성시의 역사.
[개설]
화성시의 역사는 발굴 조사된 유적과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유적은 태안 지역, 봉담 지역, 향남 지역 및 길성리 토성 주변 지역, 서해안에 접한 우정읍-장안면 일대, 마도면-서신면 지역, 오산-동탄 지역 등에서 다수 조사되었다. 이러한 유적들을 통해 선사 시대 이래 사람들의 거주 양태와 정치 세력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화성 지역의 마한 소국은 지명 발음의 유사성과 유적의 분포를 고려하여 봉담읍 지역을 모수국(牟水國)으로, 남양읍·비봉면 일대를 원양국(爰襄國)으로, 우정읍·장안면 일대를 상외국(桑外國)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들 소국은 늦어도 4세기 무렵에는 백제에 흡수되었다.
화성시 내에서 삼국 시대 이래의 주요 거점은 지금의 남양읍과 봉담읍 일대이다. 남양읍 일대는 당성, 당은, 남양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봉담읍 일대는 매홀, 수성, 수주, 수원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 두 지역은 화성시 역사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 지역의 특산물로는 아악기인 경쇠를 만드는 재료인 경석(磬石), 옥을 가는 데 쓰인 모래인 정옥사(碇玉沙), 각종 생선과 조개류, 소금 등이 기록에 보인다. 또한 화성 지역에는 '화성 당성', '화성 융릉과 건릉' 등 다수의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지정학적 위치]
화성 지역은 고대 이래 한반도의 서쪽에서 남북을 잇고, 남양만을 통해 중국 산둥반도로 오갈 수 있는 교통의 결절점이었다. 또 고려·조선 시대에는 남도 지방과 수도인 개경·한양을 잇는 조운로상의 길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도와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외적으로부터 수도를 지키는 방어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삼국과 남북국 시대에는 화성 지역에 당항성을 축조하거나 군진을 설치하여 교역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고려·조선 시대에도 군사와 행정을 아우르는 도호부와 진을 설치하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지금의 남양읍 서북쪽 송산면 일대에 화량진을, 남양읍 서남쪽 서신면 일대에 영종포를 설치하였는데, 경기도 지역 수군의 주요 거점이었다.
[당성군-남양도호부 지역의 변천]
화성 지역은 삼국 시대 초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잡아 죽이자, 고구려에 밀린 백제가 웅진[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도읍을 옮겼다. 화성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의 영유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넘어갔고, 고구려는 몇 개의 지방 행정 구역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의 남양읍 일대에는 당성군(唐城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6세기에 들어 신라가 급성장하면서 550년대에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공격하여 오는 백제를 격파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 당성군도 신라의 소유로 넘어갔다.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자, 신라는 영토를 9개의 주(州)로 정비하였다. 당성군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였는데, 757년(경덕왕 16)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829년(흥덕왕 4)에는 다시 군사적 기능을 강화하여 당성진(唐城鎭)으로 개편되었다.
고려 건국 후에는 당성군으로 이름이 복구되었으며, 양광도의 수주에 속하였다가 얼마 후 인주(仁州)[지금의 인천광역시]에 속하게 되었다. 원 간섭기인 1290년(충렬왕 16)에는 당성군 출신의 홍다구(洪茶丘)[1244~1291]가 원나라에서 정동행성(征東行省) 우승(右丞)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당성군에서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익주는 이후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익주목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는 전국의 목이 혁파됨에 따라 남양부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남양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다.
한편, 고려 말에는 왜구의 발호에 따른 피해가 극에 달하였는데, 서해안 일대도 왜구 침입으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후, 수도 한양의 방비와 조운로 보호를 위해 서해안에서 한강을 거쳐 수도로 향하는 통로의 안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413년(태종 13) 남양 지역에 군사와 행정 기능을 결합하여 남양도호부를 설치하고, 수군 병영을 설치하였다.
남양도호부는 1644년(인조 22)에 역적 형(衡)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효종 4) 복구되었다. 또 1665년(현종 6)에는 종이 주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고, 1674년(현종 15)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충이나 효를 거스르는 반역 사건이 발생하면 지방 행정 구역의 위상이 강등되는 일이 흔히 발생하였다. 개항 이후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 도호부 체제가 종식되어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남양군이 수원군으로 통합되었으며, 해방 후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분리되어 화성군이 되었다. 이후 인구와 제반 여건 변화에 따라 일부 지역의 분리와 편입이 있었고, 2001년 화성시로 승격되었다.
[매홀군-수원도호부 지역의 변천]
고구려가 화성 지역을 차지한 이후 봉담읍 일대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은 매홀군(買忽郡)이다. ‘매홀’은 고구려 고유어로서, '매'는 물[水]을 의미하고, '홀'은 성(城)을 뜻한다. 매홀군 역시 6세기 중반에 신라가 장악하였는데, 당시 신라에서 어떻게 불렀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757년(경덕왕 16)에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이 바뀐 사실이 확인된다.
고려 초, 수성군 사람들이 후백제로부터 귀순하여 오자 940년(태조 23)에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이후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던 1271년(원종 12)에 몽골군이 대부도에 침입하여 백성을 노략질하였는데, 섬사람들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몽골군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수주의 관리였던 안열(安悅)이 반란을 평정하였고, 공을 인정받아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다시 얼마 뒤에 수주목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 목의 혁파에 따라 수원부로 개편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홍건적에게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수원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1413년(태종 13) 남양도호부와 함께 수원도호부로 개편되었다. 1526년(중종 21)에는 수원부 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있어 수원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535년(중종 30) 복구되었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수원 지역 읍치를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이어서 1793년에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켰다. 화성유슈부의 초대 유수로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조의 최측근 채제공(蔡濟恭)이 임명되었고, 채제공의 주도 아래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원 화성'이 건설되었다. 화성유수부는 정조의 정치 개혁을 위한 거점으로 조성되었으며,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 외영도 설치되었다. 이후 1895년 을미개혁 때 유수부가 혁파되면서 화성군으로 개편되었다.
[화성시의 문화유산]
화성시에는 다수의 국가 지정 문화재와 시도 지정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먼저 삼국 및 남북국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는 사적으로 지정된 '화성 당성'이 있다. 화성 당성은 당항성으로 비정되는 성으로, 삼국 및 남북국 시대 화성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조선 시대 문화유산으로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화성 융릉과 건릉'이 대표적인데, 역시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창건된 용주사에도 국보로 지정된 용주사 동종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